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 화 (104/132)

104 화

“채 하루가 되기도 전에 보고해야 할 정도의 일이라는 거군.”

“그렇습니다. 일단 먼저 관련된 서류를 먼저 드리겠습니다.”

그건 몇몇 귀족 가문들의 동태를 감시한 일지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나엘이 내게 넘겼던 신성 왕국 기사단의 초대 멤버들이 속했던 가문이자, 아직 멸망하지 않은 가문들이었다.

‘치밀하게 정리했군.’

워낙 서류의 양이 많았기에 나는 빠르게 종이를 넘기며 내용을 살폈다.

평범한 내용이었다. 나는 그들이 나를 두려워해 처벌을 받기도 전에 타국가로 야반도주할까 감시 인력을 붙였었다.

예상대로 그들은 끊임없이 다른 귀족 가문들과 만남을 가지며 살길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알테슈메그가 심문하는 동안 토해냈던 가문에 속했다.

아무렇지 않게 읽어 내려가던 도중, 나는 가장 최근의 보고 내용을 본 순간 표정을 굳혔다.

오늘 아침, 해변에 토막난 채 발견됨.

“죄송합니다. 아직 누가 저지른 일인지는 미처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당장 오늘 아침에 발견되었다고 하니 아란이 모든 소식을 취합해 이 시각에 내게 보고하러 온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일단 폭풍우가 심했던 시간을 노려 벌인 일로 추정됩니다. 특이점은 세르베인 님께서 감시를 지시하셨던 각 가문에서 동시에 일어난 일이라는 점입니다.”

“……그래?”

“예. 한날한시에 벌인 것을 보아, 당연하겠지만 어느 단체를 고용해 벌인 일인 것 같습니다. 다만 왜 이렇게까지 티가 나게 하루 만에 일을 벌였는지 저로선 의도를 짐작하기 어렵군요.”

그래. 누구라도 이 일을 한 사람이 저질렀다고 생각하지는 못할 것이다. 

당연히 적대 관계의 귀족이 사람을 고용해 벌인 일이라 여기겠지.

하지만 그런 일을 의뢰할 만한 사람, 미나엘과 프로셴과 나는 어젯밤 알테슈메그를 심문하느라 그런 일을 꾸밀 수가 없었다.

“아직 확실한 신원이 파악된 사망자는 소수입니다. 시신이 온전하지 않았기에 모든 사망자의 신원을 파악하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인물은 누가 있지?”

“가장 뒤쪽에 보시면 명단이 있습니다. 확인된 사망자의 공통점은 가주 혹은 1순위 후계자라는 점입니다.”

“그렇군.”

“……저.”

아란은 나의 얼굴을 살폈다. 내가 생각보다도 놀라지 않고, 분노하거나 다른 감정 표현이 없다는 것을 보고 떠오른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혹시 세르베인 님께서 저희 외의 다른 단체를 통해 지시하신 일입니까?”

아란이 이렇게 생각할 정도라면 다른 귀족들도 분명히 그렇게 추정할 것이다.

“역시 네가 보기에도 내가 한 것 같나?”

“……사실 저는 세르베인 님을 오래 봐왔기에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조금 신경 쓰이는 부분이 많으니까요.”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은데?”

“세르베인 님께서 굳이 제도를 사용하지 않고 그들을 처리할 생각이셨다면 비교적 티가 나지 않게 사고사로 처리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 의견에 동의해.”

“……예?”

나는 서류를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더 살핀 뒤 아란에게 넘겼다. 

아란은 내 말의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웠는지 조금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혼란스러워하는 얼굴 앞에서 매끄럽게 말을 이었다.

“사고사로 처리해.”

“…….”

“서류 역시 태우는 게 좋겠어.”

* * *

‘멜이 했을 거야.’

자정을 훨씬 넘은 시각, 그가 피로 완전히 물든 옷을 입고 돌아오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멜의 비상식적 신체 능력이라면 같은 날에 그 많은 귀족을 습격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제 귀족들은 자신의 영지가 있는 곳에 굳이 살지 않고 비교적 수도와 가까운 곳에 몰려 살고 있으니 어려운 일도 아니다.

‘미나엘이 내게 준 명단을 본 거겠지. 그걸 방에 보관해둔 내 잘못이 커.’

설마 멜이 신성 왕국 기사단 명단을 보고 이런 일을 꾸밀 줄은 몰랐다.

설령 내 방에서 우연히 그걸 발견하더라도 그저 ‘저런 게 있구나.’하고 넘길 줄 알았다고 말한다면 내가 너무 안일한 것일까?

‘도대체 왜 그런 행동을 한 거지……? 그들이 녹시렐 가문의 멸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걸 알게 되어서?’

당연하지만 멜이 옛 녹시렐 저택에서 읽었던 책들은 내 죽음과 관련된 역사를 담고 있지 않았다. 녹시렐 가문이 멸망하기 전에 쓰여진 책들이니.

수도로 도착한 뒤, 멜은 많은 책을 읽었다고 했다. 

그 책들을 읽다가 알게 되어서 나를 위해 복수를 한다고 그런 일을 벌인 걸까?

하지만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왜 그렇게 잔혹한 방식을 택했지?”

아란이 내게 보고했을 때,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내가 가장 동요한 부분은 귀족들이 ‘한날한시’에 죽었다는 점이 아니었다.

보통이라면 그 불가능에 가까운 일에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시체가 토막 난 채 바다에 버려졌다는 점에 가장 동요했다.

정확히는 그런 행위의 주체자가 멜일 것이라는 점에서.

“너는 그렇게 잔혹한 존재가 아니잖아. 네가 그랬을 리 없어…….”

아무리 끔찍한 원한을 가진 원수라고 해도 나는 그렇게까지 할 수 있으리라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맞이하는 최후를 몸소 겪어봤으니까. 

그게…… 얼마나 두렵고 고통스러운 죽음인지 알고 있으니까.

똑똑.

“예, 들어오십시오.”

가볍게 두드린 문 너머, 헤론시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예상치 못한 방문객의 정체에 헤론시가 놀란 얼굴을 했다.

반면 발소리만 듣고도 나란 걸 알았는지 멜은 놀란 기색도 없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 어쩐 일로 오셨…… 아. 멜 공자님을 데리러 오신 거라면 수업은 지금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헤론시가 허둥지둥 수업 자료를 정리하는 것이 보였다. 알록달록, 식재료가 그려진 요리책이 보였다.

뭔가…… 유치원에 자식을 데리러 온 학부모의 심정이 된 것 같았지만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그렇게 해줄 수 있다면 고맙네.”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멜이 나를 덥석 안아왔다.

“세르베인, 어쩐 일이야? 내가 보고 싶어서 왔어? 나도 보고 싶었어!”

나는 멜의 뒤에서 수업 자료를 정리하던 헤론시가 희게 질린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프로셴도 그렇고, 알테슈메그도 그렇고……. 다들 멜의 본래 모습을 보면 왜 저렇게 이상한 표정을 짓는지 이해가 안 됐다.

“멜. 우리 정원으로 가자.”

“응. 알겠어.”

같이 걷자는 생각으로 꺼낸 말인데 멜이 나를 안아 들었다. 이쯤 되면 나도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멜의 어깨를 빠르게 살짝 두드리며 다급히 그의 귀에 속삭였다.

“아니, 멜……! 내려줘. 나 걸을 수 있어.”

“나랑 꽃이 보고 싶어서 왔구나. 응응. 나도 그랬어.”

멜은 내가 뭐라고 말하며 자신의 행동을 만류하든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들뜬 듯이 경쾌한 발걸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

“얘, 얘……! 저쪽으로 가자.”

복도를 오가던 사용인들이 화들짝 놀라며 못 본 척 방향을 바꿔서 걸어갔다.

‘하루빨리 여기서 나가야겠어.’

어차피 저택의 공사도 완료되었는데, 작위 수여식 이전에 나가버리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내 결정이 점점 그쪽으로 기우는 동안, 실내 정원에 도착했다.

“세르베인, 밖은 위험하니까 이쪽으로 왔어!”

“응…… 고마워.”

나는 사회적 체면이 깎인 것에 의한 정신적 타격을 표 내지 않고 그냥 웃어버렸다. 

멜은 나를 사뿐히 땅에 내려줬다가 안절부절못했다.

여기서 걷지 않으면 순식간에 또 나를 안아 들 눈치라서 나는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저쪽으로 가자.”

일단 사람들이 잘 오가지 않는 깊은 정원으로 들어갔다. 마지막 남은 체면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를 따라 순순히 걸어오던 멜이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이유를 몰라 멈춰선 채 그를 돌아보니 멜이 귓불을 붉힌 채였다.

“세, 세르베인…… 하지만 지금은 낮인걸? 그리고 나는 괜찮지만 네 몸 상태가 염려돼…….”

한순간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가만히 있었다. 

지금이 낮인 것과 내 몸 상태가 안 좋은 게 지금 상황과 무슨 상관이지……?

하지만 쓸데없이 빠른 눈치는 그 맥락을 이해해버렸다. 

가령 일부 문란한 귀족들이 깊은 정원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무슨 짓을 하는지 같은……

‘세상에. 그런 걸 다루는 책도 있었던 건가?’

하긴. 없을 리 없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책들이 있었다.

귀족의 품위에 맞지 않다고 사교계에서는 헐뜯더라도 뒤에서는 알음알음 볼 것들 다 보는 게 귀족들이었다.

그리고 일부는 정말 관심이 없더라도 기본 소양으로 가십과 그런 행위들에 대해 알아둬야 했기에 관련 서적을 구비해 뒀다.

나는 다시 한번 정신적 타격을 이겨내며 힘겹게 부정했다.

“멜.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나도 세르베인이랑 같은 마음-”

터업!

나는 다급히 멜의 입을 두 손으로 막아버렸다. 

멜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내 손바닥에 뽀뽀를 했다.

‘그때도…… 실수가 아니었겠네.’

녹시렐 저택에서 그와 처음 같이 씻었던 날, 멜의 혀가 내 손바닥에 닿아서 화들짝 놀랐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것들도 다 순진해서 우연히 벌어진 일들이 아니라 노림수였던 것 같다.

“멜, 나는 정말로 지금 할 생각이 없었어…….”

“지금은 있다는 거야? 나는 좋아.”

“없어! 없는 중이야! 없을 예정이고!”

내 얼굴이 지금 형편없이 흐트러져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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