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화
나는 의자에서 일어섰고 멜은 동그랗게 눈을 뜨고서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그의 쇄골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하하……. 그냥 술맛이네.”
의도치 않게 계속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살짝 고개를 기울여 멜의 귀에 속삭였다.
“멜. 우리 침대로 가자.”
한순간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였지만 나의 착각이었을까. 다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마주한 푸른 눈동자는 바다처럼 잠잠히 나를 담아내고 있었다.
멜은 여우처럼 눈을 휘어 웃더니 내 허리와 허벅지를 감싸며 나를 안았다.
“……그럴까?”
“…….”
“그런데, 후회하지 마.”
멜은 가볍게 웃는 척, 장난스러운 척 말했지만, 손은 나를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나는 멜의 허벅지 위에 살짝 빗겨 앉아 그에게 말했다.
“나는 후회 같은 거 안 해.”
“거짓말. 너는 늘 고통스러워했잖아.”
“그랬지. 그런데…….”
나는 천천히 멜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처음 그의 피부와 머리칼을 만졌던 날을 선명히 기억한다. 그때의 네 가느다랗고 매끄러운 뼈대까지도.
매끄러운 피부, 달빛을 담은 듯한 살결은 변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선이 굵어진 너의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는 내가 모르던 너의 세월을 담고 있었다.
굵어진 뼈대는 지금 나를 온전히 지탱하고 있다.
이제는 그때와 다르게 완연한 남자의 모습이 된 너는, 내게 다른 종류의 탐욕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내가 만든 모든 선택이 너를 내 손 위로 떨어트렸잖아.”
“…….”
“그런데 왜 후회를 하겠어…….”
낮게 웃으면서 그 말을 내뱉은 순간 멜이 나를 안아 들었다.
반사적으로 멜의 목을 끌어안았다. 걸음을 옮기는 순간에도 멜은 내 쇄골에 입을 맞췄다.
촉…….
닿아오는 숨결이 너무 뜨거웠다. 그 열기가 옛날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열에 허덕이며 네 환영을 보던 열다섯 살의 세르베인 녹시렐이 된 것 같았다.
“무슨 생각해, 세르베인?”
나를 침대에 눕힌 멜은 내 이마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대며 물었다.
살포시 닿아오는 그의 머리칼이 나를 간지럽혔다. 그의 손이 섬세한 악기를 연주하는 것처럼 내 옷자락을 풀어왔다.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그런 거 생각하지 말자.”
순간, 멜의 얼굴이 울 것처럼 보였다. 그는 다급히 나를 끌어안았다. 나를 안타까워하고, 제 품속에만 가둬두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멜이 내 귓가를 살짝 깨물었다가 놓으며 속삭였다.
“네겐 행복한 일만 있을 거야.”
* * *
내가 간밤에 무슨 짓을 한 거지……?
가만히 누워있었건만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차라리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셔버릴 걸 그랬나. 뒤늦게 후회가 됐다.
어젯밤의 기억이 너무나 선명했기에.
“…….”
천천히 고개를 돌렸을 때는 눈을 감은 멜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 천사 같고 순수한 얼굴이었다…….
그가 옷을 전부 다 입고 있었다면. 적어도 쇄골과 그 아래에 포도주가 흘렀던 자국이 없었다면 말이다.
……그리고 내 잇자국과 손톱자국도.
“…….”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에 그려진 그림 속 인물들이 마치 나를 보며 힐난하는 것 같았다.
‘오, 당신이 순수한 인어를 덮쳤다는 걸 기억하시나요?’
‘정말로 무도했죠. 인어가 우는 건 보이지도 않았나요?’
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을까. 나는 고개를 탈탈 흔들며 죄책감을 덜어냈다.
‘아니, 나도 울었습니다만……?’
그런데 멜은 말만 ‘괜찮아?’. ‘미안해……’ 했지 그냥…… 계속했단 말이다.
나는 적어도 조금 배려해주는 시늉이라도 했는데.
‘너무 좋아, 세르베인…… 너는 어때……?’
‘흐읏…… 아……’
‘하하…… 여기가 좋아?’
갑자기 단편적인 순간이 떠올라버렸다.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내가 거의 회색 재가 되어 멍하니 시선을 천장에 둘 때 옆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멜이 깨어나려는 건지 뒤척이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눈을 감아버렸다.
당장은 멜의 얼굴을 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할 여유가 없었다.
조금 마음의 안정이 필요했다.
“우음…….”
눈을 감고 있지만 멜이 무엇을 하는지 상상이 됐다. 부스럭대며 일어나 앉는 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봐온 그의 생활 패턴에 의하면 지금은 눈을 비비는 중일 것이다.
“…….”
아마 이제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중이겠지. 나는 가까이 다가오는 따뜻한 체온을 느꼈다.
촉.
“세르베인…….”
그가 내 뺨과 이마에 입술을 맞췄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자는 척했다.
멜은 이후에도 한참 내 얼굴을 살피며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이제 적당히 일어난 척할까…….’
이대로 회피해봤자 변하는 건 없다. 결국 어차피 겪을 일 아니던가.
나는 최대한 마음의 준비를 다 해 능청스럽게 ‘멜, 잘 잤어?’ 같은 인사를 하려 했다.
“!”
그가 갑자기 나를 안아 들지만 않았다면.
“멜……? 뭐 하는 거야……?”
“세르베인, 일어났어?”
멜이 놀란 기색도 없이 사르르 눈을 접으며 내게 인사했다.
그는 나를 이불에 돌돌 말아 들고 걸음을 옮겼다.
즉…… 그는 나체였다.
“멜, 그…… 옷이라도…… 입는 게 어때? 추울 수도 있고, 그리고 인간들은 노출에 제법 엄격한-.”
일단 그의 나체를 조금이라도 가려야겠다고 생각해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자 멜이 웃었다.
“세르베인이 내 몸이 예쁘다고 했잖아.”
“……어?”
“씻겨줄게. 편하게 있어.”
어제의 내가 뱉은 말에 충격받아 얌전히 멜의 품에 안겨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넋을 놓은 사이 멜은 나를 능숙하게 씻기기 시작했다.
나는 이 행위가 새로운 일상이 될 것임을 짐작했다.
* * *
폐쇄적인 나와 멜의 성향 탓에 우리는 방에서 식사를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사용인들이 대대적으로 방을 치우도록 비워줘야 했기에…….
나는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살짝 당황했던 사용인들의 반응을 기억했다.
‘녹시렐 공작이 굉장히 문란하다더라!’ 부디 이런 소문만큼은 돌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멜. 헤론시와의 수업은 어땠어?”
나는 매끄럽게 식사 중인 멜을 지켜보다가 넌지시 물었다. 이제 묻기에는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어젯밤에는 차마 그 말을 꺼낼 틈이 없었다.
“음. 시시했어.”
멜이 정말 조금의 과장도 하지 않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가 알려준 것들은 이미 내가 아는 것들이었는걸.”
“어떤 것이었는데?”
“상식을 알려주겠다면서 갑자기 왕국의 제도적인 것들에 대해 알려줬는데…… 그런 건 이미 책으로 봐서 다 알아.”
헤론시도 어지간히 책 속에만 틀어박혀 살던 학자 타입인 모양이다. 상식에 대해 알려주라고 했더니 왕국의 제도적인 요소들에 대해 가르치다니.
녹시렐 저택에는 어려운 책들이 많았다. 그 책들을 다 읽었으니 멜의 정치, 경제적 지식수준은 보통의 귀족들보다 훨씬 우월할 테다.
‘헤론시에게 정확히 어떤 것들을 가르쳐줘야 하는지 다시 말해줘야겠어. 덤으로 요리도 알려달라고 해야지. ……그도 잘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가볍게 헛웃음을 짓다가 물었다.
“그것 말고 집의 구조에 대해서는 안 배웠어?”
“…….”
“안 배웠구나. 괜찮아. 오늘 오후에 같이 외출하자.”
“외출……?”
“우리가 함께 살 집이 완성됐거든. 직접 본 후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말해줘.”
멜이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그가 내 제안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에 놀라서 그런 반응을 보이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하지만 세르베인…… 걸을 수 있겠어……?”
“…….”
……아. 그런 문제 때문이었나.
서서히 부끄러움에 피부가 달아오름을 느꼈다. 나는 억지로 평정심을 유지한 척 웃었다.
“……그러게. 정정할게. 내일 가자.”
“아니면 내가 널 안고 다니면 돼. 나는 좋아.”
“멜. 다수의 사람이 있는 장소에서 그런 행위는 자제하는 편이 좋아.”
멜은 끊임없이 내게 애정 어린 말들을 속삭였다.
나는 그 모습에서 멜이 그동안 숨기고 있던 그늘진 모습이 지워졌음을 깨달았다.
비록 어젯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가 어디서 누구의 피를 묻히고 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지 않을까?
순수하고 착한 멜이 일을 벌여봤자 고작 무슨 일을 저질렀겠는가.
“세르베인.”
“응?”
“행복해?”
나는 이토록 상냥하고 다정한 존재를 본 적이 없다. 나는 그의 손에 내 뺨을 부비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응. 너무 행복해.”
“…….”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을 만큼 너무 좋아.”
내 말에 나를 물끄러미 보던 멜이 뺨을 붉히며 활짝 웃었다.
“나도 그래.”
“…….”
“나도 이제 더는 바라는 게 없어.”
* * *
라헨은 생전, 녹시렐 가문의 부흥을 위해 비밀 단체를 만들었다.
그들은 한미한 출생이지만 뛰어난 무력을 가진 실력자들로, 현재는 초기의 목적을 거의 다 이루었기에 나의 부모님의 경호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의 우두머리인 단장이 나를 찾아왔다.
평범한 사용인의 복장으로 위장한 채.
“세르베인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란, 무슨 일이지?”
아란은 다른 구성원들에 비해 어렸고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암살과 잠입에 능했고, 임무 성공률이 100%에 육박했다. 게다가 뛰어난 정보 수집 능력까지 갖췄다.
그 탓에 나는 그녀에게 녹시렐 비밀 단체의 단장직을 맡겼었다.
이제는 녹시렐의 비밀 단체가 하는 일이 많이 줄었다지만, 단장인 만큼 그녀는 여전히 바쁠 것이다.
그런 아란이 암호문을 사용한 서신을 보낸 게 아니라 직접 나를 만나러 왔다는 사실에 다소 놀랐다.
“간밤에 심상치 않은 일들이 있어 급히 직접 오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