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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화 (119/132)

119 화

다행히 그들은 의아해하는 기색 없이 집무실에서 나갔다. 

내가 차를 마시려다가 일부러 마시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나는 그들의 기척이 충분히 멀어졌다고 느낀 순간, 창문으로 달려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하……!”

해산물만 피해야 하는 건 아무래도 나의 착각인 것 같다.

차향이 코끝에 닿은 순간, 아주 미약한 물비린내를 느꼈다. 속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살면서 물비린내를 감지해본 적이 거의 없는데 모든 것이 고급제품인 왕성에서도 이 상태라면 아무래도 상황이 심각하다.

‘조금…… 망한 것 같은데?’

나는 창백해진 채 헛웃음을 지으며 창틀을 꽉 쥐었다.

초기라고 만만하게 봤는데 아무래도 상상 이상의 고난이 펼쳐질 것 같았다.

* * *

앞으로 고난 길이 훤하리라는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일을 빨리 처리하고 녹시렐 저택으로 간다는 계획이 틀어졌다. 

일을 처리하기는커녕, 갈수록 심해지는 입덧 탓에 과일 주스로 끼니를 때우며, 힘이 없어 침대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거부하는 생활을 하게 됐다.

결국 프로셴에게서 내 소식을 들은 블미에는 얼마 전부터 나의 주치의 역할을 자처하며 왕성에서 지내게 됐다.

왕국의 유일한 두 공작이 왕성에서 지내는 기묘한 상황이 되고야 말았다.

“그러게 내가 뭐라고 말했지? 왕성은 네가 지내기 부적합하다고 하지 않았나.”

블미에가 말을 지긋지긋하게 안 듣는 자식을 보듯 나를 바라봤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근데 나 계속 이런 상태인 건 아니지? 꽤 힘든데…….”

“일단은 한 달만 더 참아봐라.”

“한 달이면 끝나는 증상이야?”

“……혹은 세 달이다.”

“뭐?”

그 끔찍한 소식에 내가 절망하자 블미에는 시선을 돌려버렸다. 이내 내 방에 들여놓은 업무 책상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온갖 종이 뭉치들을 집어 들었다.

어설프게도 화제를 돌리기 위한 수작이었다. 하지만 나는 마침 그 일들을 처리하기 매우 피곤했으므로 블미에에게 말했다.

“마침 잘됐네. 할 일 없으면 나 대신 업무 처리 좀 해줄래?”

“오…… 내가 할 일이 없을 것 같나?”

블미에가 황당하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나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내가 은근슬쩍 시선을 돌려버렸다.

결국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서류를 뒤적였다. 농담 삼아 빈말을 한 건데 정말로 일을 도와줄 생각인 것 같았다.

“일단 별로 안 중요한 일은 프로셴에게 맡겨라. 참, 평민 등용 건은 너도 알겠지만 틸리타, 다폴샤 그 모녀들에게도 자리를 권유해봤다.”

“좋은 생각이야. 그들이라면 분명 수락할걸.”

“그래. 종종 왕성에 오면 만날 수 있을 거다.”

다행히 왕성에 머무는 동안 해결된 일이 있기는 했다.

왕성에서 처리되는 안건들에 평민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 

그 첫 번째로 관련 안건에 특화된 이들로 대책 본부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그곳에 평민 전문 인력들을 포함시켰다.

“다만 너도 예상했다시피 귀족들의 반발이 크다.”

“평민으로 지위 하락한 귀족들 한두 명 정도를 포함 시켜. 그러면 안면이 있어서라도 대놓고 평민들을 신분으로 찍어누르지는 못할 거다.”

블미에의 도움으로 나는 침대에 누운 상태지만 조금씩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략 중요한 일을 처리한 후에도 내 책상 위는 온갖 서신들로 지저분했다.

“그런데 웬 편지들이 이렇게 많지?”

블미에가 의아한 기색으로 수많은, 미처 뜯지도 않은 편지들을 살폈다. 나는 건성으로 답했다.

“아. 요즘 유독 그렇더라고. 네가 왕성에 온 이후부터 그랬을걸?”

부욱!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블미에가 차례차례 편지들을 뜯어 내용을 살폈다.

비록 내가 직접 뜯어보지는 않았지만 척 봐도 겉표지가 일반적인 편지는 아니었다. 대부분이 연애 편지나 초대장처럼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블미에가 무표정으로 질색하며 말했다.

“뻔한 목적들의 서신이로군. 결혼이란 제도로 너의 가문과 얽히고 싶어 하는 이들의 발악이다.”

“그럴 줄 알았지.”

“나도 이런 것들을 많이 받았다. 다만 네게는 연인이 있다는 걸 알 텐데 이들이 전부 미치기라도 한 건가?”

블미에가 진심으로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을 하고서 차례차례 편지들을 분리해갔다. 

쓸모없는 편지들은 단숨에 바닥으로 버려졌다.

“……그러게?”

작위 수여식 날 열린 연회에서 보란 듯이 멜을 내 연인이라 못 박아두고 나온 이후, 그런 편지들은 내게 한 통도 오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그런 편지들이 줄지어 올 줄이야.’

무언가 석연치 않았지만, 어지간히 본인들의 입지가 걱정되어 그냥 던져본 제안이겠거니 생각하고 넘기기로 했다.

“…….”

하지만 어째서인지 블미에의 기색이 심상치 않았다.

나는 그녀가 혹시 편지를 보낸 저 가문들을 혹시라도 갈굴까 봐 어색하게 웃으면서 만류했다.

“어떻게든 나와 연을 만들어보려고 무리수를 뒀나 봐. 그냥 무시해.”

“세르베인.”

“왜?”

“그 인어는 언제 돌아오지?”

“…….”

여태껏 묻지 않았던 일을 마침내 블미에가 언급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멜과 떨어진 지 거의 한 달이 흘렀다. 그동안 블미에는 나를 배려하느라 이에 대해 묻지 않았다.

하지만 꽤 시간이 흐르지 않았던가. 이왕 이야기의 흐름이 그쪽으로 튀자, 블미에는 더는 참지 않았다.

“네 행보가 석연치 않다. 그래서 묻는 거야.”

“…….”

“처음에는…… 그래. 아직 신성 왕국 시절의 사고가 바탕에 깔려있으니 임신 소식을 숨긴다는 게 이해가 됐다. 하지만 곧 생각했다. 어차피 그 남자가 나타날 거라면 네가 이렇게나 아이를 감추려고 노력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고.”

블미에의 생각대로다. 

만약 멜이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오리라는 확신만 있다면 내가 이렇게 몸을 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작 그 인어가 몇 년, 혹은 몇십 년 후에 돌아오는 정도라면 네가 말하지 않았을 리 없다.”

“…….”

“그 인어, 혹시 못 돌아올 수도 있는 건가?”

한숨을 쉬었다. 사실 제대로 된 계획도 없는 주제에 무작정 ‘블미에와 프로셴을 가능할 때까지 속여보자.’라는 건 무모하기 짝이 없는 목표였던 것이다.

“너는 속일 수가 없네. 조금은 더 늦게 알아채길 원했는데.”

“!”

“맞아. 멜은 안 돌아올 거야. 나를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너……!”

“하지만 내가 만나러 가면 돼. 그러면 어떻게든 될 거야.”

무모하고 희망적이기만 한 내 계획을 들으며 블미에가 말을 잇지 못했다.

* * *

본의 아니게 블미에와 조금 싸한 분위기를 형성한 채 헤어졌다.

그녀는 내 말에 반박할 점이 너무 많다는 걸 알았지만, 내게 스트레스를 줄까 봐 염려한 탓인지 속으로 삭이고 발길을 돌렸다. 나는 그 뒷모습을 쓸쓸하게 바라봤다.

“…….”

그날 저녁, 나는 충동적으로 방 밖으로 나섰다. 

나를 발견한 하녀들이 약간의 놀람과 안심을 담아 인사를 해왔다.

“아, 공작님. 기분이 나아지셨습니까?”

며칠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사용인들에게서 어디가 아프냐고 걱정 어린 질문을 많이 받았었다. 다만 왕실 의사도 만나지 않던 내가 몸이 아프다고 변명할 수는 없었기에 그저 기분이 안 좋아서 그런다고 둘러댔었다.

“……그래. 덕분에.”

“다행입니다.”

그들은 매끄럽게 내게 인사를 하고 저들의 일을 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나는 충동적으로 그들 중 한 명을 붙잡았다.

“잠시.”

“예?”

나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그 말을 하고 말았다.

“바다로 가는 마차를 준비해줘. 잠시 산책을 하고 싶어.”

내가 예상한 반응은 그들이 곧바로 ‘예, 알겠습니다.’ 답하며 나를 위해 분주히 마차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찰나의 미묘한 침묵을 알아챘다.

“……예, 공작님.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그들은 웃는 얼굴을 하며 일단 내게 방으로 돌아가 쉬고 있기를 권유했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 웃음이 나왔다.

‘드디어 프로셴이 왕성 안을 휘어잡긴 한 모양이군.’

이전이라면 내 명령에 곧바로 응했을 이들이 이제는 프로셴의 의견을 먼저 묻기 위해 시간을 끌고 있다. 긍정적 변화였다.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다. 평소라면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 주며 ‘그러지.’라고 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프로셴이 나를 바다로 보내는 걸 원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내가 시도해보려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그럴 것이라 확신했다.

“아니. 당장 마차를 준비해. 지금 바로 나가겠다.”

“하, 하지만……!”

“혹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내 이름을 대라. 문제가 없을 것이라 보장하지.”

* * *

단순히 산책만 할 것이면 굳이 장소를 바다로 고르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프로셴에게 이 소식이 닿기 전에 도착하려 애를 쓰지도 않았을 테다.

쏴아아-.

밤바다는 새까맸다. 

그믐달이 뜬 탓에 달빛조차 어두워 바다의 풍경은 스산하기만 했다.

찰박, 찰박.

사용인들을 먼 곳에 대기시켜둔 뒤, 나는 바다로 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물이 내 발을 적셔왔다.

‘고작 한 달 정도 지난 걸로 이리 안달을 낸다고 내 인내심을 탓하지는 마.’

멜이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내가 그를 만나서, 어떻게든 기억을 되찾게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홑몸이 아닌데 그게 그리 쉬울 리 없다. 벌써부터 이렇게 신체적으로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던가.

‘시간이 흐를수록 더 불가능해질 거다. 하루라도 빨리 시도하는 게 나아.’

물이 허벅지 중간까지 차오른 시점이었다. 갑자기 잔잔하던 파도가 나를 밀어내는 것을 느꼈다.

“읏.”

그때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휘청이면서도 계속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나는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으니, 머리끝까지 물에 잠기는 것쯤은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물이 허벅지 중간부터 차오르지를 않았다. 아무리 걸음을 걸어도 제자리였다.

“……아.”

나는 이게 우연이 아님을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그렇다. 바다가 순순히 나를 멜에게 데려다줄 리 없었다.

내가 세웠던 계획이, 내가 속으로 품었던 희망이 모조리 무너졌다.

다리에 힘이 풀리려 했다. 그렇게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주저앉으려고 하던 참이었다.

“……세르베인!!!”

순간, 등 뒤에서 절박한 부름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뒤돌아 상대를 바라봤다.

희미한 달빛에서도 누군가의 금발은 그렇게나 반짝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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