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화
멈칫.
순간 전기라도 통한 듯, 꼬리 지느러미 끝까지 바짝 서서 굳어버리는 느낌이었다.
제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소리가 너무 선명해서 인간들의 대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멜은 간신히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모를 리 있나. 덕분에 우리네들도 왕성에서 귀족 나으리들이랑 떳떳이 얼굴 맞대고 일할 수도 있게 되었는데. 게다가 살림살이도 많이 나아졌지.”
“그, 그건 그렇지…….”
“그분의 연인도 평민이라는 이야기가 있더군. 아무튼 여러모로 존경스러운 분이야.”
왜 녹시렐 공작이라는 사람이 칭찬받는데 제 어깨가 으쓱해지는 느낌일까.
멜은 눈을 빛내며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무의식적으로 꼬리 지느러미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더 듣고 싶어!’
어서 저 어부가 녹시렐 공작이란 사람의 이야기를 더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다른 어부가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긴 하지.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른 거야.”
“음? 뭔가?”
“내 친구가 말하던데 그분이 제 평민 애인을 바다 한가운데에서 밀어 살해했다는 소문이 있어.”
그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멜은 창백해진 안색으로 초조하게 그들을 바라봤다. 온 몸에 식은땀이 흐를 것만 같았다.
“! 자, 자네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게!”
“당연히 나도 아무데서나 이런 말 안 하지……. 여기는 바다 한가운데니까 하는 말이지.”
“아무튼…… 확실하지 않은 소문은 입 밖에도 내지 마!”
그 이야기를 들은 어부는 제법 녹시렐 공작을 좋아하는 편인지 그 소문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전해주었던 어부는 조금 불만이 있는 듯했지만, 입맛만 쩝쩝 다실뿐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멜은 저 녹시렐 공작이라는 사람을 모르면서도, 그냥 그 사람에 대한 나쁜 소문이 더 퍼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서 안심했다.
‘그래도……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내가 없어도.’
그 생각을 하다가 멜은 문뜩 화들짝 놀랐다. 나 방금 누구한테 하는 말이었지?
한번 이상증세를 자각하자 머리가 아파 오는 것 같았다. 멜은 끙끙거리며 제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무래도…… 너무 물 밖에 오래 나와서 머리가 아픈 모양이야.’
어서 바다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살랑살랑, 머리를 가볍게 저은 뒤 바다 깊은 곳으로 잠수하려는데 돌아갈 수 없게 저를 붙잡는 말이 있었다.
“근데 녹시렐 공작이랑 왕이 결혼한다는 말이 있던데?”
* * *
수도는 조금 소란스러웠다. 어느 날, 가테 자작과 그의 아들이 사고로 한 날 한 시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퍼졌으니 그럴 수밖에.
“가테 가문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가테 부인이 안쓰럽군요…….”
“소문을 듣자 하니, 먼 친척의 딸아이를 입양했다는 말이 들리더군요.”
“흠. 꽤 특이하네요. 남자가 아니라 여자, 그것도 성인을 입양하다니…….”
“가테 부인도 나이가 있으니 서둘러 가문을 지탱해줄 장성한 사람이 필요한 거겠죠.”
하지만 가테 가문이 백작 가문에서 자작 가문으로 좌천된 이후, 그들은 더 이상 귀족파의 중심이 되지 못했다. 그 탓에 가테 가문을 둘러싼 소란은 비교적 빠르게 가라앉았다.
즉, 내가 수도에서 긴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은 전부 끝난 것이다.
“이제…… 돌아가는 거야?”
녹시렐 저택으로 돌아가는 날, 프로셴이 나를 붙잡고 물었다. 명백히 아쉬운 기색이었다.
사실 이제 입덧도 거의 사라져 왕성에서 지내는 나날이 힘들진 않았다.
다만 배가 불러오기 시작해서 더는 머물기 힘들었다. 지금도 부러 큰 치수의 외투를 입어 체형을 감추지 않았나.
“그래.”
“나는…… 네가 혼자 지낼 수 있을지 걱정돼.”
그 말에 나는 조금 못마땅하다는 의미로 눈썹만 치켜올렸다.
듣는 귀가 많다. 아니나 다를까, 주변에서 우리를 시중드는 이들과 기사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닭살 커플을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결국 나는 일부러 말을 미묘하게 돌렸다.
“블미에가 자주 오기로 했으니 적적하지는 않겠지. 내가 아이도 아니고, 고작 혼자 있는 걸로 외롭거나 심심해서 힘들어할 것 같아?”
“……그래.”
나는 프로셴과의 인사를 끝내고 마차에 올랐다.
어차피 옛날과 달리, 지금의 녹시렐 저택은 제법 수도와 가까운 위치였다. 정 급한 일이 있으면 조금 힘들긴 하겠지만 모습을 최대한 감추고 수도로 오면 되는 일이다.
그때, 닫히는 마차의 문을 잡고 프로셴이 다급히 말했다.
“……세르베인!”
“왜 그러지?”
“내가 네게 했던 말…… 잊지 말아줘.”
“…….”
“내 마음은 언제나 그대로니까.”
곧 마차의 문이 닫혔다. 나는 경악을 숨기지 못한 채 프로셴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상태로 마차가 출발했다. 나는 가까스로 표정 관리를 하고 커튼을 쳐버렸다.
마지막으로 봤던 풍경은 왕성의 사람들이 나와 프로셴을 세기의 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보는 모습이었다.
* * *
녹시렐 저택의 내부는 마지막으로 봤던 때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고작해야 저택 내부를 장식하는 꽃들의 종류 정도만 달라졌다.
지나치게 저택의 풍경이 예전과 똑같기 때문일까. 나는 종종 허공을 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내게 웃어주는 멜의 형체가 보이는 듯했다.
“공작님, 왜 그러십니까?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세요?”
“……아니야.”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하며 지나쳤던 내 행동을 사용인들도 알아채기 시작했다. 그들은 비록 사소한 것이라도,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나를 도와주려고 노력했다.
“원래 임신 중에는 마음이 조금 불안할 수 있어요. 원하신다면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되는 향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할게.”
급한 일은 전부 처리했고, 나를 위해 대부분의 업무를 프로셴과 블미에가 나눠서 맡아주고 있다. 그 탓에 내가 저택 안에서 보내는 시간은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태교에 좋다고 해서 자수를 놓거나 뜨개질도 해보려 했지만 성미에 맞지 않았다. 결국 하루종일 잠만 자고, 잠시 깨어났다가 다시 잠드는 생활이 반복됐다.
‘이렇게 지내다가는 큰일 날 것 같은데.’
내가 생각해도 이건 너무 삶에 의욕이 없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지 않은가.
생각해 보니 외출을 안 한 지도 거의 한 달이 되어갔다.
저벅저벅.
충동적으로 오랜만에 외출할 채비를 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어떡하지?”
“일단---- 하지 마.”
“나도 그러는 편이----.”
그런데 구석에서 사용인들이 모여 숙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내 모습을 발견하고는 후다닥, 이야기를 멈추더니 내게 다가왔다.
“아, 공작님. 무슨 일이시죠? 그런데 차림이…….”
“오랜만에 외출을 하려고.”
“아, 정원에 꽃이 예쁘게 폈답니다. 제가 안내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은 온실에 가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아니. 저잣거리에 가보려고. 오랜만에 사람들 사는 모습도 보고, 기분 전환이나 할까 싶어.”
물론 조금의 변장은 필요하겠지. 제법 오랜만의 외출이라 그런지 기분이 서서히 들뜨는 게 느껴졌다.
그런 내 모습을 보던 사용인들은 묘하게 안절부절 못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이유를 미처 묻기도 전에 그들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예.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 * *
‘이 정도로 변장에 신경 쓸 줄은 몰랐는데.’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외출을 위해 가발을 쓰고, 평민들의 옷을 구해다가 입고, 이것저것 꾸며내는 것에 시간이 죄다 흘러버렸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하녀들은 변장한 기사들과 꼭 함께 다니라며 조언했다. 그러더니 외출 직전에는 이런 말까지 덧붙이는 것이다.
‘……공작님, 그냥 정원만 산책하시는 게 어떠신가요?’
물론 나중에는 이내 자신이 주제넘었다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라고 말했지만 상당히 신경 쓰이는 게 사실이다.
저벅저벅.
“흠…… 거리에 활기가 생각보다 덜하군.”
“예. 요즘 어업이 잘 안 되어 그런 모양입니다. 하지만 너무 신경 쓰실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내 옆에서 민간인으로 분장한 호위가 그리 대답해왔다.
이곳은 바다가 바로 옆에 있기에 사람들은 어업에 주로 종사했다. 그런데 요즘 그쪽 사업이 시원찮다니……. 정말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걸까?
“왜 어업이 잘 안 되는지 혹시 아나?”
“풍랑이 거센 모양입니다. 하지만 자연현상이고, 그런 현상은 늘 주기적으로 있었으니까요.”
하긴. 뱃일이라는 게 워낙 위험하고, 해양 기상은 변덕스럽기 짝이 없으니 그럴 수도 있었다.
나는 그냥 그러려니, 수긍하고는 그에게 말했다.
“다리가 조금 아프군.”
“마차를 부를까요?”
“괜찮다. 그냥 신이 조금 불편한 것 같아서 그런데 혹시 편한 신발을 구해올 수 있겠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자리를 비우는 건 위험할 수 있으니 다른 이에게 시키고 오겠습니다.”
“그리 하도록.”
나는 근처 벤치에 앉았고, 호위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는 불과 내게서 열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누군가에게 다가갔다. 그 사람 역시 마찬가지로 분장한 호위 기사였다.
끼룩, 끼룩-.
바다 주변에서 서식하는 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어부들의 배에 있는 조그마한 고기들을 뺏어 먹고 달아나겠지만, 요즘 어업이 잘 되지 않은 탓인지 그들은 맨입으로 돌아갔다.
‘사실 이 도시는 그나마 어업 외에도 종사할 일거리가 많으니 다행인데, 어업이 유일한 생계인 도시는 타격이 크겠어.’
멜도 데려간 마당에 바다는 무엇이 심통 나서 저렇게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걸까. 혹은 기사의 말대로 그저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인 건가.
그때, 갑자기 항구가 소란스러워졌다.
“어? 배가 돌아온다!”
“세상에, 너덜너덜하기 짝이 없군!”
나는 고개를 돌려 소란의 근원지를 바라봤다. 사람들의 말대로, 저 멀리 바다에서 너덜너덜하게 망가진 배 한 척이 돌아오고 있었다.
이내 배가 정박하고, 선원들이 육지로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다에서 제법 험한 꼴을 당했는지 비척비척,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육지에서 그들을 기다리던 가족들과 친우들이 서둘러 그들을 맞이했다.
“이 사람아! 살아 돌아와서 천만 다행이야……!”
“자네들이 떠난 이후 바다가 어찌나 흉흉한지,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나는 그들의 감동스러운 재회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호위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때, 내 귓가를 울리는 처절한 목소리가 있었다.
“전부 헛소문이 아니었어! 내가 직접 경험했다고!”
막 육지로 돌아온 어느 선원이 난동을 부렸다. 다른 이들이 그를 말리려 노력했지만, 분위기가 조금씩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자리를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것을 느꼈는지 호위가 서둘러 나를 부축해 일으켰다.
무슨 일이든 괜한 갈등에 휘말리는 건 좋지 않다. 나 역시 그리 판단하고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바다에 빠진 후 똑똑히 들었어! 바다를 잠잠하게 하고 싶거든, 녹시렐 공작을 부정한 땅으로 돌려보내라고! 신이 노하신 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