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화
“최소한의 부성애는 갖췄다고 해야 하나.”
나는 피식 웃었다가 정색했다. 곱씹을수록 가테 자작의 행동이 역겨웠다.
가테 부인이 진짜 알테슈메그와 연락하며, 언제라도 그녀를 다시 저택으로 불러들일 생각을 하니 가테 자작은 그녀가 죽었다고 거짓말했다.
그 사실을 정작 가짜 자식인 ‘알테슈메그’는 알았는데, 어미인 가테 부인은 몰라서 고통스러워했던 것이다.
‘그녀는 아딜리아 신성 왕국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비록…… 즈레이카가 아딜리아와 사이가 나빠진 뒤에는 연락이 끊겼지만요.’
그 말을 들은 즉시 나는 사람을 시켜 진짜 알테슈메그를 즈레이카 왕국으로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즈레이카가 신성 왕국의 명칭을 버린 이후 두 나라 사이의 교류는 끊겼다. 언젠가는 회복되리라 예상하지만 현재는 누구도 국경을 넘을 수 없는 상태다.
하지만 사람 한 명 정도 밀입국시키는 것은 내게 어렵지 않았다.
다만 아무런 힘도 없었던 가테 부인은 딸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어도 하지 못했겠지.
“감사합니다, 공작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모든 사실을 전해 들은 가테 부인은 펑펑 울었다. 그녀는 계속 내 발을 붙잡고 엎드린 채 끊임없이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공작님의 소중한 사람에게 저지른 죄 역시도 달게 받겠습니다. 제 목숨을 취하신다고 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럴 일 없으니 안심하세요. 부인께서 애초에 모든 것을 알았다면 그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걸 압니다.”
미처 간과했던 문제까지 비로소 다 해결되었다. 진짜 알테슈메그 가테가 돌아오면 그녀에게 가테 자작과 가짜 알테슈메그의 처벌에 대한 의견을 물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문제는 어느 것 하나 해결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미완성이고 미완결이다.
가테 부인과 작별 인사를 하고 방에서 나온 순간, 사용인이 내게 달려와 외쳤다.
“공작님. 멜 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 * *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또 오래 잠들어버렸네.”
멜은 내가 수척해진 이유가 오직 그것뿐인 줄 알았다.
자신이 납치당했다는 것도, 내가 또다른 인어를 만나러 갔다 온 것을 모르니 당연할 일이었다.
“…….”
나는 멜의 뺨을 계속해서 어루만졌다.
그의 방문 앞에 선 채 몇 번이나 적절한 표정을 지었었는데. 계획을 성공하기 위해서라면 그의 앞에서 조금의 근심도, 계략의 흔적도 보여서는 안 된다.
하지만 아무리 연습해도 웃음을 지을 수 없었다.
계속 그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호수에 있던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갔던 날, 그의 얼굴을 외우기 위해 뚫어져라 쳐다봤던 것처럼.
우리에게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침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척, 싱긋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멜. 깨어나자마자 이런 이야기를 해서 미안해. 나랑 같이 갈 곳이 있어.”
“미안해할 필요 없어. 어디로 가고 싶어?”
내가 여행을 떠나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멜은 제법 기쁜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짐작처럼 어느 관광지에 여행을 떠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옛 녹시렐 저택 알지? 그곳에 두고 온 것이 있어.”
“아…….”
멜은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내 손을 잡고 살짝 끌어당겼다. 침대 옆에 서 있던 나는 엉겁결에 그가 있는 침대에 걸터 앉게 됐다.
“세르베인. 바다는 위험해. 다른 사람을 시키면 안 돼?”
“꼭 내가 직접 가야 해.”
“……그러면 육로를 통해서 가자.”
“그러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안 될 것 같아. 배를 타야 해.”
“하지만-.”
멜은 단호한 얼굴로 나를 만류하려 했다. 나는 그의 손가락에 자리 잡은 반지에 입 맞췄다.
“알아. 바다를 지나는 게 위험할까 봐 걱정하는 거. 그런데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 물속에서 숨 쉴 수 있어.”
“뭐?”
멜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제정신인지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그를 안심시켜주며 말했다.
“정말이야.”
“그래……?”
“응. 그래도 바다를 혼자 건너는 건 무서워서 그러는데 나와 같이 가줄래?”
멜은 여전히 내 말이 사실인지 조금 의심하는 눈치였지만, 내가 거짓말할 이유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는지 곧 믿어주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할게. 언제 갈 생각이야?”
그 말에 곧장 답할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창백한 안색을 살폈다가, 식은땀일지 무엇일지 모를 습기에 살짝 젖은 그의 옷을 보고 결심했다.
“내일. 내일 출발하자.”
* * *
프로셴과 블미에는 다음날, 나와 멜을 배웅해주기 위해 직접 항구까지 나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둘은 내가 갑자기 옛 녹시렐 저택에 갈 이유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음…… 급한 일이니 어쩔 수 없네. 잘 다녀와.”
하지만 프로셴은 늘 뛰어난 눈치로 상황을 모면했던 것처럼, 굳이 그 사실을 언급해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았다.
“그래. 이해해줘서 고마워.”
내 말을 ‘장단 맞춰줘서 고마워.’라고 똑바로 해석한 프로셴의 얼굴이 조금 묘해졌다.
“잘 갔다 와라.”
블미에는 별다른 말 없이 무미건조하게 인사했다. 어차피 내가 곧 돌아올 것을 알기에 그랬다.
나는 이미 충분히 내가 앞으로 할 행동에 대해 블미에와 대화를 나눴다.
‘진심인가?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
‘응.’
‘너는 그 인어를 수조에서 호수로 옮긴 것만으로도 후회하지 않았나.’
‘……맞아. 하지만 후회는 할지언정 내 선택은 바뀌지 않아. 멜이 좁은 수조에서 병들어갔기에 그를 호수로 보냈듯이, 지금도 같아.’
‘…….’
‘여러 번 생각했어. 설령 내 곁에 있지 않아도 돼. 그가 살아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
누구보다도 자신만만하게 그리 말했지만 사실 나는 그만큼이나 결심에 차 있지 않다.
지금 멜의 손을 잡고 배로 오르는 이 순간이 마치 빠져나올 수 없는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끔찍했다.
“세르베인, 손이 차가워. 추워? 몸이 안 좋아?”
줄곧 내 손을 잡고 있던 멜이 내 상태를 곧장 알아챘다. 그는 바닷바람은 건강에 나쁘다며, 서둘러 나를 객실 안으로 보내려 했다.
나는 멜을 갑판 위에 붙잡아두기 위해 말했다.
“아니, 괜찮아.”
“하지만 손이 이렇게 찬걸. 몸이 안 좋다는 증거야. 분명 더 바람을 쐬다가는 감기에 걸릴 거야.”
“그냥 긴장해서 그래. 그리고 바다를 이렇게 느긋하게 바라본 적이 없어서 조금 더 여기에 있고 싶어. 아름다운 풍경이잖아.”
내가 고집을 부리자 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나와 나란히 난간에 붙어있었다.
조금이라도 바다가 험해져 배가 출렁일 때 내가 바다에 빠지기라도 할까 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바닷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그의 남색 머리칼을 봤다. 처음 저 머리칼을 만졌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 어떤 징조도 보이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충동적으로 입을 열고야 말았다.
“멜. 내가 네게 했던 약속을 기억해?”
“……응?”
멜은 갑작스러운 화제에 의심과 불안이 담긴 시선을 보냈다가, 내가 웃고 있자 안심했다.
그저 로맨틱한 말을 위한 서두쯤으로 생각한 듯 그가 미소 지었다.
“그럼. 전부 기억하고 있어.”
“…….”
“넌 내게 사랑한다며 반지를 주겠다고 했고, 그 약속을 지켰지.”
물끄러미 그 얼굴을 바라봤다. 그의 눈을 바라볼 때면 세상의 모든 거짓이 사라지는 듯했다. 언젠가 저 눈을 앞에 두고 거짓말을 할 수 있던 순간이 꿈만 같았다.
나는 깨달았다. 내가 실패했다는 것을.
“세르베인…….”
내 어깨에 순진하게 뺨을 부비던 움직임이 곧 목선과 쇄골을 따라 끈질기게 달라붙는 키스가 되었다.
나는 아무 감흥도 없는 척, 그의 유혹을 견디다가 참지 못하고 그에게 입 맞췄다.
고요한 바다와 어울리지 않게 질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숨을 쉬기 위해 잠깐씩 멜을 밀어냈지만 그는 나를 편히 놓아주지 않았다.
서로의 숨을 빼앗듯이 절박한 입맞춤이었다.
“세르베인. 묻고 싶어. 너, 저택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 거야?”
마침내 입술이 멀어졌을 때, 멜은 눈물을 머금은 채 내게 물었다. 억지로 미소 지은 입술 선과 대비되어 더 슬픈 얼굴이 되었다.
그는 이미 나의 변명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 여태껏 속아주는 척했던 것이다.
“내가 말했잖아. 네 곁에 있겠다고. 그건 모든 결과를 감내하겠다는 거야. 그걸 각오하고서라도 네 곁에 있겠다는 거야.”
“…….”
“어째서 이런 결정을 내리는 거야? 나를 사랑하지 않아?”
다시는 네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날이 없을지 모른다.
나는 손을 뻗었지만 멜은 내 손길을 피해버렸다. 내게 겁을 먹고 먼 호수로 헤엄쳐가던 네 모습이 겹쳐졌다.
손을 거둬들였다. 먼저 내 손길을 피한 건 저인 주제에, 멜은 내 행동에 세상이라도 무너진 듯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을 못 본 체했다. 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숨기고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그 결과를 감내할 수 없어서 그랬어.”
“……뭐?”
“너는 네가 사라지더라도 내 곁에 있는 걸 택했지만, 나는 네가 나를 떠나더라도 살아남는 걸 원해.”
“그, 그러지마. 나, 나…… 안 들려. 네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많이 부족하잖아. 아는 게 없어…… 세르베인, 아무래도 나 공부를 더 해야 하나 봐. 어서 육지로 돌아가서-.”
“약속했잖아. 걱정하지 마.”
그의 두 손을 깍지 껴 훅 끌어당겼다. 입술이 닿을 것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그에게 말했다.
“만나지는 못해도 늘 너를 기억할게.”
일순간, 바다에 큰 파도가 일었다. 순식간에 바다는 배를 기울였다.
이전에 나를 제 속으로 집어삼켰던 파도가 이번에는 멜의 등 뒤에 있던 난간을 허물었다.
이보다 더 완벽하게 조건을 맞출 수도 없을 것이다. 분명 바다가 도운 것이겠지.
나는 기울어진 배 위에서 그의 어깨를 밀쳤다.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