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화
처음에는 모든 게 거짓이길 바랐다. 멜이 소멸할 것이라는 것도, 그를 살릴 방법이 바다로 돌아가는 것뿐이라는 것도.
‘하지만 너를 살릴 방법이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 할까.’
마차에서 내려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를 기다리던 이들이 우르르 다가왔다. 나는 담담한 척 그들에게 물었다.
“멜의 행방은 찾았나?”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분명 그 인어가 멜을 바다로 끌고 간 것이라고 생각해 그 인어만 만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다. 하지만 멜은 그곳에 없었다.
‘누구의 소행이지?’
어쨌거나 바다가 아니라 인간의 소행이라면 내가 못 잡을 이유가 없다. 처음에는 바다의 짓이라 생각해 패닉에 빠졌지만, 이제는 아니다.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이며 외투를 벗었다. 내 명령을 받고 녹시렐 저택으로 온 아란이 말했다.
“곧 범인을 추려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작 저에 들어왔던 마차가 산길에 버려진 것을 발견했고, 기사로 위장한 이들이 사실 고용된 용병이라는 점과 그들의 신변까지 밝혀냈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범인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 두 공작 가문과 왕실이 합심해 추적하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겠지만.
나는 범인이 녹시렐 공작 가문에 원한을 가진 탓이든, 혹은 멜에게 홀려서 그런 짓을 벌인 것이든 가만히 놔두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나저나 공작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 알테슈메그 가테 공자가 찾아왔습니다.”
“왜지?”
“현재는 헥사바임 공작님과 독대 중입니다. ……섣부른 추측일지 모르지만 제 생각에는 그 사람이 멜 님의 행방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안색이 매우 창백했거든요.”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곧장 블미에와 알테슈메그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열어젖혔다.
벌컥!
문을 열자 보인 풍경은 무릎을 꿇은 알테슈메그와 그 앞에 선 블미에였다.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아란의 추측이 진실임을 직감했다.
서슬 퍼런 나의 얼굴을 발견한 알테슈메그가 사색이 되었다. 그가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상체까지 엎드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공작님! 제발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
“멜 공자는 안전합니다!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습니다.”
헛웃음이 흘렀다. 나는 성큼성큼 그 앞으로 걸어갔다.
아무 말도 없는 나의 반응에 알테슈메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뺨을 힘껏 때렸다.
짜악!
“일을 저지르고 곧장 자수하는 이유가 뭐지? 왜. 생각보다 일찍 붙잡힐 것 같으니 뒤늦게 겁이 났나?”
“저 역시 사태를 파악하자마자 달려온 것입니다……! 미리 알았더라면 결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손을 썼을 것입니다. 정말로 저조차 예측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그 말은 본인이 그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의미다. 물론 거짓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잠자코 그가 계속 말하기를 기다렸다.
“공작님의 손으로 범인을 잡게 되면 분명 죽이시겠지요. 선처를 부탁드리기 위해 자수한 게 맞습니다. 염치없는 작태임을 알지만, 저의 어머니의 일입니다…….”
“그대와 그대의 아비가 저지른 일을 가테 부인에게 뒤집어씌운 건 아니고?”
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웃으며 물었다.
역겹게도 가문의 중심을 담당하는 자들이 실컷 감당하지 못 할 일을 벌여놓고 아무런 권력도 없는 구성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은 제법 흔한 일이었다.알테슈메그는 어찌할 말을 찾지 못한 것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그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공작님께서도 믿지 못하실 것이라 저도 생각했습니다. 저 역시 상상하지도 못했으니까요.”
“…….”
“정말로 원래는 그런 일을 저지를 분이 아닙니다. 다만 어머니께서 정신적으로 위태로우셔서 그러신 것 같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문득 내게 꼭 다과회에 참석해달라며 이상하리만치 집착하던 가테 부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건 멜에게 홀려서 그를 데려오기 위해 내민 미끼였나?
‘하지만 다과회는 그녀가 멜을 보기 이전에도 나왔던 일 아니던가.’
당장 알테슈메그의 말을 신뢰할 수는 없다. 나는 비참하게 바닥에 납작 엎드린 모습을 보다가 아란에게 말했다.
“알테슈메그 가테를 감옥에 가둬라.”
“명을 받듭니다.”
아란이 곧장 알테슈메그를 포박했다. 내게 절박한 시선을 보내는 알테슈메그를 무시하며 밖의 기사들에게 지시했다.
“그대들은 나와 가테 저택으로 가지.”
* * *
가테 저택에 도착한 나는 알테슈메그의 말이 전부 진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기사들에게 포박당해 바닥에 주저앉은 가테 부인에게는 더 이상 연회장에서 봤던 기품있는 귀족 부인의 모습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악!! 내 거야! 나의 소유라고!”
약 5년 전부터 쭉 지병으로 인해 쇠약해졌다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기백이 아니었다. 심지어 가테 자작까지도 자신의 아내를 두려움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평소 그녀의 모습은 저렇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무래도 저 여자는 인어에게 홀린 것 같군.”
내 곁에 있던 블미에가 귓가에 속삭였다. 나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은…….
‘도대체 홀리는 기준이 뭐지? 가테 부인은 멜을 연회장에서 잠깐 봤을 뿐이다. 그곳에 있던 다른 귀족들은 괜찮았단 말이다. 다른 사용인들도 홀리지 않았는데 왜 가테 부인만…….’
어쨌든 나는 예외 없이 가테 가문의 모두를 감옥에 가두도록 지시했다.
제 가문의 저택에 있는 감옥에 갇히게 된 이들의 얼굴이 참담해졌다.
알테슈메그의 말대로 멜은 손끝 하나 다친 곳이 없었다. 가테 부인이 미쳐 그에게 집착했을지언정, 관상용으로 삼으려 했던 것인지 그는 곱게 침대 위에 눕혀져 있었다.
“멜, 눈을 떠 봐.”
“…….”
“멜……!”
벌써 저녁 시간이었다. 아무리 수면 시간이 길어졌다고 하지만 멜이 이 시각이 되도록 눈을 뜨지 않은 건 처음이다.
“약을 사용한 걸지도 몰라.”
나는 부들부들 떨다가 가테 부인을 취조하기 위해 감옥으로 향했다. 그때 멜을 살피던 블미에가 말했다.
“세르베인. 이 인어의 신체에서 딱히 약물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
“그리고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다. 인어에게 홀리는 기준은 무엇이지?”
건성으로 모른다고 답하고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설령 블미에가 멜에게서 약물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고 해도, 가테 부인을 취조해 그 입으로 확신을 받아야 만족할 것 같았다.
하지만 블미에가 내 손목을 놓아주지 않았기에 체념하고 답했다.
“나도 잘 몰라.”
“여태껏 왕성에서 인어를 돌보던 사용인들은 홀리지 않았다. 이상하지 않나? 게다가 너의 이전 생에서 인어에게 홀린 자들도 단 한 번만 보고 홀린 사례는 없지 않았나.”
“아니. 이런 사례는 한 번 더 있었어. 이전에 저택에서 멜을 데리고 나오다가 어떤 부랑자와 마주쳤었는데 그게 첫 번째…… 잠깐만.”
하던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순간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 길가에서 술을 마시고 널브러져 있던 부랑자와 가테 부인. 인어에게 홀렸던 옛 녹시렐 저택의 사용인들. 가장 먼저 멜에게 홀렸던 나.
‘약 5년 전부터 가테 부인의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다만 어머니께서 정신적으로 위태로우셔서 그러신 것 같습니다.’
헤론시와 알테슈메그의 말이 차례로 떠올랐다. 알테슈메그는 ‘갑자기’ 어머니의 정신이 위태로워졌다는 식의 말을 하지 않았다.
대외적으로는 건강이 안 좋다고 알려져 있지만, 어쩌면 가테 부인에게는 정신적인 결함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문제가 생긴 시점은…… 헤론시가 언급한 시기인 5년 전일 것이다.’
얼추 들어맞는 게 있었다. 부랑자가 제대로 된 삶을 영위 했을 리 없다. 정신적으로 위태로운 가테 부인. 그리고 옛날의 나 역시 삶에 미련이 없었지 않나.
‘그리고 숲에 불을 질렀던 그 애…….’
이름이 다핀이라고 했다. 잊을 수 있을 리 없다.
자신이 실질적 가장이라며, 어린 동생이 여러 명 있다고 했던 그 아이. 어린 나이에 집안의 가장 노릇을 고작 하녀 일을 하며 견디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다.
‘삶에 미련이 없는 자들이 멜에게 쉽게 홀리는 것인가?’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다. 나의 아버지였던 녹시렐 공작. 그 역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하루하루를 억지로 살아가던 이가 아니었나.
그랬다면 그 역시 멜에게 홀려야 정상이지 않은가.
‘삶에 미련이 없다는 건…… 집착하는 대상이 없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어.’
하지만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이것 역시 해결된다.
옛날의 나는 바라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길가의 부랑자와 가테 부인 역시 그랬으리라.
‘삶에 미련이 없으며 집착하는 요소가 없는 이가 쉽게 홀리는 것이라면 아버지가 멜에게 홀리지 않았던 것이 설명된다.’
아버지는 늘 어머니에게 집착하던 사람이었다. 심지어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블미에. 나, 누가 멜에게 홀리는 것인지 답을 찾은 것 같아.”
“그래. 그런데 말하다 말고 어디로 가려는 것이지?”
“가테 부인을 만나야 해.”
본능적으로 느꼈다. 가테 부인을 심문해야 한다.
그건 멜을 납치한 것에 대해 죄를 묻기 위함이 아니었다.
“5년 전, 가테 부인은 갑자기 질병에 걸린 게 아니야.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쇠약해졌고, 그게 몸에 영향을 끼친 거지.”
“헤론시 공이 본 어느 여자와 편지에 대해 조사하려는 건가?”
“맞아. 그 일은 귀족파의 반란 모의와 관련이 없으리라 생각해 무시했는데, 어쩌면 우리의 생각이 틀렸을지 몰라.”
5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녀가 정신적으로 무너졌는지 알아내야 한다고.
그것이 필시 중요한 일일 것이라고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