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화
어쨌거나 거만한 녹시렐 공작의 딸다웠다. 애초에 생긴 것도 공작과 판박이였다.
물론 제 아비를 미워하는 것으로 유명한 눈앞의 아가씨가 이 말을 들으면 발악을 하겠지만 세르베인 녹시렐은 녹시렐 공작이 자가 분열이라도 해서 낳은 자식 같았다.
“진료하겠습니다.”
“…….”
제 겉모습만 보고 반항하는 환자는 숱하게 만나왔다.
다행히 몸이 약한 탓에 녹시렐 가문의 꼬마 아가씨는 신체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 말로만 불평하는 환자를 다루는 건 케이크 먹기보다 쉬웠다.
블미에는 능숙하게 세르베인을 진료하며 결론을 내렸다.
‘또래보다 훨씬 약한 면역력, 심폐 능력, 체력, 근력, 등……’
현재의 의술로 명확히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병이 아니었다.
그저 몸의 내구력이 지나치게 떨어졌다.
말하자면, 단명하기 위해 태어난 몸이라고 봐야 했다.
“…….”
블미에는 침대에 누워있는 세르베인을 사무적으로 바라봤다. 눈을 뜨고 있는 것도 힘든지 그 아이는 이제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녹시렐 가에서 주는 의뢰금을 생각하면 1년 정도만 살려두도록 할까.’
그녀는 딱히 사람에게 애정을 느껴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게 아니었다. 제 능력을 표나지 않게 사용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기에 선택한 것뿐이었다.
……어차피 세르베인 녹시렐의 상태는 제가 원한다고 치료를 해줄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모든 힘을 쏟아부어도 간신히 목숨만 유지할 수 있겠군.’
원래라면 이런 거대 귀족 가문의 의뢰 따위는 제 능력이 부족하다는 거짓말을 하며 거절했을 것이다.
‘괜히 권세 있는 가문에 메여있으면 화만 부른다.’ 그것이 블미에의 신조였다.
당장은 돈이 급해 얽혔지만, 되도록 녹시렐 공작 가문과 깊게 연관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현재 즈레이카 왕국 내부의 권력 흐름은 상당히 불안정했으니까.
어느 한 가문이 하루아침에 망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공작 가문이 그렇게 망하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이 여자애를 평생 동안 돌봐줄 이유는 없다.’
오래 살려둔다고 해도 저 몸의 수명은 15세 정도가 한계로 보였다. 물론 블미에는 그 나이까지 세르베인 녹시렐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블미에 헥사바임은 그날 계획했던 것들 중 어느 것도 이루지 못했다.
한계라고 생각했던 15세의 나이까지도 세르베인 녹시렐의 곁에 있었다.
‘제가 말했죠. 최선을 다해 보겠다고.’
‘……그랬지.’
‘죽게 두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살아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 여자애를 조금 더 살려두기 위해 어지간히도 노력했었다. 단순히 제 능력을 사용한 것이 다가 아니었다.
몇 날 밤을 새워가며 그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새로운 치료법을 연구했었다. 그 당사자는 평생 모르겠지만.
덕분에 거의 100년 이상이 흐른 지금까지도 밤을 새는 것이 익숙해져 버렸다.
‘실례일 걸 알지만 돈 때문에 의사를 하게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어.’
‘금전적 사례는 지금 받고 있는 진료비로 충분합니다.’
‘거절하지 마.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 그래. ……이것도 너무 늦으면 불가능할 수도 있어.’
‘정말로 괜찮습니다. 정말 보답을 하고 싶으시다면 조금 더 살려고 노력을 하세요.’
분명히 처음에는 돈 때문에 이 일을 받아들였던 주제에, 나중에는 주겠다는 보상까지 거절했다. 소위 배가 부른 짓이라고 하고, 제 머리로 생각하기에는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더라도, 설령 제가 당장 굶어 죽기 직전이라고 할지라도 그 돈은 받지 않을 걸 알았다.
돈 때문에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바람 앞의 등잔처럼 위태로운 녹시렐 가문의 상황을 알았지만 떠나지 못했다.
심지어 그 가문이 망하는 날까지도.
처음 녹시렐 가문에 발을 들였던 시점의 블미에 헥사바임은 감히 가정하지도 않았던 일들이었다.
“한 사람을 너무 오랫동안 지켜봐서 그런 건가.”
모든 것을 잃은 지금, 언제부터 제 다짐이 흔들렸는지 떠올려보았다.
처음의 1년. 거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패악질을 부리든, 힘에 겨워 눈을 감고 있든, 방관하듯 지켜본 시간이 자그마치 1년이었다.
여태껏 단기간에 환자들을 치료하고 바로 떠났던 블미에에게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처절함과 무력함이 공존하는 생명체. 제 손으로 얼마든지 숨을 끊어놓고, 혹은 계속 살려둘 수 있는 존재.
결국 속으로 계획을 세웠던 1년이 흘렀지만 살려둘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그것은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이상 내면에 존재할 수밖에 없던 생명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관성적으로 현재 행위를 유지하며 더 시간이 흐른 뒤에는-.
“이름이 뭐야?”
저와는 상관없이 평면적 텍스트 상에 존재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여겼던 인물이 제 현실에 손을 뻗어왔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니……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것 같아서…….”
그 접근. 별것 아닌 사소한 태도의 변화가 블미에 헥사바임에게는 꽤 충격적이었다.
단순하고, 본인은 별생각 없이 꺼냈을 상투적인 질문 하나가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외로움과 다른 존재와의 교류의 필요성을 일깨웠으며, 사회적인 존재로서 살아가는 인간이란 정의를 제 속으로 참이라고 결론 내리게 되었으니까.
“블미에 헥사바임. 블미에라 부르셔도 되고, 헥사바임이라 부르셔도 됩니다.”
그 탓이었을 것이다. 그 처음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후에 욕심으로 심화되어 상대에게도 자신의 존재가 각인되기를 바라게 되고야 말았다.
“네가 나를 특별하게 생각할 일은 없는데 말이지. 너는 그 멜이라는 인어에 정신이 팔려 진통제만 달라고 했던 미련한 인간이니까.”
녹시렐 가문은 멸망했다. 그와 관련된 인물이라면 모조리 붙잡혀 ‘녹시렐의 증표’에 대해 추궁당하다가 죽임당했다.
귀족이라고 해봤자 한미한 남작가의 여식이었던 저 역시 그 그물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오히려 헥사바임 가문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저를 팔아넘겼다.
“블미에 헥사바임으로 사는 건 이제 그만둬야겠어.”
몇 번이나 시체들 틈에서 일어났다. 원인도 알 수 없는 부활이었다.
그러니 어차피 새로운 이름을 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별 의미도 없이 지어내면 그만일 가명이었다. 어차피 앞으로도 몇 번이나 바꿔야 할 수 있는 이름이니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게 효율적일 테다. 그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왜 굳이 신중하게 그런 이름을 지었던가.
“미나엘로 해야겠어.”
어찌 발음하면 네가 고통 속에서도 신음처럼 중얼거리던 그 이름과 울림이 비슷하게 느껴지지 않겠는가. 따위의 기대를 하며.
* * *
“내가 사람을 치료하는 능력을 잃은 건…… 아마 너의 가문이 몰락한 지 30년 정도가 지났던 시점이겠군.”
미나엘은 직접적으로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충분히 이유를 짐작했다.
사람을 너무 많이 죽인 탓이다. 정확한 임계점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그 선에 다다르자 사람을 치료하는 능력이 사라진 것이다.
마치 알테슈메그가 말한 신성력이 사라지는 원리처럼.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나는 그동안 그녀의 눈치를 살피느라 묻지 않았던 것을 언급했다.
“네 나이는 어째서 멈추었던 거지? 사실 나도 조금 짐작 가는 건 있었어.”
“나는 전혀 이유를 짐작할 수 없는데 흥미롭군.”
“조금 이야기가 길어. 기억해? 옛날에, 녹시렐 가문에서 일할 때 나의 삼촌에 대해 너도 이야기를 들었을 거야.”
나의 삼촌이자 오빠인 라헨. 그는 내게 목걸이를 돌려줄 것이라 했고, 나 역시 받겠노라고 죽기 전에 약속을 했었다.
멜은 내게 약속을 지키라는 소원을 빌었고, 그 탓에 나와 약속으로 엮인 모든 이들이 영향을 받았다.
“멜의 마법이라고 생각해. 라헨은 나와 약속한 것이 있었기에, 그것을 이루지 못해 그 나이까지도 살아있었던 거야.”
그는 거의 100세까지 장수했고, 그건 더 사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희귀한 일이다.
“너와도 한 약속이 있으니까. 너도 기억하다시피 나는 너를 구하겠다고 했지. 다만……”
미나엘도 나와의 약속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라헨에게는 노화가 진행됐었다.
‘어째서 미나엘은 늙지 않은 거지?’
내가 끝맺지 못한 말이 무엇인지 미나엘은 짐작한 것 같았다.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기억을 더듬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군. 대충 너와 관련이 있을 줄은 예상했다만……”
“…….”
“내 나이는 네 가문이 몰락한 후 5년 후부터 멈췄다고 추정한다.”
“……짐작 가는 이유 있어?”
“글쎄. 원인은 모른다. 다만 그 시점의 특이점은 있지.”
“…….”
“나는 그때 처음 살해당했다. 그때는 마녀가 아니라 네 가문과 얽혀서 참수를 당했었는데 눈을 떠보니 시체들 틈에 있더군.”
할 말을 잃었다. 그 당시, 녹시렐 가문과 연관이 있는 자라면 상당히 곤란한 일을 겪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정도의 탄압이 있을 줄은 몰랐다.
내 안색이 딱딱히 굳어져 있는 것을 보고서, 미나엘은 부러 웃음기 있는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렇게나 자주 죽는 일은 없었다. 나중에는 내가 그들을 죽이는 편이었지.”
“…….”
“아무튼 너와 다시 재회할 시점에는 왜 순순히 갇혀 있었냐면…… 마녀사냥은 조금 특수한 방법으로 진행되니까. 그 방식을 취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웠거든. 당시에는 사는 게 꽤 지겨워서 말이지.”
미나엘은 시종일관 농담을 하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평소에 미나엘은 잘 웃지 않았기에. 더군다나 웃으면서 꺼낸 그 말들이 결코 웃을만한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모습에 더 괴리감이 느껴졌다.
“너를 만난 건 굉장히 놀라웠지. 넌 놀랍게도 내가 알던 ‘세르베인 녹시렐’과 똑같았고, 이름 역시 같았으니.”
“그 순간 어떤 확신이 들더군. 내가 죽지 못한 이유가 너와 관련되어 있고, 내 죽음을 네가 이뤄줄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