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 화 (124/132)

124 화

처음 들었던 생각은 ‘왜?’였다.

저 선원의 말이 거짓일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야, 이미 알지 않는가. 그런 비현실적 현상들이 사실은 정말 존재하는 것이라고.

내가 궁금한 건 왜 바다가 나를 옛 녹시렐 영지로 불러들이는지, 그 이유였다. 차라리 바다에 나를 산채 제물로 바치라는 편이 더 그럴싸하지 않은가?

‘사실 그것도 말이 안 되긴 해. 나는 이미 바다가 바라는 대로 멜을 바다로 보내지 않았나.’

내가 우두커니 서 있자, 기사는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이라 생각했는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그저 헛소문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는 서둘러 마차를 잡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느새 녹시렐 저택에 도착한 상태였다. 미리 소식을 전해 들은 건지 사용인들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두꺼운 옷과 따뜻한 차 따위를 준비한 상태였다.

‘그래서 이들이 외출을 막았던 건가.’

차츰 의문들이 해소되기 시작했다. 왜 사용인들이 그냥 정원만 산책하면 안 되냐 물었는지.

그들은 이미 소문을 알고 있었고, 나를 보호하기 위해 그랬던 것이다.

“그 소문이 왕국 내에서 어느 정도로 퍼져있는지 알아야겠다.”

“! 공작님, 정말 헛소문입니다. 사람들도 그리 생각하고 있어요. 바다에서 목소리를 들었다니. 익사 직전에 들은 환청일 게 분명하다구요.”

내 옷을 갈아 입혀주던 하녀가 다급히 말했다. 홑몸도 아닌데 괜한 일로 스트레스를 받으실까 염려되니 부디 신경 쓰지 말라는 말도 함께였다.

“…….”

하지만 조사한 결과, 상황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심각했다.

어업 중단으로 왕국 전체에 해상 자원이 품귀 현상을 빚음. 바다를 통한 타국과의 교류 역시 약 한 달간 중단됨.

이렇게나 심각한 상항을 어떻게 한 달 동안이나 모른 채 지낼 수 있었을까. 그건 의도적으로 이들이 내 눈과 귀를 막은 탓이다.

‘여기에는 프로셴과 블미에 역시 꽤 영향을 미쳤겠지.’

나는 그동안 저택의 하녀들이 내게 건네주지 않은 편지들을 살폈다.

그동안 내게 전달된 편지는 프로셴과 블미에에게서 받은 평화로운 안부 편지뿐이었다. 속에 화가 들끓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공작님. 최근 그동안의 소문과 결이 다른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인지하고 계십니까?

제 선에서 최대한 없애기 위해 노력하겠으나 특정 계층을 상대로 퍼진 소문이 아니므로 결과를 장담해드릴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틸리타에게 온 여러 장의 편지가 있었다. 사용인들이 편지 봉투를 뜯어 내용을 확인하는, 도를 넘는 검열 행위의 기미는 다행히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프로셴이나 블미에로부터 그들의 편지를 제외하고는 전부 차단 시키라는 요구라도 받은 모양이지.’

그런데 그중에는 무려 부모님으로부터 온 편지도 있었다.

딸아. 우리가 존재를 숨긴 탓에 너의 작위 수여식에도 참석하지 못해 매우 미안하구나. 여전히 바쁠 것이 예상되지만 시간이 난다면 부디 또 집으로 와주렴. 너의 연인도 보고 싶구나.

요즘 어떤 소문이 돌던데……. 아니다. 내가 괜한 소리를 했구나. 나랏일 하느라 바쁠 텐데 부디 몸조리 잘하거라.

편지에 답이 없어 걱정되는구나. 잘 지내는 게 맞니?

부모님의 존재는 철저히 기밀이다 보니 이 편지 역시 그저 중요하지 않은 평민으로부터 온 편지라 여겨져 전달되지 않은 듯했다.

사실 나는 부모님과 교류가 잦은 편이 아니었다. 그분들은 녹시렐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 것에 강경히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나는 그분들의 뜻을 거스르고 험한 길을 걸어왔으니까.

“여자애가 어떻게 그런 험한 일을 하려 하니?!”

“고생하지 말고 평범하게 살거라. 괜히 여자애가 큰일에 엮이면 팔자 비틀리는 거다.”

“부모가 말을 하면 좀 들어!”

당시, 그 말들을 들으며 여러모로 속이 뒤틀리긴 했지만 사실 그 생각이 이해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누가 봐도 가시밭길이니 자식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으셨던 것이지. 게다가 그저 학자셨던 조부모님이 돌아가시게 된 것도 녹시렐 가문과 연관이 있었으니 내 부모님의 공포가 얼마나 클지 짐작할 수 있었다.

“…….”

아무튼 부모님의 편지까지 내게 전달되지 않았던 것을 확인하니 가볍게 넘어가 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저택의 구성원들을 모두 1층으로 불렀다. 위에서 내려다본 그들은 하나같이 매우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나를 철저히 기만했더군. 굳이 하나하나 늘어놓지 않아도 알 거라 믿어.”

현재 녹시렐 가문은 다른 가문과 달리 가문을 함께 운영해줄 피가 통한 혈족이 없었다. 즉 과중한 업무를 나 혼자 처리하거나, 피가 섞이지 않은 타인의 손을 빌려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두 방식을 적절히 섞어서 사용했다.

즉 나의 저택에서 일하는 것은 단순 노동만을 제공하는 의미가 아니다. 나는 그들에게 나와 함께 가문을 운영할 일종의 지분을 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저희는 그저 공작님을 위한 방법이라 생각하여 그리 하였-”

“주제넘게 그런 생각을 한 이유가 뭐지? 내가 임신했다는 겨우 그 사실 하나로 이렇게나 사람을 금치산자 취급했다는 이야기는 부디 아니었으면 하군.”

조금이라도 얕보이면 이런 짓을 당한다. 그들 딴에는 호의였을지 모르지만, 그 호의의 시작점이 사람을 얕보는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게 참 웃기지 않는가.

“…….”

저택 내부가 옅은 숨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나는 이미 외우고 있지만, 이제 와 눈여겨보는 것처럼 일부러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외울 듯이 바라보는 시늉을 했다.

후환이 두려웠던 걸까. 일부는 작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긴장감이 최고로 치솟았을 즈음,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실질적으로 즈레이카 왕국을 다시 일으킨 장본인이며, 현 왕 프로셴 아이라 즈레이카를 그 위치에 오르도록 한 인물이다.”

“…….”

“나는 왕국과 함께 멸망했던 녹시렐 가문을 근 100년 만에 일으켜 세웠고, 부흥을 가져왔다. 이런 나를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대들이 걱정하고 동정하는 거지?”

쉽게 말해 주제 파악을 하라는 의미였다.

내가 그들을 가문을 함께 운영하는 자처럼 대하더라도, 그들은 결국 진짜 녹시렐의 사람이 아니며 나를 대체해 가주가 될 수 없다.

“그대들은 나를 보호할 수 없으며, 오히려 보호를 베푸는 대상은 나다. 이 저택에 있는 이상, 그대들이 충성해야 할 대상은 오로지 나 뿐이야.”

“…….”

“다른 귀족이나, 심지어 왕조차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도록.”

* * *

나는 옛 녹시렐 영지로 갈 준비를 마쳤다.

바다가 어째서 그런 요구를 했는지, 이런 거는 어차피 나 혼자서 생각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다. 결국 직접 부딪혀봐야 알 것이다.

어차피 물속도 아니고 육지지 않은가. 오히려 내게 유리한 약속 장소다.

‘혹시 멜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시시때때로 불길한 생각이 고개를 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나는 소식을 들은 프로셴이나 블미에가 나를 말리러 오기 전에 출발하기로 결심했다.

“부디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모든 사용인이 항구까지 나를 배웅하러 나왔다. 질서정연하게 선 채 가주를 떠나보내는 그 모습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 만했다.

“그래. 그동안 저택을 지키고 있도록.”

최소한의 호위들만 데리고 배에 올랐다. 순조롭게 항해가 시작되었다.

“오늘따라 바다가 잠잠하구만.”

종종 선원들이 작게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

확실히 내가 조사해온 것과 달리 해양기후가 너무 좋았다. 살면서 배를 탄 기억들을 모두 합해도 이번만큼 편안했던 적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너무 잠잠해서 불안할 정도군.’

나는 계속 난간에 서서 바다를 바라봤다. 바로 아래의 청색 수면을 바라보기도 하고, 고개를 돌려가며 다른 쪽의 바다를 보기도 했다.

혹시라도 내가 옛 녹시렐 영지에 도착하기 전에 멜이 바다에서 나타나 ‘가지마.’라고 말하거나,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다.

사실 그 가능성 탓에 더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곧장 배에 오른 점도 있었다.

“도착하였습니다, 공작님.”

……결국 전부 헛된 기대였지만.

내내 차가운 바닷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온 탓일까, 머리가 몽롱하고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감기에 걸릴 징조였다.

‘바다는 내게 옛 녹시렐 영지에 오라고 했지. 설마 발을 딛자마자 해일이 밀려오거나 그러면 어떡하지?’

터벅.

나는 내심 긴장한 채 육지에 발을 들였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자, 속으로 나와 비슷한 일들을 상상하고 있었는지 아란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공작님을 음해하기 위한 무리의 헛소문이었던 걸까요?”

“일단 며칠 더 지내보고 판단하도록 하지.”

나는 코트를 여미며 걸음을 옮겼다. 오늘 하루 묵을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아란이 나를 만류했다.

“사람을 시켜 알아보겠습니다. 금방 방을 구해올 테니 쉬고 계시지요.”

“부탁하지.”

나는 항구에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여러 사람의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몸이 불편하기도 하고, 저 의미 모를 시선을 참고 돌아다니는 게 달갑지는 않다.

‘예전에 왔을 때만 해도 외지인한테 배타적인 모습은 전혀 없었는데…… 혹시 그 소문이 영향을 미친 건가.’

또 부정한 땅으로 낙인찍힐까 봐 두려운 심정도 있을 것이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앞으로의 계획을 고민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다른 호위가 방을 구해오는 동안 나와 아란은 근처 카페에서 잠시 쉬고 있기로 했다.

가게 주인은 처음에 상당히 우리를 경계했지만, 이내 평범한 여자 둘을 굳이 쫓아낼 만큼 경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금방 그런 기색을 누그러뜨렸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 있었다.

방을 구하러 보냈던 호위가 고개를 푹 숙이며 보고했다.

“웃돈을 주고서라도 구하려 했지만 거처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게 뭐가 어려운 일이라고 불가능을 고하는 거지?”

임무에 실패한 적이 거의 0에 수렴하는 아란이 진심으로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며 싸늘하게 물었다.

이후, 그녀가 한동안 제 부하를 다시 교육시켰다. 하지만 나는 임무 실패 사실이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되는군.’

결국 아란은 자신이 거처를 구하고 돌아오겠다며 나서려 했지만, 나는 그녀를 만류했다. 어차피 불가능할 게 뻔히 보여서였다.

그러자 아란이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저희야 노숙을 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공작님께서는……. 그러고 보니 간단하게 집을 짓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당장 시행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사람 여럿이 죽어 나갔던 집이라 껄끄럽긴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굳이 간이 집을 지을 필요는 없었다. 이미 얼마든지 머무를 수 있는 빈집을 알고 있지 않은가.

집을 새로 짓는 것보다는 청소를 하는 편이 더 쉬울 것이다.

“옛 녹시렐 저택으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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