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화
바닥에 널브러진 인어는 여전히 머뭇거리며 멜의 눈치를 살폈다.
적당히 눈치를 봐서 상황을 모면하려는 기색을 보자 멜은 심기가 뒤틀렸다.
“순순히 대답하기 싫어?”
멜의 심해 같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인어는 반사적으로 진실을 말했다.
“그건 그 여자의 시체가 바다로 떨어졌으니까……! 그걸 보고 따라 했을 뿐이야!”
“……뭐?”
“그걸 이어 붙이면 원래 모습이 어땠는지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아! 옷도 그래. 디자인만 똑같지, 재질은 바다 생물의 점액질을 굳혀 내가 만든 거라 그 여자의 옷이 아니야.”
그래서 성인 남성의 꼴로 돌아왔음에도 옷이 찢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멜은 옷의 소재 따위 궁금하지 않았다.
멜은 조금 어지럽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한순간 흔들리는 착각을 느낀 탓에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도대체 뭘…… 이어 붙인다는 건데.”
“왜 당연한 걸 물어?”
“…….”
“시신을 말하잖아.”
흩어지는 정신을 애써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았다.
멜이 비틀거리며 간신히 이성을 유지하는 사이, 인어는 눈치를 살피다 도망칠 준비를 했다.
“내, 내가 할 말은 끝났어. 너는 바다로 돌아와야 해.”
“기다려. 누가…… 누가 무슨 짓을…….”
“역시 제정신이 아니군! 너 말이다, 오래 살고 싶으면 내 충고를 허투루 듣지 않는 게-”
“누가 했냐고 묻잖아!!”
멜이 소리를 지르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간발의 차로 인어는 그 범위에서 벗어나 도망쳤다.
털썩.
목표물을 놓친 멜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식은땀인지 바닷물인지 알 수 없는 액체가 옷을 적셔왔다.
그는 세르베인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정확히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최후가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도 혼자 이렇게 지레짐작했었다.
‘어차피 녹시렐 가문을 몰락시키는 것만이 목적이었을 테니까. 네가…… 너무 끔찍한 고통을 겪지는 않았을 거야.’
왜냐하면 그 누구도 제게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세르베인 본인조차도.
하지만 진실을 알게 된 그 날부터 멜은 이전과 같이 안일한 삶을 살 수 없었다.
내키는 대로 긍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널 아프게 하는 것들은 이 세상에 없어져야 해.”
그날부터 쭉, 복수를 계획했었다.
매 순간, 세르베인의 곁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는 얼굴을 해도 내장은 녹아내리는 듯했다.
네가 너무 안타까워서, 그럼에도 내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비참하고 슬프면서도 참 너답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저 너의 내쉬는 숨 한 조각, 한 조각이 너무 소중했다.
그리고 드디어 이뤄냈다.
멜의 맞은편 좌석은 비어있었다. 세르베인은 미나엘을 만나러 떠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멜은 상대방이 맞은 편에 있는 것처럼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내가 해냈어, 세르베인! 네가 칭찬해줬다면 좋을 텐데…… 왜 나를 추궁하는 기색이야?”
인어는 목표를 달성했다.
제 사랑의 죽음에 일조한 모든 가문의 핵심 인자들을 몰살했다.
제 사랑이 느꼈던 고통을 똑같이 돌려주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 내가 또 뭘-, 아…….”
울컥, 뱃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었다. 멜은 홀로 정원에 남아 고통을 참아냈다.
“우욱…… 웩…….”
정원 바닥에 쏟아진 액체는 짙은 붉은 색이었다.
잔디 위에 쏟아진 액체를 멍하니 쳐다봤다.
그것에서는 일반적인 피와 달리 바다의 냄새가 났다.
“……나는 더 바라는 게 없어. 그러니 괜찮아.”
네 곁에서 맞이하는 끝은 행복하게 내 눈을 감겨줄 것이다.
그러니 당장 내일 내가 사라진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아.
* * *
이미 예상했지만, 미나엘은 역시나 멜이 저지른 일 때문에 나를 부른 것이 맞았다.
“인어가 저지르고 네가 뒤늦게 뒤처리를 한 거다. 내 말이 틀린가?”
뭐라 거짓말을 꾸며낼 틈도 없이 그녀는 단숨에 진실을 짚어냈다.
나는 속으로 불안해졌다. 미나엘은 저택에서 멜이 무엇을 먹었는지 알게 된 뒤,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지 않았나.
이번 일 역시 그럴지도 몰랐다. 멜이 사람을 너무 잔혹하게 죽였으니까.
“……맞아. 그런데 나를 위해 복수를 한 거야. 그러니까-.”
“어차피 나 역시 숨을 끊어놓으라는 의미로 네게 넘긴 명단이지 않았나.”
“어……?”
“왜 변명을 하는 거지? 내가 그걸로 인어를 탓할 줄 알았나?”
이……거는 괜찮다는 건가?
나는 미나엘의 가치 판단의 기준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찌 됐건 이걸로 멜을 문제 삼지 않는다면 다행이었다.
나는 한시름 놓았다는 얼굴을 하다가 문득 의아해졌다.
“아니라면 다행이네. 그러면 나는 왜 부른 거야? 그냥 사실 확인만 하려고?”
“그건 아니다. 할 말이 길어.”
미나엘은 천천히 테이블을 손가락 끝으로 두드렸다.
툭툭, 규칙적인 소리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나는 미나엘을 재촉하지 않았다. 거의 10분 동안 그 손가락 소리를 듣고 있었을까.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알테슈메그 가테.”
그 남자가 갑자기 왜 등장하는 거지? 의아했지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미나엘이 말했다.
“그 남자가 말했지. 너무 많은 피를 묻히면 능력이 사라질 수도 있다고. 사실 그게 비단 신성력의 문제인지는 모르겠다.”
“……무슨 의미야?”
“사실은 내게도 그런 능력이 있었다. 나는 신을 믿지 않으니, 그게 신성력이라 말하지는 않겠어.”
갑작스러운 고백에 잠시 생각이 멈추었다. 하지만 빠르게 이성을 되찾았다.
이미 인어, 신성력, 등 온갖 비현실적인 일들을 겪지 않았던가.
무엇 하나가 추가되더라도 놀랍지 않았다.
다만 미나엘의 말에서 한 가지 걸리는 점을 짚어냈다.
“‘있었다.’라고 말하는 건 지금은 없다는 뜻인가?”
“그래.”
미나엘은 아주 먼 과거를 회상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마도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인 탓에.”
* * *
미나엘은 처음 녹시렐 공작가에 방문했던 날을 떠올렸다.
고풍스럽지만 지나치게 조용하고 음침하던 저택. 저주받은 저택처럼 생긴 외관과 어울리지 않던 정원의 수선화들.
저택 주변에 숲과 바다와 꽃밭이 있는데 이런 우중충한 분위기라니.
그것도 일종의 능력이라는 생각을 하며 저택 안으로 발을 들였었다.
“내 딸보다 고작 5살 정도 많다고 들었다.”
“예, 그렇습니다.”
“어린 귀족 영애가 의사라니. 솔직히 능력을 신뢰할 수 없군.”
당시 블미에 헥사바임은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믿을 수 없으면 부르지를 말든가.’라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 시점에서 블미에 헥사바임이 녹시렐 공작의 태도를 비웃을 이유는 충분했다.
온갖 의사들을 수소문해 불러들였음에도 녹시렐 가문의 외동딸이 시한부 신세를 면치 못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절박하게 저를 찾은 주제에 녹시렐의 가주는 안 그런 척, 여전히 콧대 높게 굴었다.
‘하긴. 평생 저렇게 살아왔으니 어쩔 수 없는 건가.’
하지만 이쪽도 아쉬운 처지긴 했다.
태도를 문제 삼으며 의뢰를 거절할 상황이 아니었다.
자신은 헥사바임 가문을 나와 홀로 살아가면서 돈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공작님께서도 저의 소문을 듣고 저를 부르신 것 아닙니까?”
“…….”
“그 젊은 여자 의사가 죽을 날만 기다리던 병자들을 살려놓았다더라. 그 수가 한두 명이 아니라더라. 그런 말들을 들으셨을 텐데요.”
“그딴 헛소문이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
“한 마디만 드리죠.”
고작 15세. 성인도 되지 않았던 나이에 블미에 헥사바임은 확신했다.
이 왕국에서 자신보다 더 뛰어난 의사는 없다.
그건 남들보다 뛰어난 의술 실력에 근거한 것도, 자는 시간도 줄여가며 공부한 방대한 지식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제게는 사람을 치료하는 힘이 있었다.
회색 머리칼을 의사는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헛소문이 아닙니다.”
홍채의 색깔마저 옅은 회색인 탓일지도 몰랐다. 젊은 의사는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음에도 시선이 엇나가는 듯, 섬뜩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때 녹시렐 공작은 제 앞에 선 이가 고작 성인도 되지 않은 철없는 귀족 아가씨가 아님을 직감했다.
“……그대에게 내 딸의 치료를 맡기기로 하지.”
“감사합니다.”
“다만 내 딸은 나와 달리 성격이 여리니 그대가 친구 역할도 해주면 좋겠군.”
글쎄. 블미에 헥사바임은 무심하게 그 말을 무시하면서도 약간의 가능성은 남겨두기로 했다.
‘뭐든지 1%의 가능성은 남겨두는 편이 좋겠지.’
하지만 예상대로 녹시렐 가문의 어린 딸은 성격이 좋지 않았다.
“의사가 맞긴 한 건가? 나이가 너무 어리군.”
“예. 아가씨보다 다섯 살이 많습니다.”
“즈레이카 왕국의 모든 의사들이 죽기라도 했나 보군. 자네가 온 걸 보면.”
제 예상과 유일하게 다른 점이라고는 10살 답지 않은 독설뿐이었다.
세르베인 녹시렐은 어린아이 답지 않게 무표정한 얼굴에 무감각한 어조로 똑바른 발음을 구사했다. 비록 그 말이 독설이라는 게 문제지만.
하지만 블미에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감정에 가까웠다.
‘어린 나이’에 ‘병약한 몸’을 가진, ‘정신병’으로 유명한 ‘녹시렐 공작 가문’의 ‘하나뿐인 딸’이다.
더군다나 귀족들 사이에도 유명한 ‘기이한 관계의 녹시렐 공작 부부’의 딸.
저 정도 성격을 예상하지 못한다면 그게 더 멍청한 것이다.
‘덤으로 녹시렐 공작의 사람 보는 눈 역시 멀었다고 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