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 화 (120/132)

120 화

우두커니 서서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금발의 형체는 더 가까이 다가왔다.

다가오는 이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여태껏 그 본인에게서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본 적 없는 절박한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나와, 위험하니까 당장 나오란 말이야!”

철벅, 철벅. 

프로셴이 바닷물을 가르며 뛰어왔다. 그는 공포, 분노, 다급함, 절망이 섞인 얼굴을 하고서 외쳤다.

“가만히 있어! 더 멀리 가지 마!”

“어차피 못 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내가 생각하는 그거…… 아니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프로셴이 생각하는 게 뭔지 알 수 없어서였다.

나는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더 나아갈 수 없지만 뒤로 물러나고 싶지도 않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프로셴이 더 다급히 첨벙첨벙, 내게 걸어왔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그 손 놔.”

“안돼. 그러면 너 더 깊이 들어갈 거잖아.”

“어차피 못 간다고 했잖아.”

“……그래. 잘 생각했어. 그러면 어서 나와. 물이 차가워.”

조금 대화의 흐름이 이상한 것 같았지만 나는 잠자코 그가 당기는 대로 바다에서 나왔다. 미묘하게 물살이 나를 밀어내는 것 같아서 옮기는 걸음이 수월했다.

“…….”

해변의 모래를 밟고 섰을 때, 나는 뒤늦게 간헐적으로 떨리는 프로셴의 손을 발견했다.

‘혹시 내가 죽으려고 했다고 생각했나.’

정신을 빼놓고 있느라 그런 당연한 추측을 미처 하지 못했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사정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프로셴의 말이 더 빨랐다.

“……블미에에게 들었어. 그 인어가…… 아마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

“나도 힘들었을 때…… 그러니까, 네가 나를 발견해주기 이전에 말이야. 나도 그때 늘 현실이 고통스러웠고, 도망치고 싶었고…… 그래서 충동적이었어. 어떤 날에는 그래도 열심히 살아야지, 다짐하다가 한 시간도 지나기 전에 갑자기 죽고 싶었던 때가 있었어. 너도 지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비록 나는 죽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프로셴이 한 말이 공감된다고.

하루는 어떻게든 멜이 돌아오도록 할 방법이 있을 것이라며 희망에 차서 아등바등 열심히 살다가도,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방법 따윈 없다며 그가 없을 경우의 막막한 미래를 생각하곤 했다.

사박.

가볍게 모래가 눌리는 소리와 함께 프로셴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니, 그는 주저앉지 않았다. 단순히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을 뿐이었다.

“세르베인.”

내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은 어느새 부드럽게 내 손바닥을 잡고 있었다. 

두 손으로 나의 왼손을 천천히 어루만지는 손가락이 느껴졌다.

늘 자리 잡고 있던 약지의 반지에는 그 손길이 닿지 못했다.

의미를 알지 못해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마침내 긴장한 듯, 굳은 얼굴이 나를 올려다봤다.

달빛에 창백히 빛나는 금발은 내 기억 속 연인의 머리칼과 대조적이었다.

“나를 이용해줘.”

“……일어나.”

“나랑 결혼하면 네가 걱정하는 일의 대부분은 해결돼. 네 아이가 혹시나 받게 될 멸시는 물론이고, 너의 명예에도 조금의 흠이 생기지 않아.”

“…….”

“나를 사랑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아. 훗날 그 인어가 돌아오면 그때가 되어서 나를 떠나도 좋아.”

여러 번 생각했다는 듯, 그 말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매끄러웠다.

“나와 결혼해줘.”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사실 내게는 조금의 불리함도 없는 제안이었다. 게다가 프로셴의 말이 맞았다.

줄곧 걱정하지 않았던가. 나의 명예는 상관없지만, 나는 아이가 온갖 멸시를 받는 것은 원치 않았다.

“……못 들은 걸로 할게.”

하지만 제안을 거절했다. 위장일 뿐이더라도 멜을 두고 다른 이와 혼인을 하는 것이 싫었다. 또한 프로셴의 과한 희생 역시 원치 않는다.

“당장 답을 주라는 게 아니야. 그냥…… 네가 너무 힘들다면 이런 선택지도 있다고 말하는 거야.”

내가 걸음을 옮기자 다급히 프로셴이 나를 따라와 애원했다.

사실 그는 애원할 필요가 없었다. 그 제안은 애초에 프로셴에게 파괴적이고 내게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

다시 한번 못 박아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생 아이를 암흑 속에서 살게 할 수는 없는 거잖아.’

하지만 내 마음속 이기심과 불안함은 차마 그 말을 또 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완전한 거절 대신 보류를 선택하고 말았다.

* * *

그날 이후, 어째서인지 입덧이 확연히 사라졌다. 마치 아이가 한순간 숨어버리기라도 한 것 같은 변화였다.

당연히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 변화긴 하지만 이렇게나 갑작스러우니 또 걱정이 되었다.

“몸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러니 걱정 마라.”

하지만 다행히 블미에는 내게 이상이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

‘어쨌든 잘 됐어. 빨리 일을 처리하고 녹시렐 저택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내 몸 상태가 이전과 비슷해지자 블미에는 다시 헥사바임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나와 달리 친척들이 많았으므로, 그동안 저택을 비워두는 것 자체가 꽤 위험한 행동이었다.

나 역시 다시 업무에 제대로 복귀했다. 내가 심리적 문제로 괴로워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사용인들도 한결 편안해진 얼굴을 했다.

“공작님. 가테 가문의 여식을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드디어 아란이 돌아왔다. 예상대로 아란은 내가 그녀에게 주었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그래? 오늘 오후에 바로 왕성으로 데려와. 그녀와 할 말이 있어.”

나는 기계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며 아란에게 지시했다. 그동안 줄곧 쓸모없는 편지들은 무시한 덕인지 요즘에는 편지가 오지 않아 책상 위가 한결 청결했다.

‘진짜 알테슈메그 가테…….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가테 자작과 가짜 알테슈메그를 비밀리에 감금시킨 지 벌써 두 달 가까이 되었다. 하루라도 빨리 그 둘의 처벌을 결정 내려야 했다.

그리고 그 처벌에는 가장 큰 피해자인 진짜 알테슈메그의 의견을 전적으로 반영할 계획이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틸리타 이자스가 공작님과의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그녀와의 일정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틸리타가?”

굉장히 의외의 소식에 손이 멈췄다.

비록 틸리타와 전생에 인연이 있지만, 어차피 나만 기억하는 시절의 일이다. 따라서 나는 그녀와 업무 외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고, 그건 틸리타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 그녀도 이제 평민 대표로 왕성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지. 그와 관련된 것으로 조언을 구할 모양인가 보군.’

대충 의도가 짐작됐다. 그렇다면 빨리 도움을 주는 편이 좋을 것이다.

“틸리타와 면담은 가테 영애와의 스케줄보다 일찍 진행하도록 하지. 그녀가 왕성에 도착하는 대로 알려줘.”

“이미 지금 왕성에 도착해 있습니다.”

“……?”

나는 시계를 힐끗 살펴봤다. 고작 9시도 채 되지 않은 이른 시각이었다.

평민인 그녀가 내게 면담을 요청하려면 서면으로는 불가능하고, 직접 왕성에 도착한 뒤 이야기 해야 할 터. 이렇게나 이른 시각에 나를 만나려고 서둘러 왕궁에 온 이유가 의아했다.

“그러면…… 지금 바로 그녀와 만나도록 하지.”

어지간히도 일 처리 과정에서 귀족들이 평민 출신들에게 텃세를 부리는 게 심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현재 틸리타가 내게 면담을 요구할 이유가 없으니까.

‘분위기 정리를 해줘야겠어.’

꽤 태평한 심정이었다. 내게는 어려운 부탁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며 틸리타를 만나러 갔다.

하지만 틸리타는 내게 부탁을 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공작님.”

“왜 그러지?”

“최근 귀족들 사이에 도는 소문을 알고 계신지 여쭙기 위해 왔습니다.”

아직 활발히 사교 클럽을 운영하는 탓에 그녀는 여전히 온갖 소식을 접하는 것에 빠른 듯했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이야기기에 이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기색이자 틸리타가 이내 말을 꺼냈다.

“공작님께서 옛 연인이었던 평민 남성을 바다에 수장시킨 뒤, 국왕 폐하와의 혼인을 진행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

사실과 몹시 다르긴 한데 꽤 유사한 소문이지 않나. 나는 황당함과 당혹스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틸리타가 내 반응을 살피더니 부가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돌았던 소문은 공작님의 연인분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부 뱃사람들이 공작님께서 그분을 바다 위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버렸다는 이야기를 흘렸던 모양입니다.”

“…….”

수도와 옛 녹시렐 영지를 가르는 바다 한복판에서 배를 돌리라 했을 때 뱃사람들의 표정이 기억났다. 일부러 시선을 피하던 불안해하는 얼굴.

그 당시에 어떻게든 입막음을 했어야 했다. 이건…… 나의 실책이었다.

“그 후 공작님께서 왕성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때부터 이미 국왕 폐하와의 스캔들이 있긴 했지만, 헥사바임 공작께서도 왕성에 들어간 이후 그 이야기는 잠잠해졌죠. 하지만 그분이 떠나시자-.”

내게 끊임없이 보내지던 귀족들의 편지를 기억한다. 무도회, 다과회 등 온갖 이유를 대 결혼 적령기의 귀족 여성을 꼬아내려는 내용이었다.

‘아. 요즘 유독 그렇더라고. 네가 왕성에 온 이후부터 그랬을걸?’

나 대신 편지를 살피던 블미에에게 무심코 던졌던 그 말이 핵심이었을 줄이야.

블미에 역시 왕성에 머물자 나와 프로셴이 연인이라는 소문이 헛소리라는 것으로 퍼졌을 테고, 귀족들은 적극적으로 내게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블미에가 왕성을 떠나자 편지는 뚝 끊겼다. 그게 시사하는 바는 너무나 뻔했다.

내가 헛웃음만 지으며 적극적으로 반박하지 못하자 틸리타의 표정이 묘해졌다.평민들에게 우호적인 것으로 유명했던 내가 정작 평민 신분의 연인이 왕과 결혼하는 것에 걸림돌이 되자 처리했다는 일은 그녀가 내게 혐오감을 느끼게 하기 충분하리라.

하지만 틸리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처신에 능한 모양이다. 그녀가 운영하던 사업체 덕분에 터득한 능력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제 개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매끄럽게 말했다.

“공작님. 사실 이 소문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공작님께 큰 피해를 미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대도 그 소문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나?”

“저는 공작님께서 그 연인분을 얼마나 아끼셨는지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소문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진실이라는 증거가 너무 많긴 하더군요. 국왕 폐하께서 밤중에 바닷가에서 공작님께 청혼하는 걸 목격했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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