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화
“흠흠. 그렇군요.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능력이 가장 중요하지요.”
“…….”
“공작님께서도 녹시렐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지 않으셨습니까. 공자님도 그런 사례겠지요.”
한 귀족이 분위기를 환기시킬 겸 내게서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설레발을 쳤다.
대부분이 추측하고 있는 바처럼, 멜이 왕국이 혼란스럽던 시절에 몰락했던 가문의 후손일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런 식으로 넘어간다면 편리하게 멜의 신분을 위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지 않았다.
“멜은 귀족 출신이 아니다.”
“!”
“하지만 그 누구도 문제 삼을 수는 없지.”
그건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귀족들도 멜이 평민일 가능성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닐 테다.
하지만 내가 너무나 당당하게 그를 작위 수여식을 비롯한 축하 연회에까지 파트너로 데리고 온 탓에 그 의심을 지웠던 것이다.
“하지만……!”
“왜 문제가 될 수 없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하루아침에 평민이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지.”
반박을 하려던 귀족의 입이 순식간에 다물렸다.
나는 천천히 몇몇 귀족들과 시선을 맞췄다. 가테 가문처럼 적절한 시기에 국왕파로 옮겨와 가문의 수명을 연장 시킬 수 있던 자들이었다.
나는 부러 웃음기를 숨기지 않고서 물었다.
“더 할 말이 있나?”
* * *
나의 도발 이후 연회의 분위기는 도무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가라앉고 말았다.
“큼……! 공작님의 말이 맞지요.”
“그럼요. 아, 그런데 저는 잠시 볼일이 있어…….”
“저……는 공작님의 사랑을 응원합니다.”
귀족들은 서둘러 영혼 없는 대답을 늘어놓다가 어영부영 흩어졌다.
어쨌거나 젊은 아들을 대동한 귀족들이 은근슬쩍 미나엘, 이제는 블미에로 개명한 그녀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수여식이 진행되던 홀에는 작위가 있는 귀족들만 들어올 수 있었지만, 연회에는 아직 작위가 없는 어린 귀족들도 참석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나는 가볍게 헛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짚었다. 상황이 제법 웃겼다.
‘나를 제 가문과 결혼으로 엮어보려는 이들이 있을 거라는 걸 왜 생각하지 못했지?’
얼떨결에 모든 폭탄이 블미에에게로 가버렸다. 살짝 눈이 마주친 블미에의 눈빛이 흉흉했던 게 나의 착각이길 바랐다.
그때 다급히 내 팔을 붙잡으며 멜이 작게 속삭였다.
“세르베인. 그걸 말해도 괜찮은 거야? 혹시 내가 네게 흠이 되면 어떡해?”
보통 인간이 멜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너는 공작이라는 지위와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왜 자신에게는 흔한 하급 귀족의 작위라도 쥐여 주지 않느냐며 원망했겠지.
나는 멜의 손을 꼭 잡았다. 나는 이제 그가 불안해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멜. 괜찮아. 누가 그런 걸로 감히 너를 흠이라고 말하겠어.”
“정말……?”
“응. 약속할게.”
나 역시 녹시렐 가문을 되살리기 이전까지 몇 번이나 신분을 위조하며 살았었다. 내 것이 아닌 타인의 삶을 흉내 내는 건 늘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일이었다.
“너는 네가 편한대로 행동하면 돼.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마.”
나는 멜이 그렇게 힘들게 지내길 원하지 않았다. 인간으로 사는 삶에 익숙해지는 것만으로도 벅찰 것이다. 그런 그에게 귀족으로서의 예법을 다 준수하라고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껏 사람들이 많은 곳에 다녀도 돼. 숨어다니지 마.”
마찬가지의 이유로 이제 멜의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그건 멜을 보호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 그를 억압하는 것이지.
‘멜에게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때 그 사람을 제거하면 된다.’
또각또각.
그때 가벼운 구두 소리가 들렸다. 더 이상 내게로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 기척을 한 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녹시렐 공작님. 처음 뵙습니다.”
창백한 얼굴의 귀부인이 내게 웃으며 인사했다. 나는 그녀의 정체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곁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에스코트하고 있는 알테슈메그 가테 덕분이었다.
“네, 반갑습니다. 가테 자작 부인.”
내게 인사를 하러 온 그들을 본 소감은 꽤 얼떨떨했다. 작위 수여식이 있기 전, 또 한 번 대다수 귀족들의 지위 강등이 있었다.
‘가테 백작 가문도 이제 자작 가문이 되었지. 혹시 지위를 한 단계만 낮춘 것에 대한 감사 인사라도 하려는 것인가?’
내가 아리송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가테 부인이 조금 뻣뻣한 손으로 내 두 손을 맞잡아왔다. 갑작스럽게 친밀한 척하는 행동에 속으로 몹시 당황했다.
“접때…… 제…… 아들이 초대장을 드렸는데 오시지 않아서요…….”
아. 알테슈메그가 심문을 받기 위해 왕성에 왔다가 내게 초대장을 줬었지.
‘정말로 그 일정대로 다과회를 열었을 줄은 몰랐는데.’
아들이 심문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고, 작위는 강등당할 위기에 처해 있고, 부인의 몸 상태 역시 좋아 보이지 않는데 다과회를 열었을 줄이야.
“연락도 없이 방문하지 않아 죄송하군요. 일정대로 다과회가 진행될 줄은 몰랐던 터라…….”
“아, 괜찮아요……. 그냥……, 저도 적적해서……만든 자리라. 별로 중요하지는 않았답니다…….”
사실 나 역시 귀족의 사교 문화에 익숙한 편이 아니다. 유일하게 태어날 때부터 귀족적인 삶이었던 첫 번째 생에서는 건강 문제로 인해 타인과의 교류가 없었으니까.
‘도무지 어떻게 대화를 이어가야 할지 모르겠군.’
차라리 시비를 걸러 온 부류라면 대처하기 편할 텐데 가테 부인의 의도는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병색이 완연한 노부인을 막 대하는 건 인간 말종이나 할 짓이 아닌가.
“그래서 이번에 또 다과회를 열려고 해요.”
잠시 정신을 놓고 있던 때에 가테 부인의 말이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당황해 되물었다.
“네?”
“예?”
순간 맞은 편에서도 똑같은 반응이 흘러나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알테슈메그 가테 역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어, 어머니. 건강도 좋지 않으신데 쉬시는 게 어떠실까요……?”
그가 애써 웃으며 가테 부인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나는 그 웃는 얼굴 아래의 불안한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가테 부인은 내 손을 꼭 쥔 채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꼭 오실 거죠……?”
“아…… 네. 일정이 된다면 꼭 가겠습니다.”
“일정은 언제 되시는데요……?”
내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일정으로 당장 계획할 기세였다. 이렇게 되면 거절하는 것도 어려워진다.
‘어쩔 수 없이 한번은 가야 하는 건가.’
나는 머릿속으로 일정을 셈해보다가, 가능하면 거절당하길 바라서 최대한 이른 날짜를 언급했다.
“흠. 사흘 뒤에만 가능하군요. 하지만 아무래도 그때는 너무 이른-”
“가능해요!”
가테 자작 부인이 밝게 웃었다. 나는 예의상 웃고 있던 얼굴 그대로 굳어버렸다.
“정말 좋은 차가 들어왔어요……. 다과도 정말 뛰어난 파티시에를 구해 준비해 놓겠습니다…….”
“……그렇군요.”
“그러니…… 꼭 와주세요…….”
가테 부인은 스르륵 내 손을 놓았다. 그녀는 내 옆의 멜을 보더니 덧붙였다.
“멜 공자님도요.”
그것만이 목적이었다는 듯, 가테 부인은 알테슈메그를 데리고 스르륵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고 보니 이 자리에 가테 자작은 보이지 않았다.
사실 작위를 강등당한 귀족들 대부분이 수여식에는 어쩔 수 없이 참석했지만, 축하 연회에는 얼굴만 비췄다가 금방 떠났기에 드문 일은 아니었다. 다른 귀족들과 오래 말을 섞고 있기 수치스러운 탓이었다.
“무슨 일이래요?”
“가테 자작 부인께서는 그렇게 안 보였는데 꽤 당차시군요.”
주변의 귀족들이 수군거렸다. 워낙 병색이 짙었던 탓에 가테 부인이 큰 목소리를 낸 적도 없건만, 그저 나와 함께 대화를 나눴던 탓에 금방 화두에 올라 있었다.
나는 문득 갑자기 그 시선들이 모조리 불쾌해지고,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멜이 내 어깨에 살짝 뺨을 부비며 말했다.
“세르베인…… 우리도 이만 갈까?”
* * *
언뜻 ‘애첩이 어리광을 부리자 녹시렐 공작이 속절없이 넘어가더라.’라는 말이 들렸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그 말을 무시하고 왕성을 벗어났다.
“세르베인? 어디로 가는 거야? 방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었어?”
얼떨결에 나와 함께 마차에 올라탄 멜이 연신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해진 저녁, 바깥 상점들의 불빛 때문이었을까. 창밖을 바라보는 멜의 뺨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오늘은 성 밖으로 너와 갈 곳이 있거든.”
멜의 귀에 속삭이며 그와 함께 창밖을 바라봤다. 거리는 축제 분위기였다.
광장에서 춤을 추거나 야외 테이블에서 술과 음식을 즐기는 사람들. 아이들은 저마다 손에 자질구레한 장난감을 들고 뛰어다녔다.
왕국의 행사가 있는 날이면 왕실에서 돈과 음식을 베풀었기에 평민들도 축제 분위기를 내곤 했다.
다그닥, 다그닥.
멜은 그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조금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옛 녹시렐 저택을 빠져나올 때 사람이 무섭다고 했었지.’
멜에게는 인간이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만, 인간을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멜.”
“……응?”
“이제 사람을 해치지 말자.”
휙, 다급히 멜이 나를 돌아봤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 나를 탓하려는 거야……? 왜 칭찬해주지 않아?”
“탓하려는 거 아니야. 네게…… 정말로 고마워하고 있어.”
나는 멜의 뺨을 감싸 내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불안해하는 눈꺼풀 위로 연신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그의 몸의 떨림이 가라앉았다.
“사실 내가 생각하던 복수였어. 하지만…… 정작 나는 외면했던 일이었지.”
“…….”
“내가 당했던 일들이 괴로웠기에,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행동을 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렇다고……!”
“맞아, 멜. 하지만 정말로 당사자들에게 아무런 복수도 하지 못했더라면 나는 여전히 지나가는 기사들을 보며 불안했을 거고, 때때로 절벽 아래를 바라보면서 울컥 두려움과 분노에 휩싸였을 거야. 속으로 고통스러워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