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화
내가 직접 그 말을 하자 프로셴은 굳어버렸다.
그는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애써 하하, 하고 웃었다. 축하를 먼저 해야 하는지, 걱정을 먼저 해야 하는지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었다.
이해했다. 나 역시 친구가 제 파트너를 떠난 후,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상당히 경악했을 것이다.
“일단 확실하지는 않으니 긴장 풀어. 네 말대로 왕성으로 가야겠어.”
내가 오히려 그를 안심시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거나 아무 의사에게 내 몸 상태를 밝힐 수는 없었다. 정말 임신이라면……. 여러모로 밝혀졌을 때 논란이 커질 것이다.
아무리 지금 ‘신성 왕국’이란 타이틀에서 벗어났다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사상은 신성 왕국 시절의 것에 머물러있었다.
혼외자를 갖는 것에 대해 엄격했던 교리는 여인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선을 야기했다.
그런데 혼전 임신에 남편이 없다라…… 사교계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큰 화제가 될 것이다.
“혹시 음식이 입에 안 맞으셨습니까?”
음식이 나오자마자 곧장 자리를 비우니 종업원들이 어쩔 줄 몰라 했다. 프로셴이 거듭 아니라며, 바쁜 일이 있어 그렇다고 안심을 시켜주고 나서야 그들은 진정했다.
그동안 나는 마차를 불렀다. 마부는 목적지가 왕성이라고 하니 눈에 띄게 긴장한 태도로 최대한 부드럽게 마차를 운전했다.
나는 마차 안에서 프로셴에게 블미에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지금 왕성에 블미에가 있을까?”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왕성 의사도 완전히 믿을 수 없다.
다행히 프로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내가 널 항구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 하니 블미에는 왕성에 있겠다고 했어.”
“그렇다면 다행이네.”
“……저, 세르베인. 너무 걱정하지는 마. 사실 사람이 구역질을 하는 건 아주 흔한 일이잖아. 내가 그걸 언급한 건 그냥 나도 모르게…….”
“그래. 아닐 수도 있지.”
프로셴이 너무 어쩔 줄 몰라 하기에 대충 수긍하는 척했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아마 그의 첫 번째 짐작이 맞을 것이라 생각했다.
프로셴이 가장 먼저 임신 가능성을 떠올린 건 나와 멜이 한 방을 사용했기 때문일 거다. 그리고 나 역시 짚이는 바가 있었다.
‘피임을 하긴 했지만 몇 번은 못 했어.’
하지만 그 당시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어차피 멜은 내 배필이 될 것이고,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면 축복일 테니.
물론 지금도 멜을 향한 내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상황이 조금 곤란해졌을 뿐이다.
그리고 역시나 내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왕성에 도착한 후, 급히 자초지종을 들은 블미에는 무표정하지만 명백히 패닉에 빠진 상태로 나를 진찰했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 블미에는 아주 미묘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결과를 말했다.
“……임신 초기로군.”
* * *
원체 간헐적 스트레스와 체질적 요소로 인해 생리 주기가 일정하지 않았다.
저번 달, 생리를 하지 않았지만 종종 있던 일이라고 생각해 무심코 넘겼는데 그게 임신 때문이었을 줄이야.
내가 복잡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자 블미에가 물었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나?”
“그러기에는 내가 방금 막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고 생각하는데.”
“헥사바임 저택에서 지내는 게 어떤가.”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오는 말에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나는 얼떨떨함을 드러냈다.
“내 집을 두고 왜……?”
그 순간 프로셴이 끼어들었다. 숨을 쉬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빠른 어조였다.
“나, 나도 세르베인이 혼자 지내는 것에는 반대야. 인어가 돌아오긴 하겠지만, 일단 그전까지는 혼자 지내는 건 위험해. 그런데 왜 헥사바임 저택이야? 왕성에서 지내!”
저 말에는 약간의 오류가 있었지만 굳이 정정해주지 않았다. 아무튼 마지막 말이 프로셴의 속내였던 모양이다.
그때 블미에가 논리적으로 그 제안에 반박했다.
“왕성은 눈이 많고, 소문이 많다. 세르베인의 임신 소식이 흘러나가면 어쩔 거지? 게다가 작위 수여식까지 치른 뒤의 공작이 왕성에 오래도록 지내는 모습은 좋지 않아. 자칫하면 네 아이라고 헛소문이라도 나기 딱 좋은 환경이군.”
“그……러면……! 녹시렐 공작이 헥사바임 저택에서 지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
프로셴이 간신히 쥐어 짜낸 반박에 블미에가 피식 웃었다.
그 비웃음에 프로셴도 제 주장이 매우 허술하고 우습다는 걸 아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일단 나는 여자고…… 뭐, 생물학적 설명은 더 덧붙이지 않겠다.”
“…….”
“게다가 내 저택에서 감히 누가 말을 흘리고 다닐 수 있지?”
귀족들 사이에는 나의 소행으로 소문났지만, 사실 즈레이카 왕국에서 있었던 모든 피의 숙청은 블미에의 소행이었다.
헥사바임 가문의 가신들은 진실을 알 테니 함부로 혀를 놀리지 못할 것이다.
“…….”
프로셴이 박탈감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블미에는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나는 헥사바임 저택에서 머물겠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나의 거처가 결정이 난 듯한 모양새였다.
나는 그 모습을 황당한 심정으로 바라보다가 조금의 타협도 없이 내 결정을 통보했다.
“아니. 나는 당분간 왕성에서 지낼 계획이야. 그렇지 않아도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 자주 와야 할 것 같았거든.”
“! 좋은 생각이야!”
“…….”
프로셴이 무작정 환호했고, 블미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프로셴의 환호성 역시 오래 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일이 끝난 뒤에는 내 집에서 지낼 거야. 그리 알아.”
* * *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나는 다시 묵게 된 왕성 안의 익숙한 방에서 휴식을 취했다. 조용한 방에 있으니 생각이 깊어졌다.
‘그러고 보니 정작 멜에 관한 이야기는 잘 묻지 않았었지.’
그 둘은 내가 혹시 스트레스를 받을까 염려한 것인지 멜에 관한 질문은 거의 하지 않았다. 내가 은근슬쩍 그 주제를 회피하는 것을 눈치챈 것일지도 몰랐다.
“만약 멜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
뒷말을 흐리며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혹여나 아이가 들을까 봐 걱정되어서였다.
내 안에 멜의 아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런 변화가 조금 낯설었다.
‘겉으로는 물렁한 척해도 프로셴 역시 뼛속까지 이성적이야. 블미에는 말할 것도 없고.’
내가 멜을 사랑하는 것을 아니, 멜이 내 곁에 있을 것을 가정한 상황에서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멜이 내 곁에 없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 둘이라면 아이를 지우라고 권유할 거다. 아직 형체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일 테니 더욱 거리낄 것도 없겠지.’
여전히 신성 왕국의 교리가 무의식적으로 사고의 기저에 깔린 시대다.
아이의 아버지, 멜이 평민이라는 점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미 많은 귀족들이 평민으로 몰락한 탓에, 귀족파들은 평민이 천하다며 쉽게 욕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혼도 하지 않고 낳은 아이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아무리 멜의 아이라고 알려도 결혼식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멜이 아이와 함께 얼굴 한번 비추지 않으면 귀족들은 믿지도 않겠지.’
분명히 노골적이고 원초적인 가십을 이어갈 거다. 나를 향한 것이면 참을 수 있지만 멜의 아이가 그런 취급을 받는 건 견딜 수 없다.
……물론 이 문제는 멜이 돌아온다면 해결된다. 그러니 프로셴과 블미에도 지금은 침착하게 기다리는 것이다.
‘고작 10개월…… 아니지. 약 9개월인가.’
하지만 그 짧은 시간 안에 멜이 회복할 수 있을까? 사실 그보다 늦다고 해도, 애초에 네가 돌아오기만 해도 다행이었다.
‘……너는 나를 잊었을 테니까.’
* * *
어젯밤 내내 고민했지만, 어느 선택이 옳은 것인지 스스로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더 생각하지 말자. 그때 되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며 충동적인 결론을 내린 채 잠들었다. 확실히 사고의 흐름이 조금 충동적이고 불완전해진 느낌이 들었다.
“세르베인, 집무실은 저번처럼 여기를 사용하면 돼. 그런데 괜찮겠어?”
프로셴이 나를 안내해주다가 머뭇거렸다.
내가 일을 하지 않으면 왕성에서 머물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니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못하지만 내가 일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기색이었다.
나는 무심한 얼굴로 집무실 내부를 둘러봤다. 그 후, 혹시라도 듣는 귀가 있을까 봐 두루뭉술한 표현을 사용해 답했다.
“어차피 초기니까 일하는 데에 문제없어. 티도 나지 않고. 해산물만 피하면 돼.”
블미에가 말한 대로 왕성은 귀가 많은 곳이다. 즉, 나 역시 내가 임신했다는 징조가 신체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면 아무리 편리성을 위함이라 해도 왕성에서 머무는 것을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 아무튼 제발 쉬엄쉬엄해…….”
내가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프로셴은 울상인 얼굴에 억지로 웃는 얼굴을 만들고는 물러났다. 하지만 나는 그 말 역시 귓등으로 듣고 말았다.
‘처리할 일이 많아. 평민 인재 등용건도 신경 써야 하고, 진짜 알테슈메그가 돌아오면 가테 가문의 처벌도 생각해야 돼.’
나는 자리에 앉아 곧장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
심리적 이유 탓일까.
임신 사실을 몰랐을 때만 해도 괜찮았던 것 같은데 알고 나니 급격히 집중력이 떨어지는 느낌과 미약한 두통이 느껴졌다.
‘블미에가 이런 증상이 있을 수 있다고 언급했었던 것 같기도…….’
어제 블미에가 임산부가 혼자 제 몸을 돌보는 것은 힘들 것이라며 충고하던 것을 잔소리로 듣고 넘겼는데, 이렇게 바로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결국 나는 흩어지는 집중력을 견디지 못하고 이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간단한 다과를 하녀에게 부탁했다.
“가벼운 다과를 준비해줘. 차는 카페인이 없는 걸로.”
“알겠습니다, 공작님.”
얼마 후, 사용인들이 다과를 준비해 가져왔다. 한입 크기로 조각된 과일들과 오색찬란한 예쁜 디저트들이 보였다.
가볍게 준비하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왕성이다 보니 간소하다는 기준이 조금 달랐다.
멈칫.
나는 찻잔을 입가에 가져가다가 멈칫 굳고 말았다. 하지만 아주 찰나에 부드럽게 방향을 바꿔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웃었다.
“고마워. 이만 나가봐.”
“네, 공작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