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화
세상에. 그것까지 알려졌을 줄은 몰랐다.
나는 관자놀이에 손을 짚었다. 암암리에 내가 녹시렐 공작이라고 알려졌던 때와 비교할 수도 없이 현재의 내 주변에는 눈과 귀가 너무 많았다.
‘조금 진정이 필요해.’
나는 여전히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틸리타를 잠시 기다리게 했다. 차라도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혀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잔에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하필 커피로군.’
왕성의 사용인들은 나의 생활 패턴에 대해 꽤 빠삭했다. 내가 오전 시간에는 커피를 즐기고, 오후에는 차를 즐기는 것을 알기에 커피로 준비해준 모양이다.
나는 종을 울려 하녀를 불렀다.
“차가 식었으니 새로 준비해줘. ……내 것은 페퍼민트 차로 부탁하지.”
그리 말한 후 나는 틸리타에게 눈짓했다. 그쪽은 어떻게 하겠냐는 물음이었다.
“저도 같은 것으로 부탁드립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하녀가 돌아와 새로 차를 준비해 왔다.
나는 천천히 차를 마셨다. 틸리타는 말없이 나를 따라 찻잔을 기울였지만 이내 취향이 아닌지 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그녀를 오랫동안 뻘쭘하게 앉혀놓는 건 미안했기에 다시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하지. 일단…… 그 소문은 진실이 아니다.”
“그렇습니까.”
“그래. 미처 설명할 수 없는 사정들이 있어서 자세히는 말하지 못하지만 그 소문은 정말 진실이 아니다. 나는 내 연인을 죽이지도 않았고, 왕과 결혼할 생각도 없어.”
말하면서도 스스로 느꼈지만, 정말 신빙성이 없는 말이었다. 이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연기인지, 진심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틸리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
“제가 공작님께 면담을 요청 드린 건, 공작님께서 원하신다면 그 소문을 없애는 것에 제가 적극적으로 도움을 드릴 수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와 관련된 계약이 존재하니까요.”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실 처음에는 틸리타에게 적극적으로 호의를 베풀고 싶지만 그녀에게 수상하게 여겨지지 않기 위한 명목으로 맺은 계약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내가 도움을 받게 되었군.’
달칵.
조금 방심한 탓일까. 찻잔을 내려놓는 힘이 조금 과했다. 찻물이 튀어 내 손끝을 적셨다.
이를 본 틸리타가 손수건을 꺼내더니 내게 건넸다.
“이걸 쓰시지요.”
“고맙네.”
무심코 손수건을 받아들다가 멈칫했다. 나는 틸리타와 그녀의 딸 다폴샤에게 선물을 보낸 적이 많았는데, 이 손수건 역시 내가 보낸 선물이었다.
수도의 장인이 만든 화려한 레이스로 된 손수건이었다. 사실 대귀족이 누군가에게 손수건 따위를 선물로 주는 건 너무 소소해서 우스운 일이지만, 이건 꼭 그녀에게 주고 싶었기에 덤으로 얹는 느낌으로 줬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찻물을 닦고는 그녀에게 웃었다.
“손수건은 내가 새로 선물해주도록 하지.”
“…….”
틸리타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나는 제법 세월의 흔적이 있는 얼굴을 통해서도 내게 동화책을 읽어달라, 머리칼을 잘라달라며 똘망똘망하게 시선을 맞추던 어린아이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잠시 미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다른 손수건이 아니라 이 손수건으로 돌려받고 싶어서 그러는 것인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슨 이야기라도 하려고 할 때, 틸리타가 입을 열었다.
“말씀해줄 수 없다던 사정에 혹시 임신 사실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콜록, 콜록!”
숨을 잘못 들이마셔 사레가 걸렸다. 나는 연신 기침을 하면서도 경악을 숨길 수가 없었다.
아닌 척하기에는 너무 솔직하게 반응하고 말았다. 역시나 내 반응을 통해 사실임을 짐작한 틸리타가 말했다.
“사실이시군요.”
“어……. 어떻게 알았지?”
“우연이 겹친 덕에 알았습니다. 어떤 귀족 커플이 어째서인지 수도의 유명한 어느 식당에서 음식을 모조리 남긴 채 나왔고, 그 모습을 제가 해당 식당의 이 층 테라스에서 목격했다는 것에서 시작하죠.”
“그……걸로는 근거가 부족할 텐데?”
“이 역시 우연히 알게 된 것입니다만, 한때 공작님과 왕성에서 지내는 동안 블미에 헥사바임 공작님께 상당한 의학 지식이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말은 즉, 블미에가 잠시 헥사바임 저택을 비우고 왕성에 머물렀던 이유가 나를 진찰하기 위함이 아니냐는 의미다. 사실을 똑바로 꿰뚫은 그녀의 추측에 소름이 돋았다.
“공작님께서 가테 공자를 심문하던 때에 저와 제 딸이 집무실에 방문했던 적이 있다는 걸 기억하십니까?”
“……그래. 그랬던 적이 있지. 하지만 잠깐 들어왔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가 나 대신 헥사바임 공작과 만나지 않았나?”
“맞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제가 목격한 것이 있죠.”
틸리타는 내 앞에 놓인 찻잔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혹시 내가 커피 대신 페퍼민트 차를 마신 것 때문에 임신 사실을 들킨 것인가 생각했지만 틸리타의 근거는 그보다 한 수 위였다.
“공작님께서는 식은 커피도 잘 마십니다.”
나는 틸리타의 통찰력이 조금 무서워지려고 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을 볼 때부터, 아이가 제법 영리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내 상상 이상으로 그녀는…… 너무 뛰어났다.
“그대는 정말 내 생각 이상으로 유능하군.”
“과찬이십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틸리타에게 감추었던 사정의 일부를 설명했다.
멜은…… 죽지는 않았지만 사정이 있어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그리고 임신 때문에 프로셴과 위장 결혼을 고민한 적은 있지만 아무래도 그 선택은 하지 않을 것 같다고.
그 이야기를 들은 틸리타는 냉정하게 말했다.
“국왕 폐하와의 결혼은 공작님께 이득이라 생각됩니다. 저 역시 남편 없이 아이를 키운 입장이지 않습니까.”
“!”
“모르셨습니까? 저에 대한 뒷조사를 하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놀랍군요.”
사실 홀로 다니는 틸리타를 보며, 그녀의 남편이자 다폴샤의 아버지 되는 이가 누구인지 궁금할 때가 있긴 했다.
하지만 직접 물을 용기가 없었고, 그녀를 뒷조사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그냥 이혼을 했거나, 그가 다폴샤의 출생 이후 일찍 세상을 떠났으리라 짐작하기만 했다.
“아무튼 그런 입장에서 저는 공작님께서 국왕 폐하와 혼인하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 왕국에서 홀로 아이를 키우는 것이 못할 일은 아니지만, 그편이 더 수월할 테니까요.”
“…….”
“물론 공작님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 이야기를 하던 틸리타는 일어날 준비를 했다. 면담 시간이 꽤 길었고, 틸리타도 바쁜 몸이었다.
나는 그녀를 배웅하려다가 탁자 위에 올려둔 손수건에 시선이 갔다.
그녀가 침묵하다가 갑자기 내 임신 사실을 언급해 잊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손수건을 보고 있던 탓인지 틸리타 역시 나처럼 그 손수건을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미련이 있는 모양인데 같은 디자인으로 주겠다고 미리 이야기를 해주어야 할까.’
그리 생각하며 최대한 그녀의 체면이 상하지 않도록 이야기를 꺼낼 준비를 하는데 틸리타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시 한번 호수에 돌멩이를 던졌다.
“……이건 저도 제법 확신하지 못하겠는데, 임산부를 놀라게 하는 게 좋지 않을 것 같아 고민되지만 여쭙겠습니다.”
“괜찮으니 말하게.”
“하슈 레이타.”
“!”
“하슈 언니, 맞습니까?”
* * *
말로는 확신하지 못한다고 밑밥을 깔았지만, 나는 틸리타의 눈동자를 보며 확신했다.
그녀가 말하는 ‘확신하지 못한다.’의 의미는 그 사실이 너무 비현실적이라 확신을 못한다는 것이지 근거가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다.
“…….”
나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냥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다시 차를 마실 뿐이었다.
틸리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내가 먼저 그녀에게 묻고 말았다.
“……어떻게 알았지?”
“함께 마차를 타고 왕성으로 향하던 날을 기억하십니까?”
“그래.”
“그때 헥사바임 공작님과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하십니까?”
나는 이제 틸리타의 기억력에 학을 떼고 싶어졌다. 그때 나누었던 사소한 대화따위, 기억하고 있을리 없지 않은가.
그런 내 앞에서 틸리타는 무덤덤한 얼굴로 그날의 대화를 복기해냈다. 소름이 돋았다.
“‘세르베인의 영지에서 자랐다고 했나. 혹시 영지민은 그곳의 귀족과 성격이 닮는다는 법칙이라도 있나.’ 헥사바임 공작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이 어째서 근거가 되지?”
“그러자 공작님께서는 대화에 참여하여 ‘그건 아니고 동네가 원래 그래. 부정한 땅으로 지정돼 온갖 고생을 다 했는데, 교황파라면 이가 갈리지 않겠어.’라고 말씀하셨죠.”
“지나치게 생생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어렸던 시절에 태어나지도 않으셨던, 심지어 옛녹시렐 저택의 시찰을 위해 들리기 이전에는 그 땅에 발 한번 들인 적 없으셨던 분께서 그 사정을 잘 안다는 사실이 말이죠.”
나는 그 정황은 증거로 삼기 부실하다고 생각했다.
내 가문이 얽혀있는 땅의 이야기다. 내가 자료 조사를 철저히 해서 사정을 알 수도 있지 않은가.
이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틸리타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가 공작님이 하슈 레이타라고 확신하게 된 것은, 오늘의 대화를 통해서입니다.”
그 말이 더 어처구니없었다. 오늘 그녀와 내가 나눈 대화에서 그 사실을 읽어낼 낌새가 도대체 어디에 있었다는 말인가.
하지만 이내 들려온 말에 나는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 사교 클럽에서 저를 마주한 공작님이 제 정체를 아는 기색이었던 것은 제 뒷조사를 끝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죠.”
“……아.”
“하지만 오늘, 공작님께서는 제 뒷조사를 한 적이 없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나는 멍하니 눈앞의 여자를 바라봤다.
연륜이라는 것은 무섭다. 아무리 내가 그녀보다 두 번의 생을 더 경험했다지만 미처 짧은 생, 짧은 경험만 하고 떠난 삶이었다. 그러므로 나와는 차원이 다른 통찰력이었다.
“오랜만이야, 하슈 언니.”
틸리타가 웃었다. 나는 희미하게 그녀의 눈에 어린 물기를 발견했다.
“약속대로 준 손수건, 너무 예뻐서 기뻤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