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화
공식적으로 녹시렐 공작이 모습을 드러내는 첫 순간이다. 그만큼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네 시간 후 수여식이 시작되니 더 미룰 수 없습니다.”
하녀들은 비장한 얼굴을 하고서 온갖 의상과 액세서리들을 들여왔다. 그나마도 내가 미리 몇 벌 뽑아두었기에 후보가 줄어든 것이다.
그들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멜의 존재를 발견하고 조금 놀란 기색을 보였다. 그가 며칠간 눈을 뜨지 않았다는 걸 내 근처에서 시중을 들던 이들은 알고 있었다.
“……깨어나셨군요. 그렇다면 이전의 계획대로 실행하겠습니다.”
계획이라는 말에 멜은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
나는 멜의 안색을 살피다가 그의 상태가 나빠 보이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공자님은 다른 방에서 치장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세르베인……? 거기는 작위가 있는 귀족들만 참석할 수 있잖아.”
“너는 내 사람인데 당연히 참석할 수 있지.”
사용인들 사이에 휩쓸려 어디론가 이동되는 멜에게 인사했다.
다행히 사용인들은 멜이 몰락한 귀족 가문의 후손이라던가, 밝힐 수 없는 어느 귀족 가문의 영식 정도로 알고 있었기에 멜의 말에 딱히 의아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잠깐은 괜찮을 거야. 그동안 이 성의 사람들이 멜에게 심각하게 홀리는 기색이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멜은 워낙 완성된 미모를 갖고 있기에 나처럼 오랜 시간 고욕을 치르지는 않을 것이다.
약간의 소란이 지나간 이후, 나를 기다리는 온갖 의상과 구두를 포함한 기타 장식품들을 질린 눈으로 바라봤다. 내 반응을 살피던 하녀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미리 준비를 하지 못했던 탓에 시간이 더 오래 걸릴 듯합니다.”
“아니다. 내 탓인데 뭘…….”
그동안 멜의 상태 때문에 경황이 없어 일을 미룬 건 나다.
나는 사용인들에게 알아서 의상을 고르라고 말하려다가 문득 한 드레스에 시선을 빼앗겼다.
기쁘고 호사스러운 날에 입기에는 제법 칙칙한 분위기의 옷이었다.
전체적으로 새까만 드레스였다. 치맛단은 걸을 때마다 검은 깃털들이 흩날리는 듯한 착각이 보일 것처럼 굽이치며 겹겹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너무 칙칙하지 않도록 백금색의 자수가 몸통과 치마 위에 곳곳이 자리잡혀 있었다. 더불어 옷을 장식한 자잘한 블랙 다이아몬드와 화이트 다이아몬드가 밤바다의 부서지는 파도 자락 같았다.
“저걸로 하지.”
“하지만 공작님. 기쁜 날인 만큼 조금 더 밝은 느낌의 드레스를 고르셔도 될 텐데요.”
“하하, 진심으로 축하해줄 이가 몇이나 되겠나.”
그렇지 않아도 귀족들은 나를 녹시렐의 악마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들에게 유약하고 밝게 보일 이유는 없다.
그들은 내가 의견을 굽힐 것 같지 않자 두말 하지 않고 나의 치장을 도왔다. 산호색 머리칼을 늘어트리고, 마치 왕관처럼 보일듯한 머리 장식을 얹었다.
“멜의 의상은 누가 봐도 나의 파트너처럼 보이게 골라줘.”
“알겠습니다.”
순조롭게 진행된 치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났다. 뛰어나게 빨리 끝난 건 아니고 세 시간 만에 끝났다.
몇 번이나 치맛단을 밟지 않게, 머리 장식을 흐트러뜨리지 않게, 쇄골과 어깨를 휘감은 장식들을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받은 뒤 드디어 혼자 남게 되었다.
녹초가 되어 의자 위에 잠시 쓰러지듯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런데 깜빡 잠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내 입술에 닿는 익숙한 감각을 느끼며 눈을 떴다.
“멜?”
“데리러 왔어, 세르베인,”
멜은 내 화장이 망가질까 염려한 탓인지 입술을 가볍게만 맞췄다가 멀어졌다. 하지만 멜의 입술에 조금 묻어나온 립스틱이 꽤 자극적이었다.
그가 이후에도 내게 계속 뭐라고 말한 것 같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손을 뻗어 멜의 입술에 묻은 립스틱을 엄지로 조금 훑었다.
“아…… 묻었어? 조심하느라 살짝 입 맞췄는데.”
멜이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깐 채 조금 수줍게 웃었다.
그 모습에 덜컥,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내 눈 속으로 뛰어드는 것 같았다.
“멜. 나 눈이 안 보이는 것 같아.”
“어……? 의, 의사를 불러와야……!”
“네가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푸핫, 웃으며 그의 양 뺨을 두 손으로 감싸 끌어왔다.
그제서야 멜은 안심한 듯 표정을 풀었다. 하지만 내 말을 조금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가 내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농담도 참. 세르베인, 네가 훨씬 더 아름다워. 천사 같아.”
글……쎄. 나를 치장해주던 사용인들은 하나같이 ‘모두가 공작님을 두려워할 거예요!’라고 하던데.
나는 멜이 콩깍지를 가볍게 넘겨버렸다. 그런 것쯤이야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나저나 조금 걱정스러운데…….’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예쁜 멜을 여러 사람들 앞에 보일 걸 생각하니 속이 들끓었다.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멜은 어느새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내 앞에 앉아 웃었다.
곧 작위 수여식이라는 상황을 몰랐다면 청혼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일 모습이었다.
“제가 당신을 에스코트해도 될까요?”
그간의 배운 지식을 사용해보는 멜이 사랑스러웠다.
나는 그의 손에 내 손을 포개며 웃었다.
“얼마든지요.”
* * *
수여식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번영의 홀을 가득 메우는, 신성 왕국 시절 강제로 폐기당했던 즈레이카 왕실의 대표곡이 내 머릿속을 채웠다.
저벅저벅.
나는 귀족들 사이로 난 붉은 융단 길을 걸어 단상 위의 프로셴 앞에 도착했다.
내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자, 기사들이 내 어깨에 망토를 둘렀다.
차륵.
프로셴이 녹시렐 가문의 증표를 내 목에 걸어주었다.
수여식을 위해 미리 그에게 맡겨둔 것이었다.
“세르베인 라헨 녹시렐.”
여태껏 왕으로서의 위엄이 보이지 않는다며 구박한 것이 무색하게도 프로셴은 완벽하게 왕족 특유의 위엄이 묻어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대를 즈레이카 왕국을 재건한 최고의 공신으로, 왕국과 존폐를 함께 했던 고귀한 녹시렐 공작 가문의 하나뿐인 계승자임을 인정한다.”
그는 마지막 의례를 위해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가벼운 입맞춤이 떨어지던 순간, 프로셴이 작게 속삭였다.
“고마워. 이젠 내가 너의 헌신에 보답할게.”
조금 놀라서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한바탕 열병을 앓고 난 소년처럼, 이제는 어딘가 성숙해진 얼굴을 하고서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이 머릿속에 진하게 남았다. 나는 미나엘의 차례를 기다리며 멜의 곁으로 다가갔다.
다른 귀족들이 융단으로 만든 길을 가운데에 두고 모여 있는 것과 달리, 그는 내가 대기할 번영의 홀 단상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축하해, 세르베인.”
싱긋 웃으며 멜이 내 머리칼을 뒤로 넘겨줬다. 나는 그가 은근슬쩍 엄지로 내 이마를 살짝 문지르는 것을 느꼈다.
그 뻔한 의도를 느끼며 나는 웃어버렸다. 다른 귀족들에게 보란 듯이 멜의 손을 꽉 잡고 미나엘을 바라봤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블미에 미나엘 헥사바임.”
“……?”
여태껏 미나엘의 미들 네임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어차피 가명일 테니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본명인 블미에를 미들 네임으로 사용했구나.
그 순간 나는 퍼뜩, 미처 간과했던 점을 깨달았다.
‘프로셴이 이름을 잘못 부른 것 같은데……? 미나엘 블미에 헥사바임이라고 해야 하지 않나?’
너무 긴장한 나머지 미들 네임을 가장 먼저 언급한 것 같았다.
이런 날에도 대형 사고를 치다니 프로셴 답다고 해야 할까.
내가 당황한 얼굴로 미나엘의 얼굴을 살피는데 그녀는 뜻밖에도 의연했다.
그 이름에 틀린 게 없다는 것처럼.
* * *
작위 수여식이 끝난 후, 축하 연회가 진행됐다. 나는 미나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주변에서 나를 가만히 두질 않았다.
“축하드립니다, 공작님. 혹시 저를 기억하시나요?”
“익히 명성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존경하고 있습니다.”
“왕국의 새 역사가 시작되는 날이군요. 아, 제 소개를 안 했군요. 저는-.”
나와 안면을 트려는 귀족들의 무수한 인사가 쏟아졌다. 그들은 일단 예의상 프로셴에게 먼저 안면 도장을 찍은 후 내게 다가왔지만, 어째 아부의 정도는 내게 하는 정도가 더 심해 보였다.
‘사실 예상하기는 했지.’
이미 어떻게 반응할지 머릿속으로 몇 번 떠올려봤던 상황이라 곤란하지도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모든 반응들이 곧 내 성공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게다가 나도 사람인지라 앞에서도 녹시렐의 악마라며 수군거림을 당하는 것보다는 가식이라도 친절한 대우가 더 좋았다.
“그래. 반갑군. 왕국을 다시 일으키는 데에 그대의 도움도 있었어.”
적당히 공을 인정해주며 표면상으로는 친밀한 관계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예상했지만, 사실 바라지는 않았던 질문이 등장했다.
“그런데 공작님 옆의 분은 혹시 어느 가문의 자제분이십니까? 무척 미남이십니다.”
멜이 미남이라는 점은 순수한 감탄이겠지. 하지만 어쨌거나 대놓고 출신 가문을 물어보는 무례를 무마하기 위한 말로 쓰였다는 걸 아니 조금 불쾌했다.
“…….”
멜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콧대 높은 귀족들은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안색이 미묘하게 서슬 퍼레졌지만 내 앞에서 감히 티 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멜이 그들의 예상처럼 콧대 높아 모든 말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자신이 귀족이 아니라는 걸 말했다가는 내가 곤란해지리라 생각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야.’
하지만 굳이 멜의 신분을 귀족으로 위조하지 않은 것도 나다. 나는 멜의 출신 성분을 묻는 귀족에게 말했다.
“출신이 중요한가? 현재 내 곁에 있을 정도로 그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것이 중요하지.”
내 말을 들은 귀족들의 표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능력? 뭐…… 외모도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죠.’라며 미묘하게 비웃는 기색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