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 화 (105/132)

105 화

나는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장소를 옮기기로 했다.

우리는 전혀 구석지지 않은 정원의 티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그러자 어딘가에서 대기해 눈치를 보던 사용인들이 차와 다과를 준비해줬다.

“잠시 나가 있어 줘.”

“예, 공작님.”

사용인들은 마치 바라던 일이라는 듯, 활짝 웃으며 재빨리 물러났다.

나는 그 모습들을 씁쓸하게 바라보다 차를 마셨다. 이제부터 꺼내야 하는 이야기는 심각한 것이기 때문에 최대한 분위기를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멜이 먼저 치고 들어왔다.

“세르베인. 무슨 일로 온 거야?”

“어……?”

“사실 아까는 농담이었어. 네가 뭔가 용건이 있어서 나를 찾아왔다는 걸 알아.”

멜이 방금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게 장난이었다는 것에 놀라야 하는지, 혹은 내가 용건이 있어 저를 불렀단 걸 간파했다는 것에 놀라야 하는지 고를 수가 없었다.

내가 멍청한 얼굴로 멜을 바라보기만 하자, 그가 비를 맞은 수국처럼 가련한 얼굴을 하고서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왜냐하면 세르베인은…… 늘 뭔가 이유가 있어야 나를 찾아왔잖아.”

저 얼굴을 보고서 차마 ‘맞아. 물어볼 게 있어서 찾아온 거야.’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어떤 냉혈한이 그럴 수 있겠는가.

나는 허둥지둥 멜의 양손을 잡아주며 말을 바꿨다.

“아니야. 나는 그냥…… 갑자기 너도 보고 싶고, 같이 꽃도 보고 싶어서 찾아간 거야.”

“정말?”

“……그럼~”

“너무 기뻐!”

왜인지 계속 멜에게 말려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멜이 그런 걸 의도할 리 없는데도.

‘곤란하게 됐어.’

결국 나는 멜에게 어제 무슨 일을 했는지 추궁하지 못했다. 나중에는 그가 했던 행위에 대해 지적해야 한다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눈앞의 그가 너무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 * *

“미안, 멜. 미나엘이 불러서 가봐야겠어. 미나엘이 누구냐면-.”

“알아. 그 회색 머리칼을 한 헥사바임 가문의 여자잖아.”

세르베인은 멜의 대답에 안 그런 척했지만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멜은 속으로 조금 실없이 웃었다. 세르베인은 자신을 백치……가 아니라 너무 아이처럼 취급했다.

그래서 편리한 점도 있긴 하지만 조금 헛웃음이 나올 때도 있었다…… 그래. 아무튼 아직까지는 좋은 점이 더 많았다.

“조금 이따 봐, 세르베인.”

“!”

세르베인은 지금껏 저와 내가 입을 맞춘 게 몇 번인데 아직도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하지만 멜은 그 앞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수하게 웃었다. 그러면 조금 붉어진 세르베인의 귓불을 만족스럽게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저벅저벅.

멜은 저를 두고 멀어지는 세르베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미나엘 헥사바임, 그 여자가 제가 한 일을 알아채고 세르베인을 부르는 것 같았다. 그 왕이라는 작자보다는 그 사람이 더 유능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세르베인은 이미 아는 기색이었지? 이렇게 빨리 알게 될 줄은 몰랐는데.”

멜은 침울하게 발끝으로 툭툭, 잔디를 두들기다가 일어섰다.

역시 자연스럽게 죽이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내 사랑의 피 값으로 꽤 대단한 권력을 등에 지고 살았던 모양이지. 

목표물들은 대부분 ‘좋은 전망’을 가진 바닷가에 살고 있었다.

덕분에 멜은 해일을 일으켜 얼마든지 그들을 사고사로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똑같이 당해야지. 나는 그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어.”

왜냐하면.

“너는…… 훨씬 더 아팠을 테니까…….”

그걸 생각하면 시시때때로 눈물이 흘렀다. 

세르베인의 앞에서 울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너에 대한 진실은 알수록 가혹하기만 했다.

너는 그 삶들을 어떻게 버티고 살았던 걸까.

저택을 나온 순간부터 자주 보이던 환상이 있었다. 

그것들은 전부 세르베인의 얼굴을 하고서, 저를 바다로 가도록 종용했다.

그것 때문에 한때 스스로 방에 들어가 유폐된 생활을 하며 세르베인의 곁으로 가지 못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환상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네가 용기를 내 잠근 문을 두드렸던 날에.

“멜. 드디어 문을 열어줬구나.”

그날, 네 발걸음이 멀어져 다급히 문을 열었더랬다. 네가 나를 또 버릴까 봐 두려워서.

다급한 마음에 문을 열자마자 그 앞에는 네가 서 있었다. 익숙한 옷을 입고서.

처음 만났던 순간에 입고 있던 흰 드레스가 눈에 박히듯이 들어왔다. 

오랜 시간이 흘러 잊었다고 해도, 다시 보면 선명히 떠오르듯 그건 분명 네가 그날에 입고 있던 옷이 맞았다.

처음에는 정말로 ‘너’라고 믿을 뻔했다.

내 손을 잡아 오는 매끄러운 흰 손을 보지 않았더라면.

“어서 가자. 너랑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어.”

“…….”

“멜? 왜 움직이지를 않아?”

멜은 똑똑히 기억했다. 이번 생의 세르베인은 손이 이렇게 매끄럽지 않았다.

온몸 곳곳에 아픈 흉터가 있었다. 세르베인은 나뭇가지에 긁힌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그건 아무리 봐도 검과 같은 날붙이들에 의한 흉터였다.

아무튼 그런 사람의 손이 이렇게…… 부드럽고 희고 말랑할 수는 없겠지.

“누구야?”

“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넌 세르베인이 아니야.”

멜은 그 손을 꽉 쥐었다. 뼈가 우두둑,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 감각이 확실했기에 멜은 눈을 휘며 웃었다. 

제게서 손을 빼내 도망치려는 형체를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미친 게 아니었어. 넌 실재했던 거야. 그동안 밤마다 방 앞에 나타났던 것도 너였어. 아……! 내 환상이 아니었어!”

“…….”

“넌 뭐야? 어떻게 세르베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악……!”

“저택에 나온 순간부터 나를 따라왔던 거야. 그렇지? ……왜 대답을 안 해?”

“이 손 놔! 내게 왜 그러는 거야, 멜!”

그 말에 멜의 행동이 뚝 멈추었다. 

끊임없이 추궁하던 음성이 멎었다.

세르베인의 형체를 한 무언가가 드디어 제 위장이 먹혔다고 생각하던 때에, 멜은 웃음기를 지웠다.

“내 세르베인을 흉내 내지 마. 참아주는 것도 정도가 있어.”

* * *

발치에 굴러다니는 촛대는 피가 흠뻑 묻어있었다. 반면 제 앞에 선 세르베인을 흉내 낸 존재의 손은 멀쩡했다.

‘그렇다면 이건 정말 세르베인의 피인 거야……’

제가 문을 열어주지 않아 그녀가 이렇게 다쳐버린 거다.

멜은 입술을 꽉 깨문 채, 촛대의 피를 손끝에 찍어 맛봤다. 역시 틀림없이 세르베인의 피였다.

“으윽……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같은 인어잖아……!”

어느새 몸이 꽤 회복된 인어가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보통 인간이었다면 즉사할 정도의 폭력을 가했기에 그가 인어라는 말은 사실일 것이다.

멜은 또 다른 인어를 경멸하는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세르베인의 흰 드레스를 입고 있는 성인 남성의 육체를 보는 건 시각적으로 매우 불쾌했다.

“네가 먼저 선을 넘었잖아.”

“…….”

“게다가 나는 나 외의 인어를 만난 적도 없는데 유대감을 요구하다니…… 웃기지도 않아.”

“그건 당신이 사라진 뒤 바다가 우리를 많이 창조해낸 것-!”

“궁금하지 않아. 이젠 나와 상관없는 세상의 이야기잖아.”

멜의 표정은 어떤 동요도 없이 건조했다. 그 모습을 본 인어가 이를 악물었다.

바다는 인어를 보호하기 위해, 멜이 사라진 후 많은 인어를 만들어냈다. 

인간들이 그러하듯, 인어들도 무리를 지으면 안전하리라 생각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많아진 인어들은 더 이상 바다에게 특별하지 않았다.

바다는 지금도 멜을 기다렸다. 그래서 멜이 부러웠고, 동시에 멜에게 화가 났다.

“당신은 당신이 얼마나 편애받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지!”

그토록 편애를 받아 멜은 수많은 죄를 지었음에도 마음만 먹는다면 인어로 돌아갈 수 있었다. 조금만 바다의 눈 밖에 나도 버림받는 평범한 인어는 그 특권이 부러웠다.

‘게다가 당신은 고작 누군가를 흉내 낼 수만 있는 나와 달리 수많은 권능이 있지 않은가.’

비록 바다에서 오래 지내지 못한 탓에 제 능력도 제대로 모르고, 조절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그런 것쯤은 바다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지 않나.

“당신이 인간으로 살겠다는 게 이해가 안 돼!”

그런데도 멜이 하등한 인간의 삶을 택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아 화가 났다.

“그나저나 말 돌리지 마. 넌 아직 내게 대답하지 않은 게 있어.”

멜은 재차 인어를 바닥에 쓰러트렸다.

콰당!

인어는 신음을 억누르며 멜을 노려봤다. 도대체 뭐가 궁금하냐는 듯, 반항적인 시선이었다.

“세르베인이 수도로 가다가 바다에 빠진 적이 있으니까……. 그래서 모습을 흉내 낼 수 있었던 건가 잠시 생각했어.”

“!”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니 그건 아니더라고. 넌 이미 내가 녹시렐 영지에 있을 때 그 모습을 한 채 나를 바다로 데리고 가려고 나타난 적이 있었어.”

“그건…….”

“어떻게 세르베인의 모습을 알아냈지? 게다가 그 옷은 어떻게 구한 거야?”

멜은 단순히 저 인어가 세르베인의 모습을 어설프게 흉내 낸 탓에 들킨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인어는 의상까지도 완벽히 세르베인의 모습을 만들어 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첫 번째 생의 세르베인의 모습에 가까워.’

그 사실이 자신을 끔찍이 초조하게 만들었다. 어째서인지 본능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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