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 화 (117/132)

117 화

똑똑히 기억한다. 앞으로 눈을 감는 순간마다 그 얼굴이 떠오르겠지.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고, 그 이후에는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바다에 빠지기 직전까지 나를 올려다보던 시선을 잊을 수가 없다.

“……하지만 후회는 안 해.”

끝내 주저했지만, 나는 애 욕심을 이겨내고 그를 살리는 길을 택했다. 다시 그 순간이 와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나는 내가 멜을 바다로 돌려보내는 것에 대해 가장 주저했던 이유를 떠올렸다.

‘바다로 돌아갔다가 다시 나올 수는 없는 건가?’

멜이 납치당했던 날, 나는 해변에서 만났던 인어에게 물었다. 그가 거짓을 말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긴 했지만 그에게 묻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은 없었으니까.

이런 내 의심까지 눈치챘는지 인어는 한순간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하등 없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답했다.

‘그 인어는 바다로 돌아가면 다시 재구성될 거다. 제 삶을 망쳤던 생의 기억을 잃고, 흠 없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거지.’

‘…….’

‘즉, 육지로 나올 이유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지. 인간들과의 인연 따위 잊을 테니.’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 멜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리라 확신했다.

저 인어는 가장 먼저 소멸을 들먹이며 멜을 회유했을 테고, 멜 역시 내 곁에 오래 있고 싶을 테니 처음에는 바다에 갔다가 내 곁에 오는 방법을 생각했을 것이니.

“하지만 너는 그 말들을 들은 후, 차라리 내 곁에서 소멸하는 것을 택한 거겠지.”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미처 울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내가 경험했던 바다는 늘 거칠고 위험했다. 아무리 장시간 마차를 타도 멀미 한번 하지 않았던 내가 배 위에서는 멀미를 겪지 않은 적이 없었다.

“…….”

하지만 지금의 바다는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한 적 없을 정도로 평화로웠다.

바로 몇 분 전, 배의 난간을 뜯어갈 정도로 포악한 파도가 일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시 배를 돌려라. 수도로 돌아간다.”

배는 옛 녹시렐 영지와 수도를 가르는 바다의 정중앙에서 다시 방향을 돌렸다. 

선원들은 파도가 덮친 직후 갑자기 사라진 멜의 존재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미처 숨기지 못한 창백한 안색과 불안과 공포에 흔들리는 시선 처리는 그들이 어떤 오해를 했는지 대충 보여줬다. 하지만 그 오해를 풀어줄 생각은 없었다.

“도착했습니다.”

다시 수도로 도착했을 때는 노을이 지는 시점이었다. 배에서 내린 후, 나는 뜻밖에도 항구에서 프로셴을 발견했다.

그는 벤치에 앉은 채, 천진난만한 아이들이나 할법한 짓을 하고 있었다. 다리를 까딱까딱 그네처럼 흔들거리며 노을이 지는 바다를 감상하고 있었다.

뒤늦게 나의 시선을 눈치챈 그는 움직임을 멈추고 멋쩍게 웃으며 인사했다.

“아…… 왔어?”

“그래.”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프로셴이 이유 없이 항구에서 바다를 보며 시간을 보낼 타입이 아님을 알았다. 그는 즉흥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안 하던 짓은 절대 하지 않는 부류였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프로셴은 힐끗, 내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블미에에게 들었어. 인어의 치료를 위해 그를 바다로 보냈다고.”

“…….”

“네가 그 인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잘 아는데 너무 상심하진 마. 어차피 언젠가는 다시 볼 수 있으니까…….”

블미에에게 대충 상황을 전해 들은 뒤 나를 위로해주기 위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서툰 위로를 들으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웃겨서가 아니라, 씁쓸해서.

나는 멜이 다시는 내가 사는 세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니 블미에도 대충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는 멜이 돌아오리라 짐작했던 모양이다.

‘내가 얼마나 긴 시간 동안 멜에게 집착했는지를 아니 도저히 멜을 영영 바다로 보내버리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겠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글쎄.”

“세르베인,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마. 정신 건강에 안 좋아. 비록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비관적인 게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을 말하는 거야.”

태양을 꾸물꾸물 삼키고 있는 수평선을 바라봤다. 태양을 삼키고 있는 바다는 기어코 나의 인어까지 삼키고야 말았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프로셴이 벌떡 일어섰다.

“?”

영문을 몰라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는 결의에 굳은 얼굴로 내 두 손을 잡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뭐 하자는 거야?”

그의 엉뚱한 행동에 장단을 맞춰줄 만큼 심리적으로 여유가 있지 않다.

언짢음과 불편함을 드러냈지만 프로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를 올곧게 바라보는 보랏빛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뭐?”

“그러면 우울함이 조금 가실 거야.”

“…….”

“세르베인. 너는 누가 봐도 불가능한 일을 전부 현실로 만들어낸 사람이야. 인어의 일은…… 비록 초자연적 일이긴 하지만 나는 그것 역시도 너라면 네가 바라는 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

“내 행동이 웃기지? 그 남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네게 수작을 하려는 것으로 보일지도 몰라. 하지만…….”

“…….”

“나는 네가 행복하길 바라. 작위 수여식 때 말했잖아. 나는 그 맹세에 진심이야.”

이젠 그가 내게 보답하겠다고, 그런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말없이 그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결국 그가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끊임없이 시선이 뒤에 붙어 나를 붙잡는 착각이 들었다. 노을 지는 바닷가의 풍경이 서글펐다. 나는 그 슬픈 풍경에서 도망쳤다.

* * *

프로셴은 자신이 남몰래 수도를 쏘다니며 찾은 맛집이라며, 나를 어느 레스토랑으로 이끌었다.

3층의 테라스에 위치한 야외 테이블에서는 수도의 밤 풍경이 한눈에 보였다. 귀족과 돈 많은 평민들이 주 고객층일 것으로 보였다.

“뭐라도 먹으면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을 거야!”

“……그런가.”

프로셴은 냅다 나를 어떻게든 위로하기 위해 꺼낸 말이겠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긴 했다. 지금 뇌로 갈 에너지가 부족해서 이렇게 부정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 나는 물속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 여차하면 멜을 보러 바다에 갈 수도 있어.’

그 생각까지 하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비록 바다가 나를 순순히 멜 앞으로 보내줄지가 의문이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프로셴은 그동안 멜을 생각해 해산물 요리를 입에도 대지 않았던 나를 위해 온갖 해산물 요리를 주문했다. 멜이 없는 동안 소소한 일탈을 즐기라고 말했다.

나는 딱히 그 주문을 만류하지 않았다. 확실히 멜의 알기 전의 나는 해산물 요리를 즐겨 먹었다. 고기 특유의 향보다는 잘 조리되어 비린내가 나지 않는 해산물의 깔끔한 맛이 더 취향이었다.

“흰 살 생선으로 만든 스테이크와 관자 요리. 그리고 이 집의 특제 랍스터 요리를 주문할게.”

“그래. 고마워.”

예상했지만 프로셴은 내 취향에 빠삭했다. 그는 웨이터를 불러 주문을 하려다가 불쑥 물었다.

“우울할 텐데 술이라도 마실래?”

“됐어. 나만 취할 텐데 뭐.”

“나는 늘 말했듯이 취한 척을 잘해.”

“보고 싶지 않단다.”

하지만 요리에 어울리는 음료도 필요했기에 나는 프로셴과 무알코올 샴페인을 즐겼다.

그런데 요리가 나오자 이 식당을 소개해준 프로셴에게 미안하게도 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우욱……!”

“세, 세르베인..!”

“아, 미안. 잠깐…….”

나는 애써 고개를 돌려 신선한 공기를 마시려 노력했다. 갑자기 음식 냄새가 역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프로셴이 입맛만큼은 고급이라는 걸 알았기에 이 상황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가 형편없는 곳을 내게 소개해줬을 리는 없고…… 아무래도 조리 과정에 실수가 있었던 것 같았다.

“냄새가 역한데. 요리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내가 구역질을 하자 상황은 모르겠지만 곧장 주방으로 달려갈 기색이었던 프로셴이 멈칫 굳었다. 마치 내 말에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처럼.

그의 표정이 묘해졌다. 프로셴은 여전히 해산물 요리 냄새에 헛구역질하는 나와 요리를 번갈아 봤다.

이내 그가 주저하다가 나를 불렀다.

“그…… 세르베인?”

“왜.”

“일단 왕성으로 가자.”

……요리에 문제가 있다면 새로 달라고 하면 되는 일이다. 그도 이전에 이곳의 요리가 마음에 들어서 나를 데리고 오지 않았는가,

‘귀족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요리에 문제가 있다며 그냥 나갔을 때 이들이 얼마나 혼비백산하겠나.’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그냥 실수가 있었던 것 같다고, 다시 조리해달라고 말하면 되는 일이야.”

나는 프로셴이 ‘그냥 왕성에 가서 식사를 하자.’라는 의미로 말한 것이라 이해했다.

하지만 상당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침묵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니 내 생각이 틀렸음을 짐작했다.

“……그런 이유가 아니야.”

“그러면?”

“일단 나한테는 이 음식 냄새가 전혀 역하지 않아.”

“…….”

“그리고…… 방금 전까지 멀쩡했던 네가 멀미라던가 다른 이유로 속이 안 좋은 것 같지도 않아.”

그 말을 듣는 순간, 프로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챘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미혼의 이성 친구에게 쉽게 묻지는 못할 사안이었다.

하지만 이미 프로셴의 비언어적, 반언어적 요소를 통해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눈치챘다. 나는 도리어 그에게 직접 물었다. 

“내가 임신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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