125 화
또다시 이곳에 왔다.
새로 지은 녹시렐 저택의 화려함과 평온함에 익숙해진 탓일까, 옛 녹시렐 저택이 더욱 특출나게 음침하고 스산해 보였다.
‘외관이 깨끗해 보이는군. 하긴. 사실 이 저택을 떠난 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으니 당연한 일인가…….’
이곳에서 멜과 재회하고 동거했던 것이 무척 과거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1년이 될까 말까 하다.
그 기억을 떠올리니 괜히 심장을 쿡쿡 찌르는 듯한 아릿함이 느껴졌다.
“공작님. 혹시 모르니 먼저 저희가 안쪽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래.”
예전에 이곳에 방문했을 때 주민들이 워낙 공포에 떨기에 저택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를 퍼뜨렸었다. 그러니 혹시 무단으로 저택을 점령한 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와 아란은 다른 호위들이 저택 내부를 살펴보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나의 안전을 위해 우리는 저택 입구와 꽤 먼 곳에서 그들을 기다렸다.
“좀 늦는군요.”
“저택이 워낙 넓어서 그럴지도 몰라.”
그 말을 하자마자 평온한 안색으로 저택 문을 열고 그들이 나타났다. 어디 한 곳 상한 곳도 없었고, 표정도 아주 온화했다.
“공작님. 아무 문제도 없었습니다. 저택 안에 들어가서 쉬시지요.”
“그래. 다 함께 들어가지.”
“아니요. 저희는 이곳에서 지낼 때 필요한 물자들을 사서 오겠습니다.”
타당한 말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아란과 함께 저택에 들어가려 했다.
그때 기사들이 아란을 붙잡았다.
“아란 님.”
“왜 그러지?”
“저택 보수 및 사와야 하는 물자에 대해 상의드릴 점이 있습니다. 잠깐인데 괜찮으실까요?”
아란은 살짝 내 눈치를 살폈다. 잠깐이라도 나를 혼자 두기 염려하는 기색이기에 나는 서둘러 말했다.
“나는 괜찮으니 대화하고 들어와.”
“……후. 알겠습니다. 어찌 된 게 이들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없군요.”
아란이 기사들을 대놓고 타박한 뒤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거듭된 임무 실패 때문에 실망감이 큰 듯했다.
그런데 두 명 중 한 명은 처음부터 녹시렐 비밀단체에 속한 자라서 아란에게 익숙했지만, 다른 한 명은 외부 출신이다.
비록 대단하지는 않으나 귀족 가문의 혈통을 옅게 가지고 있는 이다. 하지만 그는 웬일로 아란이 대놓고 비꼬아도 기분 나쁜 기색이 없었다.
“공작님. 날이 춥습니다. 안에 벽난로를 피워놓았으니 편히 쉬시지요.”
“그래. 알겠다.”
나는 홀로 저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는 뼛속까지 시릴 듯한 기온에 힘껏 쇠문을 밀어 열었다.
끼이익-.
문을 연 순간 마주한 저택 내부의 공기는 몹시 차가웠다.
그 탓에 깨달았다. 기사들이 내게 거짓을 고했다는 걸.
쾅!
문이 거세게 닫혔다. 나의 의지나 혹은 바람 탓은 아니었다.
예전에 저택에서 도망치려 하다가 멜이 막아서며 구부러뜨린 대문의 손잡이가 보였다. 또한 그때처럼 그 손잡이를 쥐고 있는 희고 예쁜 손 까지도.
기사들이 거짓말을 했던 건 그들의 의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 존재에게 홀린 탓이지.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앞에 선 이를 바라봤다.
“안녕, 세르베인…….”
꿈속에서나 봤던 이가 내 앞에 선 채 웃고 있었다.
순간, 환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멜이 나를 만나기 위해 육지로 오다니. 너무나 희박해서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가능성이 아니던가. 하지만 눈앞의 존재는 실재했다.
“멜……!”
무작정 그를 와락 끌어안을 뻔했다. 하지만 내 손이 그 목을 감싸며 끌어안기 직전에 갑자기 이성적인 생각이 나를 덮쳤다.
……멜이 왜 기사들로 하여금 거짓을 고하게 홀렸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를 깜짝 놀라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기에는 저택 안이 너무나 춥고 황량했다. 기사가 말한 벽난로 따위는 불을 붙였던 흔적도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좋은 의도로 나를 기다린 게 아니라, 나를 음해하려는 이들이나 할 법한 행동이지 않은가.
‘아니야. 멜은 워낙 이런 걸 준비하는 데에 서투니까 그럴 수도 있어.’
나는 애써 첫 번째 의문을 지워버렸다. 어차피 그건 큰 문젯거리도 아니었다.
정말로 심각한 건 두 번째 의문이었다.
‘왜 수도가 아닌 옛 녹시렐 영지로 오라고 했지? 게다가 단순히 나를 여기로 이끌기 위함이었다면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있었을 거야. 왜 하필 그런 소문을 냈어?’
제법 악의적인 소문이 아니던가. 바다가 노했다고. 그것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면 녹시렐 공작을 옛 녹시렐 영지로 보내라고.
나는 처음에 이 일을 바다가 꾸민 줄 알았다. 그렇게 확정을 내리고 이곳에 왔다.
그런 초자연적인 일을 벌일 수 있고, 나에게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릴 만큼 나와 관계가 좋지 않은 이는 바다뿐이니까. 나는 바다가 그런 짓을 꾸민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런데 이 일을 꾸민 주체가 멜이라니.
‘……모르지. 바다가 사나웠던 건 그냥 바다 독단의 행동이었을지도. 그리고 멜이 수도로 올 수 없었던 이유도 뭔가 있었겠지.’
애써 멜을 대신해 변명해봤지만, 속으로는 알았다. 바다 독단의 행동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탄 배가 바다를 건널 때 그토록 잠잠했던 게 말이 안 된다. 바다는 나를 미워하니까.
갑자기 순수하게 눈앞의 상대와 재회한 것에 기뻐할 수가 없었다. 이 상황이 내가 상상한 재회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서서히 손을 거두었다. 그와 거리를 두기 위해 살짝 뒷걸음질 쳤지만 쇠문에 가로막혀버렸다.
“…….”
애초에 눈앞의 상대가 정말 멜이긴 할까?
그 인어가 내 흉내를 냈듯, 이 모습 역시도 다른 인어가 흉내 낸 건 아닐까?
하지만 그 의심은 단 한마디로 인해 곧바로 사라졌다.
“반가운 기색이 아니네……. 이해해.”
“아, 아니야! 나는 그냥-”
“그래. 넌 내가 보고 싶지 않았겠지. 하지만 나, 이렇게 부득불 너를 만나러 왔어…….”
“…….”
“질리더라도…… 참아줘?”
핀트가 나간 내용. 살짝 늘어진 듯한 말투. 애증이 섞인 얼굴.
예상치 못한 반응에 바싹 얼어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러자 멜이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리더니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이 내 기억과 똑같이 너무 예뻐서 순간적으로 상황을 잊어버렸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래도 내가 왔는데 기뻐하는 흉내라도 내주지 그랬어…….”
“기뻐. 당연히 기뻐. 기쁜데…… 상황이 조금 이상해서.”
나는 멜이 속상해할까 봐 반사적으로 그를 달래려 들었다. 그래서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속마음이 일부 내비쳤다.
“그래? 음…… 그랬구나.”
하지만 멜은 내가 무엇 때문에 당혹스러워하는지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혹은 이미 알고 있거나.
‘일단 말로 풀어야겠어. 왜 그런 소문을 냈는지, 왜 하필 이곳으로 오라고 했는지…….’
분명 멜에게도 사정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멜이 먼저 말했다.
“널 데리러 왔어.”
“뭐?”
“우리 함께 바다로 가자.”
문손잡이를 쥐고 있던 흰 손이 스르륵 풀렸다. 그 손은 이제 내 두 손목에 사르르 감겨오기 시작했다. 내가 그의 손에 끼워줬던 반지가 보였다.
나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데리러 왔다는 말부터, 바다로 가자는 것까지.
그냥 그의 손에 내 의지를 빼앗긴 채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 손길과 달리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다고 했잖아. 그러니 괜찮지?”
일이 단단히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직감이 든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의 모습을 살폈다.
멜이 갑자기 왜 이렇게 망가졌을까. 나를 미워하는 듯하면서도 불안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나는 조심스레 잡힌 손목을 빼내 그의 손을 어루만지려 했다. 하지만 멜이 놓아주지 않았다.
조금 아프기까지 했지만 나는 티를 내지 않았다. 결국 여전히 손목이 붙잡힌 채 말을 이었다.
“멜. 혹시 내가 너를 바다로 보낸 것 때문에 그래?”
“…….”
“미리 상의하지 않은 점은 미안해. 하지만 말했더라면 너는 가지 않으려 했을 거야. 너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었고, 나는 결과적으로 내 행동을 후회하지 않아.”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멜이 토라진 이유는 이것뿐이다. 그래서 미리 선수 쳐서 사과했다.
“…….”
하지만 멜은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응어리가 풀린 기색이 전혀 아니었다.
이제 와 멜이 무섭다거나, 그런 감정은 전혀 느끼지 않는다. 다만 답답할 따름이었다.
문제가 있으면 대화로 풀어야 한다. 그게 우리가 긴 시간을 빙빙 돌아 마주한 결과 아니었던가. 결국 다그치듯이 말했다.
“멜. 나는 이해가 안 가. 네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내게 화를 내고-.”
“화낸 적 없어.”
“……그러면 손이라도 놓아 주지 그러니?”
그 말에 멜이 울컥,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누가 보면 내가 그를 겁박이라도 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곧 멜은 내 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보더니 차츰 손에 힘을 풀었다. 나는 붉게 변한 손목을 어루만지며 계속 말했다.
“멜. 솔직하게 무엇 때문에 네 기분이 좋지 않은지 이야기해줘. 그리고 왜 그런 나쁜 소문을 퍼뜨려 나를 이곳으로 불러들였는지도.”
“왜 나를 추궁해……? 역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야?”
“……너를 사랑하니까 묻는 거잖아. 어떻게든 널 이해하고 싶어서 묻는 거잖아!”
계속해서 대화가 어긋나는 느낌에 초조해져서 나도 모르게 조금 짜증스럽게 말했다.
뒤늦게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지만 멜은 그런 내 모습에 충격을 받은 듯 하얗게 질려 있었다. 곧 그가 바들바들 떨리는 입으로 말했다.
“왜 화를 내……? 네가 날 버렸잖아.”
“그러니까 널 버린 게 아니라 널 위해서-”
“날 버리고 그 왕이라는 남자랑 결혼할 생각이었잖아.”
그 말에 하던 말을 멈췄다. 미처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멜을 올려다봤다.
그런 내 반응에 멜이 일부러 비웃기 위함인지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눈은 너무 슬펐기에, 전혀 그 얼굴이 냉소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나 다 알고 있어. 늘……, 늘 네 소식만 기다리며 지냈으니까.”
“멜. 그건 오해야. 물론 프로셴이 그런 제의를 한 적 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거절했어. 그가 왜 그런 제안을 했냐면-.”
“그러니까 바다로 가자.”
멜이 내 말을 잘랐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도저히 그의 얼굴이 내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아서, 들을 수 없어 보여서 그랬다. 그는 완전히 패닉에 빠져있었다.
“나, 더는 불안해서 너를 수도에 못 두겠어. 사실 이곳도 안전하지 않은 것 같아.”
“…….”
“우리 바다로 가자. 거기서는 떨어지는 일 없이 행복하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