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화
틸리타는 내게 소문을 없애는 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작인 나와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그녀도 굉장히 바쁜 몸이었다.
하지만 사실 틸리타는 소문을 전부 없애는 것에는 반대했었다.
“그래도 국왕폐하와의 혼인은 진지하게 고려해보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이는 멜 뿐이야. 그를 배신하고 싶지 않아.”
“폐하께서도 그분이 돌아오시면 선뜻 공작님을 놓아주겠다고 약조하셨다면서요.”
틸리타의 말이 맞았다. 나도 속으로는 계속 그 제안을 떠올리고 있었다.
프로셴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를 보험 삼아 혹시라도 모를 최악의 가능성에 대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끔찍이 이기적이었다.
“공작님께서는 돈도, 권력도 충분하니 아이 한 명 숨겨서 키우는 것은 솔직히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분이 언제 돌아올지 압니까? 아이를 평생 신분도 뿌리도 없이 그림자 속에서 키우실 건 아니잖습니까.”
나는 틸리타가 떠난 후에도 그녀와의 대화를 오래도록 곱씹었다.
* * *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가 알던 그 가짜 알테슈메그의 모습을 ‘알테슈메그 가테’라는 인물에게 덧씌우고 있었던 걸까.
틸리타와의 면담 이후 나는 야외 정원에서 가테 영애를 만났다.
그녀는 내 예상과 달리 꽤 수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 남자처럼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도 아니었으며, 노을 같은 눈동자처럼 강렬한 색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왕국의 고귀하신 공작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녀는 묘하게 모든 것을 달관한 듯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주홍빛 갈색 머리칼이 몸의 움직임에 따라 가볍게 흩날렸다,
처음에는 제법 뻔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자신의 어머니를 처벌하지 않아서 감사하다, 자신을 찾아내어 즈레이카 왕국에 돌아오게 해주어서 감사하다, 등등.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 인사들을 받았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았다.
내가 힐끗 시계를 보자 눈치가 빠른 가테 영애는 차분한 목소리로 곧장 본론에 다다랐다.
“제 아비와 그 사람의 처벌에 대해 여쭈셨지요.”
“그래. 그대의 의견을 많이 반영하겠다.”
나는 그녀가 가짜 알테슈메그를 죽여달라고 요구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사실 그 남자의 신분과 행보를 봤을 때 처벌 수위는 사형밖에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가테 영애는 놀라운 말을 했다.
“두 사람 다 사망한 것으로 처리해주십시오.”
“실제로 사형을 집행하는 건 바라지 않는다는 의미인가.”
“예. 다만 제 행세를 자처했던 그 남자는 아딜리아로 추방시키시고, 제 아비는 평생 유폐시켜주십시오.”
“그걸로 만족 가능한가?”
제법 얼떨떨했다. 가테 자작이야, 그녀의 아버지니 일말의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정말로 사형을 바라지 않는 것은 이해 가능했다.
하지만 그녀의 자리를 빼앗고 그동안 가테 가문의 외동인 척 살아왔던 가짜에 대한 처벌 수위도 너무 유하지 않은가?
“오히려 그 남자는 신성 왕국에서 살아가는 게 더 행복할 텐데 말이지.”
내가 솔직하게 그건 처벌이 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자 가테 영애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럴 지도 모르죠. 하지만 괴로움도 클 것입니다. 제 아비가 얼마나 신성의 교리를 왜곡해서 즈레이카에 전파했는지 알게 된다면요.”
“…….”
“사실…….”
그녀는 잠시 말을 골랐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헤집는듯한 기색이었다.
마침내 가테 영애는 가짜에 대한 제 선처의 이유를 밝혔다.
“제 아버지는 실제로 저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 제가 아딜리아로 도망갈 수 있었던 건 그 남자의 덕이 컸죠.”
“…….”
“그래서 그 점에 대해서는 보답을 하고 싶습니다.”
* * *
고요한 바다. 푸른 물의 세상. 멜은 잔잔한 바다 속을 헤엄치고, 물고기들과 수다를 떨며 즐거운 생활을 했다.
하지만 이따금씩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곤 했다. 그건 무척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 마음이 심순샌순해.”
“심…… 뭐라고?”
“휴…… 넌 그것도 몰라?”
보통의 인어들은 말로 의사소통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멜은 자연스럽게 언어를 사용하며, 다른 인어들에게 말을 걸었다.
멜은 제 옆의 다른 인어에게 설명을 해주려다가 귀찮은지 그냥 해초들 사이로 폭, 들어갔다.
대화가 안 통하니 포기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러자 여태껏 멜을 참고 돌봐줬던 이립스는 괜히 울화가 치밀었다.
“야! 네가 발음을 이상하게 했잖아!”
“심순샌순…….”
“저게 진짜……! 지능이 퇴화됐나!”
“왜 심순샌순하지…….”
“심순샌순이 아니라 싱!숭!생!숭!”
급기야 이립스는 멜의 옆으로 헤엄쳐 와 모래 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적었다. 네가 발음을 잘못하고 있다고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싱숭생숭
멜은 눈을 깜빡이며 모래 바닥에 적힌 글씨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건 뭐야?”
“……아. 이것도 잊은 거냐.”
“으으음…… 알 법도 하고 모를 법도 해……. 뭐지……?”
이립스는 저 덜떨어진 인어가 모래 위의 글자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모습을 복잡 미묘한 얼굴로 바라봤다.
이립스는 바다의 명령대로 인어를 성공적으로 귀환시켰다. 그걸로 제 임무는 끝난 줄 알았는데, 바다는 제게 멜을 보살피라고 요구했다.
‘아무튼 자연스럽게 인간들의 언어를 사용하기에 지식은 남아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일부러 멜, 저 덜떨어진 인어가 익히 알고 있을 즈레이카 왕국의 언어로 적었는데, 알아보지를 못했다. 정작 말하는 언어는 즈레이카 왕국의 언어인 주제에.
이립스는 그 모습을 꽤 복잡 미묘한 얼굴로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꼬리 지느러미로 바닥을 슥슥 뭉개버리며 글씨를 지워버렸다.
“됐다. 심순샌순이나…… 싱숭생숭이나…… 여기서는 그게 거기서 거기지. 난 간다.”
“그러든가 맘대루 해…….”
“허……!”
기껏 여태까지 곁에 있어줬건만 날파리 내쫓는 듯한 반응이라니!
이립스는 심통이 난 채 더 대화를 이어나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저 멀리로 헤엄쳐 가버렸다.
계속 바다의 부탁으로 멜을 돌봤지만 영 저 인어는 저와 성격이 맞지 않았다.
‘기억을 잃고 나니 이제 무서운 분위기는 없어졌는데 미묘하게 무시하는 느낌은 여전하단 말이지.’
어쨌든 멜은 재탄생 이후 이상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전과 달리 인어로서 가지고 있는 능력도 완전히 제어하게 되었기에, 더는 물 가장자리에 간 아기 인어 대하듯 노심초사하며 지켜볼 필요는 없어 보였다.
……기억이 리셋된 탓일까. 정신 연령은 어린 인어나 다름이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별 문제는 없겠지.’
이립스는 저도 모르게 ‘육아 퇴직 시간이다!’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자유시간을 즐기러 떠났다.
그 모습을 흥미 없는 척, 해초에 얼굴을 부비며 구석에 처박혀 있던 멜은 사실 그가 멀어지는 것을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
“……! 드디어 갔나?”
멜은 반짝, 푸른 눈을 빛내며 기쁜 기색을 드러냈다. 그는 휙휙, 고개를 저으며 주변을 살피다가 살며시 꼬리를 흔들며 위로 헤엄쳐 올라갔다.
‘바다가 눈치채기 전에 갔다 와야 해!’
“푸핫!”
멜은 수면 위로 얼굴을 빠끔 드러냈다. 다른 인어들은 물 밖에서 호흡을 하는 게 껄끄럽다고 말하지만, 자신은 왜 이렇게나 아무렇지도 않은지 조금 의아했다.
아무튼 오늘은 바다의 만류 없이 무사히 수면으로 나오게 됐다. 멜의 뺨이 붉게 상기됐다. 그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큰 배를 찾으려고 했다.
“저기 있다……!”
멜은 바다 위를 오가는 인간들의 배에 관심이 많았다.
가끔 아주 커다란 배를 보면 크기 때문에 놀라서 그런지, 심장이 쿵쾅거리고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는 배만 보면 꿋꿋이 가까이 다가가곤 했다.
다행일까, 이번에 나타난 배는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커다란 배는 아니었다.
“…….”
멜은 배만 보면 홀린 듯이 수면 위로 촤라락, 헤엄쳐 갔지만 사실 인간이 좋은 건 아니었다……. 그래서 물 밖으로 눈만 빠끔 드러내 배의 모습을 살폈다.
멜이 원하는 건 그저 이런 식으로 배에 가까이 다가가 인간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이었다.
“오늘 물고기가 잘 안 잡히는군.”
“요즘 이 바다에서는 그렇더라고. 후…… 다른 일을 알아봐야 하는 건지.”
멜은 그 대화를 들으며 살풋 인상을 찡그렸다. 이래서 인간들은 좋아하려고 해도 좋아할 수가 없었다.
멜도 바다에 사는 이상, 먹이사슬을 목격하며 바닷속 생명체들이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자연의 일부였다.
바다속 친구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건 죄가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들인 돈이 아까워.”
“그건 그렇지. 흠…… 그물을 더 큰 걸로 바꿔볼까?”
“안 그래도 그물 바꿀 때가 되긴 했어. 뭐에 잘못 긁힌 건지 그물이 군데군데 찢겼더라고.”
하지만 바다의 생명체도 아닌 육지의 인간이 바닷속 아이들을 탐내는 걸 보면…… 굉장히 불쾌했다. 육지에는 충분히 육지의 생명체를 위한 것들이 있지 않던가.
‘들어도 기분만 나빠질 대화들뿐인데 난 왜 계속 같은 행동을 하는 건지…….’
사실 바닷속을 헤엄치다가 배 그림자를 발견하고 수면에 올라올 때면, 십에 아홉은 고기잡이 배들이었다. 그러니 들을 수 있는 대화도 이런 류일 수밖에.
멜은 스스로도 제 행동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저런 대화만 들을 걸 알면서 왜 늘 배만 보면 이렇게 저도 모르게 돌진을 하게 되는지…….
어쨌거나 저 인간들의 대화를 더 듣고 싶지는 않아서 작게 한숨을 쉬며 바다 깊은 곳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자네, 녹시렐 공작님에 관한 이야기 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