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화
이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할 사람은 블미에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멜이 인어라는 것을 알고, 누군가를 진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이는 그녀뿐이었다.
“헥사바임 공작님은 현재 저택이 아니라 왕성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 고마워. 나 역시 왕성으로 가야겠으니 준비를 부탁해.”
나는 블미에가 왕성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왕성으로 갈 준비를 했다. 걸음을 옮기면서 외투를 걸치고, 사용인들에게 지시사항을 말하며 바삐 움직였다.
“혹시 내가 없는 사이에 멜이 눈을 뜨면 잠시 왕성에 갔다가 돌아올 테니 불안해하지 말라고 전해줘.”
“알겠습니다, 공작님.”
나는 사용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급히 마차에 올라탔다.
사용인들은 내가 멜의 상태를 살피는데 왜 의사가 아니라 블미에 헥사바임 공작을 찾는지 의아해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굳이 묻지는 않았다. 내가 멜과 관련된 일이라면 굉장히 예민해진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사실 블미에도 오랫동안 의술에서 손을 뗐었고, 멜은 사람이 아니니 그녀가 못 고칠 수도 있어.’
이성적인, 혹은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어차피 이 상황에서 도움을 구할 이는 블미에 뿐이지 않은가.
덜커덩!
승차감은 신경 쓸 필요 없으니 최대한 빨리 도착해 달라는 내 부탁대로 마차는 거칠게 움직였다.
멀미를 하거나 불편하다고 느낄 겨를도 없었다. 나는 왕성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경비를 선 기사들을 지나쳐 블미에가 있을 집무실로 뛰어 들어갔다.
벌컥!
“블미에!”
“? 세르베인, 오랜만이군. 어쩐 일이지?”
업무를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외투를 걸치며 블미에가 여상하게 물었다.
꽤 오랜만의 재회인데다가 내가 갑자기 들이닥친 것인데도 평소처럼 침착하고 놀란 기색도 보이지 않는 태도였다.
나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도움이 필요해.”
“……인어의 일인가?”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기도 전에 블미에가 상황을 짐작했다.
나는 숨이 차서 급히 고개만 끄덕였다.
잠시 복잡한 얼굴을 하던 블미에가 드물게 제 능력의 부족을 언급했다.
“일단 나로는 부족할 수도 있으니 왕성 의사도 데려가지. 프로셴에게 말하고 그쪽으로 가겠다. 너는 먼저 마차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라.”
블미에는 프로셴에게 미리 언질을 준 뒤 의사를 데리고 왔다. 블미에는 나와 같은 마차를 탔고, 의사는 블미에가 왕성까지 타고 왔던 마차에 홀로 타 우리를 따라왔다.
마차에 탄 뒤에야 블미에는 내게 자세한 사정을 물었다.
“정확히 그 인어에게 무슨 문제가 있지?”
“멜이…… 요즘 오랫동안 잠들어 있어.”
“…….”
“작위 수여식 전에 그가 한번 쓰러진 뒤 며칠 동안 깨어나지 않은 적이 있었잖아. 이제는 괜찮은 줄 알았는데 너무…… 점점 잠들어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어.”
당사자에게 불안해하는 기색을 티 낼 수는 없었다. 그의 수면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지나치게 염려하면 멜의 심정 역시 불안해질 수 있다.
‘멜은 예전에 자신이 쓰러진 이유가 감정적으로 지나치게 격해진 탓이라고 했었어. 그러니 또 멜을 불안하게 해서는 안 돼.’
그래서 차마 멜에게 무엇이 문제냐고, 네가 왜 이러는 것이냐고 대놓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지나가듯이 물어봐도 멜은 그냥 계속 괜찮다고만 해. 나는…… 원인도 모르는 거야. 그가 이야기해 주지를 않으니까.”
“……일단 도착한 뒤 진찰을 먼저 해보겠다. 일단 너는 도착할 때까지 조금 눈이라도 붙여라.”
남이 보기에도 내 모습이 꽤 초췌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답했다.
나 혼자 탔을 때도 왕성까지 가는 데에 한 시간이 족히 걸렸다. 두 사람이 탄 마차는 그보다 더 느릴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제 막 정오를 넘겼다. 멜은 아직 깨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떨어져 있는 순간이 너무 불안했다.
끼익.
“도착했군.”
마차가 멈추고 창밖을 본 블미에가 그 말을 꺼낸 순간 튕겨 나가듯 마차에서 내렸다.
일하던 사용인들이 마차를 보고 나를 마중 나왔다. 그런데 그 얼굴이 꽤 얼떨떨해 보였다.
“공작님. 일찍 돌아오셨군요.”
“그래. 손님을 데려왔거든. 혹시 내가 없는 동안 멜이 깨어났어?”
“……네?”
사용인들이 이상한 질문을 받았다는 듯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 모습에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읽어낸 내가 재빨리 물었다.
“왜 그러지?”
“공작님께서 출발하신 지 약 한 시간 뒤에 공작님의 명으로 멜 님을 왕성으로 모셔가겠다는 분들이 왔습니다. 그래서…….”
창백한 얼굴로 더듬더듬 상황을 설명하던 이가 내 안색을 보고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직감적으로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챈 까닭이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저희의 실수입니다……!”
“…….”
“부디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곧바로 멜 님을 추적하겠습니다……!”
멜이 납치당했다.
내가 자리에 주저앉자 블미에가 대신해서 사람들을 지휘했고, 헥사바임 공작 가문과 왕성에도 수색 도움 요청을 보냈다.
“시간이 얼마 흐르지도 않았다. 그리고 인어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지 않은가. 눈만 뜨면 곧장 처리하고 이곳으로 돌아올 거다.”
“…….”
“세르베인! 정신 차려라!”
사용인들이 허술하게 당한 게 아니었다. 납치범들은 내가 저택을 비운 시각을 노렸다. 그리고 왕성으로 가는 것까지 알고서 멜을 왕성에 데리고 가겠다는 핑계를 댄 것이다.
꾸준히 멜을 데리고 갈 생각으로 저택을 주시하고 있던 자의 소행이다.
“……그래.”
나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이 순간 떠오르는 의심스러운 상대가 있었다.
내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다시 외출 준비를 하자 블미에가 다급히 내 손목을 붙잡았다.
“세르베인. 어디로 가는 거지? 너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그러니 인어의 수색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라.”
“……이건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어. 바다로 가는 거라.”
“바다? 거기는 왜…….”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를 노려보며 차갑게 내뱉었다.
“내 모습으로 위장했던 인어가 멜에게 접근한 적이 있어. 이번에도 그것의 소행일지 몰라.”
* * *
쏴아아-.
철썩!
멜을 위해 내 소유로 만들었던 해변이다. 나는 초조한 심정을 숨기고 한가로운 척, 해변을 걸었다.
흰 모래사장과 푸른 바닷물의 조화가 아름다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 조화 따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와 할 말이 있지 않아?”
나는 아무도 없는 모래 사장에서 미친 사람처럼 허공에 대고 말을 했다.
“너는 내 모습을 흉내내 멜을 데려가려고까지 했잖아. 할 말이 있어.”
“…….”
“할 말이 있다고 하잖아!”
“할 말이 뭐지?”
그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눈에 익은 흰 드레스를 입은 존재를 바라봤다. 내 얼굴을 타인의 시야로 바라보는 느낌이 기묘했다.
서벅서벅.
나는 모래 사장을 빠르게 가로지어 인어에게 다가갔다. 인어는 내 기세를 보고 주춤했지만, 이내 한낱 인간 여자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듯 부러 몸을 굳히고 서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잖, 컥!”
풀썩!
“바른대로 답해. 네가 멜을 데려갔어?”
나는 여지를 주지 않고 곧바로 인어의 목을 조르며 인어를 뒤로 넘어뜨렸다. 뒤로 쓰러진 인어의 몸 위에 올라탔다.
“크흑, 이 손…… 떼……!”
인어가 거칠게 내 손을 떼어냈다.
과연, 멜처럼 이 인어 역시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순간에도 내 목숨을 해치려고 하지는 않았다.
‘역시 생명체를 해치면 안위에 문제가 생기는 모양이야.’
이런 식으로 확인한 진실에 더욱 막막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멜은 여태껏…… 얼마나 많은 목숨을 취했던가. 불길함에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콜록, 콜록……!”
기침을 하던 인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내 그 모습은 내 얼굴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골격 역시 뒤틀리며 성인 남성의 것으로 변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본인의 얼굴인 건가.’
나는 냉담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이내 멜보다는 못하지만 화사한 물빛의 머리칼을 한 미남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초록빛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왜 나한테 그 인어의 행방을 묻는 거지? 그 인어는 어차피 나를 따라오려고 하지도 않았다. 나를 죽이려 했지!”
“…….”
“똑똑히 전해. 그딴 식으로 막살다 보면 곧 소멸할 거라고. 그게 인어의 이치-, 악!”
풀썩!
나는 다시 인어의 목을 조르며 그를 뒤로 쓰러트렸다. 그가 환멸 난다는 얼굴로 억지로 내 손을 떼어놓으며 소리쳤다.
“끼리끼리 만났군! 내가 그 인어에게는 못 당했지만 한낱 인간인 네게도 당할 만큼 약할 거라고 생각해? 이 손 치워!”
퍼억!
역시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힘이었다. 그가 날벌레를 내쫓듯 휘두른 손짓에 나는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모래가 덕지덕지 묻은 옷을 털어내며 인어가 서늘하게 읊조렸다.
“그러니까 진작 비키라고 했잖아.”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고 곧바로 고개를 번쩍 들어 그를 노려봤다.
“다시 말해봐. 소멸이라니.”
“……흠.”
잠시 의아한 얼굴을 하던 인어가 이내 흥미롭다는 얼굴을 했다. 탐색하듯 나를 훑어보는 시선이 기분 나빴다.
그는 이내 약간의 조롱과 술수를 담아 내게 말했다.
“왜? 그 인어에게 문제라도 생겼나 봐? 뭐…… 그러면 알려줄게.”
“…….”
“그 인어, 곧 사라져. 그것도 그럴 게 너무 많은 생명을 죽였잖아? 먹으려는 이유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지? ……빨리 말해!”
나는 초조하게 소리쳤다.
사실 무작정 블미에에게 멜을 진찰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녀가 큰 힘을 쓰지 못할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어쩌면 눈앞의 인어가 멜을 살릴 방법을 알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히 알고 있을 테다.
그는 빙글빙글 웃는 얼굴을 하다가 표정을 굳히고는 내게 말했다.
“그 인어를 바다로 보내.”
“…….”
“다른 방법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