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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화 (112/132)

112 화

멜은 내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가 의식적으로 풀어내길 반복했다.

그는 내 입으로 실토한 나의 감정들에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네게 미안해서 그래. 나 때문에 네가 희생한 것이 너무 많은데…… 손에 피까지 묻히게 해서 내 마음이 아파.”

“그럴 필요 없어, 세르베인. 네가 당한 아픔은 내가 당한 아픔이기도 해. 그러니까 마땅히 할 일을 했던 것뿐이야.”

멜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결심찬 얼굴을 했다. 나는 그저 웃고 말았다.

“그래. 고마워. 하지만 우리 약속 하나만 하자.”

“뭔데……?”

“이제는 네가 위험해지는 행동을 하지 마.”

“…….”

“알겠지?”

나는 우리 관계에 존재하는 모든 불안 요소와 불확실함을 없애고 싶었다. 다시는 멜이 눈을 뜨지 않을까 봐 불안해하는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끼이익.

“도착했습니다.”

그 순간 마차가 멈추고 마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내가 한눈을 판 사이에 멜은 내 입술에 입을 맞추고는 얼버무리듯 웃었다.

“……도착했대. 나 네가 무엇을 보여줄지 너무 궁금해.”

* * *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위치에 자리한 저택이었다. 덕분에 마차를 타고 조금만 나가면 흰 모래가 아름다운 해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근처에 있는 해변을 샀어.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그곳은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탓에 매우 깨끗하고 아름다운 환경이 보존되어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어느 땅이 그렇게 잘 관리되려면 보통은 왕실 소유여야 가능했다.

‘내가 프로셴에게서 뜯어냈지.’

하지만 이제 이 해변의 주인은 나다.

“또 정원이랑 수영장도 있어. 내가 소개해 줄게.”

“잠시만, 세르베인. 여긴…… 뭐야?”

멜은 마차에서 내린 순간부터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채 뻣뻣이 서 있었다.

그 얼굴에는 낯선 곳에 온 탓에 드러난 경계심과 의아함이 공존했다.

“아…… 내가 너무 성급했네.”

섣불리 앞서나갔던 걸음을 다시 뒤로 했다. 나는 멋쩍게 웃다가 멜의 앞으로 다가갔다.

사박사박, 싱싱한 잔디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달빛이 흐르는 분수대 앞에서 그와 시선을 맞췄다.

“멜. 여기는 그러니까…… 우리 집이야.”

“응?”

“왕성에서 나올 때가 되었잖아. 우리 둘만 지낼 곳이 필요하니까.”

말하지 않아도 멜이 짐작했을 것이라 생각해, 멋대로 앞서서 집 구조를 설명했었다.

내 실수였다.

멜은 뒤늦게 경계를 풀고 아하하, 웃었다.

“그랬구나. 왜 내가 바로 생각하지 못했지……? 정말 예쁜 저택이네.”

“예전에 지내던 그 집도 참 크다고 생각했는데 여기는 더 크구나.”

멜은 기쁜 얼굴을 하고서 저택이 마음에 든다고 피력했다. 하지만 그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긴장이 되어서.

“……세르베인?”

나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멜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나는 숨을 멈췄다가 겨우 들이마시고는 덜덜 떨며 손을 내밀었다.

“멜. 손 좀 줘볼래?”

“?”

멜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순순히 내 손 위에 제 손을 올렸다. 희고 아름다운 손이었다.

나는 그 손을 괜히 의미 없이 만지작거렸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졌다.

슬슬 멜도 이유를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때가 되어서야 겨우 용기를 끄집어냈다.

“선물이야.”

“!”

그의 대답도 듣기 전에 냅다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버렸다. 반지의 다이아몬드가 예쁜 손을 만나 더욱 빛났다. 보통의 다이아몬드와 달리 멜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의 다이아몬드는 은은한 푸른 광채가 돋보였다.

눈이 동그래진 멜이 어버버 말을 더듬었다.

“세, 세르베인. 이게 무슨…….”

“나랑 결혼해줘.”

멜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내 할 말만 했다.

긴장해서 머리가 미처 평범한 대화를 이어가기를 거부했다.

냅다 던져진 나의 청혼에 멜이 더욱 상기된 얼굴을 하고는 손을 덜덜 떨었다.

“너, 너무…… 갑작스럽잖아.”

“네가 말했잖아. 나는 늘 갑작스럽다고. 그러니 이것도 그러려니 해줘.”

이왕 이렇게 된 일, 뻔뻔하게 밀고 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내 얼굴 역시 내 마음처럼 무던해 보일지는 의문이다.

멜은 한순간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가 물끄러미 애정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는 한동안 제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이제 그가 팔찌가 사라진 빈 손목을 훑는 대신 습관적으로 반지를 만지게 되리라 직감했다.

“세르베인. 네 반지는 어디 있어?”

“응? 아…… 여기.”

미처 내 손에는 아직 끼우지 않은 반지를 보여줬다. 멜은 내 왼손과 반지를 가져갔다.

“…….”

촉.

그가 내 약지 위에 가볍게 입 맞췄다. 찰나였지만 나는 그가 내 손가락을 바라보는 시선이 깊어졌음을 느꼈다. 마치 과거를 생각하는 것처럼.

“네 손에는 내가 끼워주는 게 맞는 거겠지.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니까.”

멜이 화사하게 웃으며 반지를 끼워주었다. 그는 내 손을 가져가 제 뺨을 부볐다.

“나, 지금 너무 행복해…….”

나 역시 그렇다고 말하기 위해 입을 뗐다. 하지만 그 순간 멜의 혀가 들어와 말문이 막혔다.

간신히 그 입맞춤에서 벗어났을 때 나는 다급히 말했다.

“멜, 일단 저택 안으로 가자.”

멜은 왕성에 있을 때 가끔씩 성의 구조를 옛 녹시렐 저택과 혼동하고는 했다. 금세 정신을 차리고 다시 여기가 녹시렐 저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는 했지만, 그 점이 신경 쓰였다.

그래서 옛 녹시렐 저택과 흡사하게 저택의 구조를 변형시켰다.

덜컹!

“으음…….”

철문이 거칠게 열리고 나는 그와 입 맞춘 채 멜의 동선대로 뒷걸음질 쳐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입술이 떨어지고 조금 숨이 거칠어진 멜이 눈을 휘며 웃었다.

“하아…… 세르베인…… 침실은 어디 있어?”

“2층에…….”

나의 대답을 듣자 그는 저택을 한번 둘러보더니 이내 구조가 옛 녹시렐 저택과 비슷하리라 감을 잡은 것 같았다. 그는 나를 안아 들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타다닥!

나는 그의 품에 안긴 채 계단을 지나며 보이는 풍경을 멍하니 응시했다. 암울했던 옛 녹시렐 저택과 달리 최대한 밝고 따뜻한 분위기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

철을 모르고 핀 수국이 꽃병에 담겨 저택을 장식했다. 귀를 기울이면 바닷소리가 들릴 것처럼, 창밖에는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 풍경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멜이 2층에 도착해 어느 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풀썩!

멜이 나를 침대에 눕히고 그 위에 올라왔다. 한껏 치장해 불편한 옷을 그가 빠른 손으로 풀어헤치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그의 목을 감싸 안아 다시 입 맞췄다.

* * *

해가 뜨는 줄도 모르고 맞이한 아침이었다. 그런 날이 한 번 더 반복됐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정확히 기억할 수 없었다. 어쨌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정오의 태양이 창을 통해 쏟아지고 있었다.

“으응…….”

나는 여전히 꿈속 세상을 헤매는 멜의 얼굴을 봤다. 햇빛이 조금 거슬리는지 살짝 찌푸린 미간에 입을 맞춘 뒤 창문으로 가 커튼을 붙잡았다.

찰캉, 찰캉.

창밖으로 정원사들이 정원을 다듬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멜과 하루하루를 보내는 동안, 사용인들은 계약한 대로 일정에 맞게 이 저택에 들어와 각자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드르륵!

커튼을 치는 소리가 조금 컸다. 덕분에 내가 깨어난 것을 알아챘는지 바깥에서 하녀의 음성이 들렸다.

“공작님. 깨어나셨습니까?”

“그래. 들어와.”

왕성에서 머물 때부터 안면이 익은 하녀였다. 나는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멜을 보고도 큰 동요가 없고, 일도 잘하던 몇 명을 내 저택으로 데려왔다.

“어제 가테 자작 가문으로부터 도착한 초대장입니다. 일정은 내일 이른 오후입니다.”

나는 초대장을 받아들었다. 꽤 정성껏 꾸민 초대장을 열자 안에는 다과회에 초대한다는 귀부인 특유의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필체가 보였다.

‘귀부인들만 모이는 곳이라면 나 혼자라도 가겠지만 반드시 파트너를 동반하라니……’

어제 연회에서도 즐거운 기색을 보이지 않던 멜이다. 그에게 괜히 귀족들의 자질구레한 행사에 참석하길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굳이 가테 자작 가문의 행사에 얼굴을 비춰 그 가문에 힘을 실어줄 이유도 없다.

나는 초대장을 하녀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정성껏 거절 답장을 보내줘. 약속을 못 지켜 미안하다는 말도 함께.”

“예, 그리하겠습니다.”

왕실에서 일했다 보니 이런 일이 익숙한지 하녀는 매끄럽게 초대장을 받아 나갔다.

하녀가 나간 뒤 나는 속으로 언제 또 왕궁에 가야 하는지 셈해봤다. 아무래도 아직 일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라 빠른 시일 내로 다시 방문하긴 해야 했다.

사락.

나는 다시 침대로 돌아가 멜의 품에 파고들었다. 바로 이틀 전에 공작위를 되찾았으면서 벌써 은퇴하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다.

“멜. 나 은퇴할까?”

“…….”

“흠…… 언제 일어나려나.”

내가 먼저 잠들고 그 뒤에 멜이 나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힌 것 같았다. 그래서 더 피곤한 게 이해는 갔다.

나는 그의 섬세한 속눈썹을 살짝 손가락으로 쓸어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잠들었다.

“세르베인, 일어났어?”

눈을 뜨자 석양을 받아 따뜻하게 빛나는 멜이 보였다. 바스락거리는 흰 셔츠에 코를 가져다 대면 그의 체향과 부드러운 햇볕 냄새가 날 것 같았다.

“하핫…… 응. 우리 너무 늦게 일어났네.”

늦은 오후에 함께 눈을 뜬 그 감각이 좋았다. 바쁘게만 살아왔기에 조금은 늘어진 듯한 그 일상이 퍽 행복했다.

하지만 그런 나날을 마냥 행복하다고 넘기는 것은 오래 가지 않았다.

“……멜?”

아무리 일찍 잠자리에 들어도 멜은 정오가 지난 시각에서야 눈을 뜨기 시작했다.

굳이 셈하지 않아도 그의 수면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는 걸 모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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