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화
예전에 미나엘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의아하게만 생각했던 말이었다.
‘나는 너를 만난 후 죽어 가는 과정에 가까워지는 걸지도 모르겠어.’
그게 이 의미였던 거다. 나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계속 살아왔던 거다.
“미안해. 나 때문에…… 죽지 못했던 거잖아.”
웃음이 뚝 멈추었다. 미나엘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사과할 이유는 없다. 일단 처음 살해당했던 시점에는 죽고 싶지 않았거든. 오히려 다시 살아나서 다행이라 생각했지.”
“…….”
“다만 나중에는 지겨워져서 살기 싫었던 거다. 지금은 다르다.”
“…….”
“나는 지금 매우 즐거우니까.”
하긴. 이제는 고생할 일이 끝났으니까. 권력을 즐길 일만 남았다.
“다행이네. 이제는 힘든 일에 휘말리지 말고 오래오래 번영을 누리면서 살자고.”
우리의 앞날에 대한 덕담을 하며 미나엘을 격려했다. 하지만 미나엘은 묘하게 눈치 없는 사람을 힐난하듯이 나를 바라봤다.
내가 뭔가 상황에 부적절한 반응을 보인 건가……?
어색하게 속으로 문제를 파악하고 있는데 문득 미나엘이 기억났다는 듯이 이야기를 꺼냈다.
“참. 나는 과거의 얘기나 하자고 이 주제를 언급한 게 아니다.”
“아, 그랬지.”
“내 사례처럼, 이런 알 수 없는 능력도 사람을 너무 많이 죽이면 사라진다. 그러니 너는 자제하는 게 좋아.”
“내가 무슨 능력이 있……었네.”
저번에 바다에 빠진 이후, 물 근처로 가지도 않았기에 잠시 잊고 있었다. 나는 물에서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것도 그것에 포함되는가?
꽤 놀라운 능력이긴 하지만…… 알테슈메그와 미나엘의 능력에 비하면 매우 하찮았다.
“넌 바다에게 미움을 받으니 그 능력이 쓸만할 테지. 그리고 그 인어 말인데.”
“응……?”
“인어는 그런 짓을 저질러도 아무런 대가가 없는 건가?”
그 말에 잠시 생각이 멈추었다. 갑작스레 소름이 돋듯, 불길함이 뻗쳐온 까닭이었다.
‘손에 많은 피를 묻힌 대가가 단순히 인간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면 어떡하지?’
어젯밤 이후, 멜은 식사를 시작했다. 체온 역시 인간처럼 따뜻해졌다.
하지만 그저 인간이 되는 것이 그 행위에 대한 대가라고 결론을 내리기에는…… 바다가 보여준 과거가 신경 쓰였다.
바다에 의하면 과거, 순수했던 멜은 타인을 해치기도 전에 다리를 가졌었다.
멜이 저지른 죄의 대가가 단순히 인간의 형체를 갖게 하는 건 아닐 수도 있었다.
‘멜에게 물어봐야겠어. 그렇게 해도 괜찮은 건지.’
미나엘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알테슈메그를 심문해 얻은 정보가 여기까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일단…… 그건 확신하지 못하겠어. 내가 멜에게 물어보도록 할게.”
나는 서둘러 미나엘과의 대화를 끝냈다. 마음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던 탓이었다.
업무에 집중하지도 못했다. 당장 곧 있으면 작위 수여식이고 할 일이 산더미인데도 그랬다.
‘일단 물어보긴 할 거지만, 멜은 대답해주지 않을 것 같아.’
그리고 예상대로, 멜은 여태껏 나의 질문들을 회피했듯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세르베인. 나……는 수업을 들으러 가야 해. 나중에 봐……!”
내게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명백히 피하는 기색이었다. 오죽하면 평소에는 가기 싫다고 티를 팍팍 내던 헤론시와의 수업을 핑계 삼아 나를 떠나겠는가.
“……멜이 저렇게나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데 모르는 척해주는 게 좋은 것 아닐까?”
멜을 순순히 보내주며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나와 함께 있는 멜은 아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건강하게 오래도록 내 곁에만 있어 주면 되는 게 아니던가.
그 외에는 사실 어떤 문제가 생겨도 상관이 없었다.
설령 멜이 그 행위의 대가로 불안한 정신을 갖게 된다고 해도, 혹은 아름다운 미모를 잃는다고 해도, 갑자기 인간의 다리를 잃는다고 해도, 가지고 있던 신비한 능력들이 사라진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그를 내 곁에 둘 것이며 내 감정은 변하지 않는다.
툭툭.
초조하게 탁자를 두드리다가 나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를 제외하면 헤론시가 멜과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지. 그러니 그에게 멜에게서 혹시 아픈 기색이 보이지 않았는지 물어봐야겠어.’
다른 것들은 다 괜찮지만, 그의 몸 상태에 대해서는 안일하게 넘어갈 수 없다.
결심을 굳힌 후 나는 멜과 수업 중일 헤론시를 찾아갔다.
똑똑.
“들어오십시오.”
이미 수업 도중 나의 난입을 여러 번 겪은 탓일까. 문을 열자 이제는 놀란 기색도 없이 온화한 얼굴의 헤론시를 볼 수 있었다.
“또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 미안하군.”
“아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괜찮습니다.”
“……내가 올 걸 예상이라도 한 건가?”
“왜냐하면 멜 공자가 갑자기 문에서 눈을 떼지 못하더라고요.”
멜은 내가 반가우면서도 조금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보였다. 방금 전, 그가 내게서 도망치기 위해 이곳으로 향했던 탓인 것 같았다.
어쨌든 그 반응을 보고서 헤론시는 일찌감치 수업 자료를 정리한 모양이었다. 늘 그랬듯 내가 멜을 데려갈 것이라고 확신을 지은 모양이지.
그걸 보니 굉장히 멋쩍어져서 나는 괜히 큼큼, 헛기침을 하다가 멜에게 말했다.
“멜. 잠시만 기다려줘. 헤론시 공과 할 말이 있어.”
“……어?”
멜의 얼굴이 굳어갔다. 안절부절못하던 기색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어째서인지 그와 동시에 헤론시의 얼굴로 시퍼렇게 생기를 잃었다. 그는 멜의 눈치를 힐끗힐끗 살피다가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제게 무슨 용건이 있으신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나가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여기서 이야기를 나누면 안 될까요?”
헤론시가 애절하게 나를 바라봤지만 들어줄 의향이 없었다.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데 울망울망한 눈의 멜이 고개를 푹 숙이는 게 눈에 밟혔다.
결국 그 앞에서 머뭇거리던 나는 가볍게 멜의 뺨에 뽀뽀했다.
쪽!
“금방 다녀올게. 별 이야기 아니야.”
그러자 멜이 고개를 들어 ‘그렇다면 왜 나가서 이야기하는 건데.’라고 묻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나는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달칵.
문이 닫히고, 나는 헤론시와 잠시 복도를 걸었다. 웬만한 거리에서는 멜이 우리의 대화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한 탓이었다.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지자 나는 걸음을 멈췄다. 내 뒤를 따라오던 헤론시 역시 자연스레 걸음을 멈추었다.
그 순간, 헤론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 저도 공작님께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뭐지?”
“멜 공자에게 이제 더 수업이 필요할 것 같지 않습니다.”
나는 창가에 기대어 헤론시를 바라봤다. 눈빛만 보고도 이유를 묻는다는 걸 눈치챈 그가 설명했다.
“일단 공작님께서는 제게 그분에게 학문적 지식이 아닌 상식적 내용을 가르치길 바라셨죠.”
“그렇지.”
“그 내용을 가르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또한 멜 공자는 모든 것을 한 번에 익힙니다.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적 기억력입니다.”
“…….”
“이미 저는 그분께 인간 사회의 관습을 다 가르쳤습니다. 더는 가르칠 게 없어요.”
그런가. 납득하려 했지만 나는 바로 며칠 전, 그가 여전히 생감자를 쥔 채 내게 요리를 해주려 했던 모습을 기억한다.
“하지만 여전히 요리에-.”
“그쪽은 확고한 신념이 있으셔서 제가 감히 건들지 못했습니다. 여러 요리책을 보여드렸지만, 고유의 레시피를 가지고 계신지 워낙 확신에 차 계셔서 말이죠……”
식은땀을 흘리는 헤론시의 모습에서 그간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멜의 요리에 대해서는 헤론시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없는 듯했다.
‘일단 새 저택에는 요리사부터 고용한 후에 입주해야겠어.’
나는 멜을 주방에서 떼어놓기 위한 계획들을 속으로 헤아리다가 겉으로는 덤덤한 척 말했다.
“그래. 알겠다. 그동안 수고가 많았어.”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요리 쪽 상식은 잘 전해드리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아니네. 그리고 어차피 작위 수여식이 진행되면 왕성을 나갈 예정이었으니 그대와의 수업도 끝날 예정이었어.”
“……일주일도 남지 않았군요.”
“그래.”
안 그런 척하지만 헤론시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이제는 멜의 스승 역할도 사라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이 왕성에서 맡을 업무가 또 무엇이 있겠는가.
‘쫓겨날까 봐 두려운 건가.’
그의 처분은 전적으로 프로셴에게 달려있다.
최근의 프로셴은 나만 보면 덜덜 떨리는 눈동자를 하고서 ‘세, 세르베인! 좋은 아침이야! 작위 수여식은 잘 진행되고 있어! 내일 봐!’ 같은 말들을 연달아 던진 뒤 도망쳤다.
그도 민망할 테니 조금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이해했다.
‘즉 내가 중간에서 조율하기 좋은 상황은 아니란 거지.’
다만 한가지 확신하는 건, 프로셴에게서 당장 헤론시를 내칠 것 같은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걸 이야기해줄지 고민하는 사이에 헤론시가 입을 열었다.
“저…… 가테 백작 가문이 자작 가문으로 강등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 그건 현재 굉장히 화제가 되고 있는 사안이었다. 그 역시 소문을 들은 모양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워서 놀라고, 사정을 아는 입장에서는 너무 유한 처벌이라 놀랄 일이었지.’
당초에 우리는 가테 가문을 남작 가문이나 평민으로 강등시키려 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가테 백작 가문은 교황파에서 국왕파로 넘어온 대표적 가문 중 하나였고, 그런 가문을 내치려면 명분을 확실히 밝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귀족들 사이의 여론이 불안해질 테니.
‘하지만 신성력의 존재를 알리는 건 오히려 우리 쪽에 곤란했지.’
그 탓에 애매하게 해석 가능한 죄목들을 모아서 고작 자작 가문으로 강등시키는 것이 최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