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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화 (102/132)

102 화

나는 억지로 힘껏 미소 지었다. 그리고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멜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괜찮아.”

“응……! 그럼 다행이야. 우리 식당으로 가자.”

멜은 빙긋 웃으며 나를 감싸 안아 문 쪽으로 걸어가려다가 멈춰 섰다. 

그러더니 곧장 나를 들어 올려 안았다.

그는 내 신을 벗겨버렸다. 나는 거기서 데자뷰를 느꼈다.

“접시 조각 같은 건 염려하지 마. 내가 널 안고 가면 돼.”

“…….”

“위험한 건 아무도 없어.”

위험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야 옳지 않을까.

멜은 어두운 복도를 거침없이 걸었다.

이미 자정을 한참 넘긴 새벽이다. 성 안을 돌아다니는 이는 없었다.

지난 며칠간 멜의 손을 잡고 성 안의 구조를 익혀주었다. 그걸 이리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멜은 식당으로 향했다.

“지금 가도 요리사가 없을 테니까 내가 요리해줄게!”

멜은 아무 말 없는 내게 계속 속살거리며 해맑게 웃었다.

나는 그의 머리칼을 타고 얼굴을 적셔 오는 빗물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내 손길을 느낀 멜이 눈을 휘어 웃더니 내 얼굴에 온통 입을 맞췄다.

“내가 바다로 돌아갈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돼, 세르베인.”

멜이 기괴할 정도로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

손에 피를 많이 묻히면 신성력을 잃을 수 있다고 했다. 

알테슈메그는 멜도 저와 같이 신성력이 있는 존재가 아니더냐며 울부짖었다.

신성력은 아니다. 하지만 무엇이 다르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인어는 사람이 되었다.

제 손에 수많은 피를 묻혀서.

“그런데 세르베인, 여기 우리 집이랑 구조가 좀 다른 것 같네……?”

나는 살인이 그의 불완전한 정신의 원임임을 알게 되었다.

* * *

다행히 주방에 도착한 멜은 이곳이 녹시렐 저택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는 주방에 있는 식재료를 이리저리 뒤지다가 내게 방긋 웃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세르베인, 네가 좋아하던 걸 만들어줄게.”

‘내가 뭘 좋아했는데……?’

자연스레 드는 의문이었다. 

나는 멜이 내려준 주방 작업대 위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나조차 내 취향을 확신할 수가 없었다. 딱히 음식을 먹는 게 큰 즐거움이었던 적이 없어서 그랬다.

하지만 나는 곧 멜이 무엇을 만들 심산인지 눈치채고야 말았다. 

그가 생감자를 갈려고 했기 때문이다.

“……멜! 나 사실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아서 그…… 냥 간단한 요리만 해도 될 것 같아.”

차분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혼신의 힘을 다해 그의 특제 요리가 탄생하는 걸 막았다.

그러자 멜이 한눈에 봐도 시무룩해진 얼굴로 어깨를 추욱 늘어트렸다.

“하지만 세르베인은 내가 만든 수프를 좋아했잖아……. 그동안 해주지 못해서 너무 마음이 아팠어.”

멜에게는 미안하지만, 빈말로라도 ‘다음에 만들어줘.’ 같은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생감자 스프 같은 건 다음 생에도 먹고 싶지 않았기에.

‘헤론시한테 상식 말고 요리 먼저 조금 가르쳐 달라고 해야겠어.’

나는 어떻게 해야 그의 관심사를 요리가 아닌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발견한 것이 술 창고로 향하는 문이었다.

“멜, 혹시 많이 배고파?”

“음……? 그럼……! 세르베인은 여태껏 아무것도 못 먹었을 거잖아. 그러니까 네가 원하는 요리를-.”

슬쩍 내 눈치를 살피며 멜이 빙빙 돌려 말했다.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 걸 보니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 나 역시 이 시간에는 딱히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면 우리 와인만 조금 드는 게 어때. 과일이랑 치즈 정도만 준비하면 돼.”

나에게는 처음이 아니지만 멜에게는 와인을 마시는 것이 처음일 것이다. 

예상대로 의아한 얼굴의 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와인……? 술 말하는 거지?”

다행히 멜은 와인이 뭔지 아는 데다가 조금 호기심까지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멜은 나를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않았다.

멜이 나를 안아 든 채 술 창고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내가 와인 한 병을 고르자 멜의 반응이 미심쩍게 변했다.

“세르베인, 그걸 말하는 거였어? 나도 그걸 알아. 저택을 치울 때 여러 병 발견했거든. 하지만 하나같이 다 상태가 이상했어. 그런 걸 먹으면 안 돼. 분명 탈이 날 거야.”

녹시렐 저택에 있던 와인이라면 너무 오래되어서 변질된 와인일 것이다.

멜에게 변질되지 않은 와인 향을 알려주기 위해 우선 마개를 열기로 했다. 하지만 멜에게 안긴 상태라 생각처럼 와인오프너를 사용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자 멜이 그냥 손끝으로 조금 나온 마개를 뽑아버렸다.

뽕!

‘저게…… 손가락 끝으로 열리는구나.’

하긴. 그는 두꺼운 쇠로 된 손잡이조차 한순간에 일그러트렸었지.

나는 그냥 고맙다고 말하며 멜에게 향을 맡게 했다.

“멜. 그건 오래돼서 상태가 이상해져서 그럴 거야. 어때? 이거는 다르지?”

“똑같은데……. 이상해. 약 냄새가 나.”

혹시 변질된 와인 특유의 향이 아니라 알코올 향 자체가 별로였던 건가?

그렇다면 술을 권하지 않는 게 낫겠다고 생각할 때 멜이 다시 감자로 손을 뻗었다.

“세르베인, 역시 그런 것보다는 내가 요리를-.”

“……”

멜의 기호를 무시해서 미안하지만 일단 그를 주방에서 데리고 나와야겠다.

나는 그의 두 뺨을 감싸 나를 향하게 하고 미소 지었다. 

그의 관심을 감자에서 빼앗기 위해 제법 계획된 미소였다.

“멜, 그거 알아? 인간들은 성인이 되어야만 술을 마실 수 있어.”

“어……?”

“나는 그게 내 삶에서는 불가능할 줄 알았어. 특히 너와 함께 해보는 건.”

나는 이제 제법 멜을 어떻게 해야 쉽게 회유할 수 있는지 잘 알았다.

멜은 내 말에 감자로 뻗었던 손을 거두고 내 허리를 감쌌다.

* * *

내 방의 창문과 가까운 쪽은 빗물로 젖어 엉망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프로셴이 내게 준 방은 매우 넓었기에 문제는 없었다.

“세르베인?”

“……아, 멜. 다 씻었어?”

“피곤해? 우리 그냥 잘까? 나는 그래도 괜찮아.”

“아니야. 이제 안 피곤해.”

나는 멜이 샤워를 하고 피 묻은 옷을 갈아입는 동안 깊게 잠들 뻔했지만, 다행히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잘 수는 없었다. 아직 그에게 답을 듣지 못한 게 많았다.

‘이럴 의도로 술을 마시자고 한 건 아니지만 잘 됐어.’

멜은 무엇을 하고 돌아왔는지, 어디를 갔는지, 왜 그곳에 가서 그런 일을 했는지 묻는 내 질문들을 회피했다.

‘하지만 술이 들어가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와인을 잔에 따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게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었는지 깨달았다.

“아, 안 되겠어. 세르베인. 그만 마셔야 할 것 같아.”

멜이 안절부절못하며 연신 내 뺨과 머리칼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내 몸이 미세하게 흔들거리자 이제 내 옆에 붙어 떨어지지를 않았다.

내 착오였다. 나는 왜 당연히 내 주량이 더 셀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러고 보니 내가 어느 정도로 술을 마셔도 괜찮은지 시험해볼 기회가 없었다.

‘미안. 세르베인……. 나는 술에 취하지 않는걸…….’

태생적으로 약물 저항성이 높은 프로셴은 술을 즐기지 않았다. 

맛도 없고, 마셔봤자 취하지도 않으니 마실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 취한 척은 잘해! 보여줄까?’

게다가 나는 프로셴이 사교 클럽에서 일하는 동안 터득한 능력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이후 그에게 술을 마시자는 제안을 하지 않았다.

‘미나엘 역시 술을 즐기지 않았지.’

미나엘은 제 몸이 통제를 벗어나는 감각이 싫다고 했다. 그래서 술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입을 축이는 정도로만 들었다.

“세르베인. 이거 뭐야……? 왜 그래? 의사를 불러와야 할 것 같아.”

멜이 어느새 울먹일 것처럼 덜덜 떨고 있었다. 고작 와인 세 잔이 내게 가져온 폐해였다.

“멜, 괜찮아. 전혀 아픈 곳도 없고, 그냥 조금 몽롱할 뿐이야.”

나는 마른세수를 하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시야가 흐느적거렸다.

멜에게 무엇을 했느냐고 물어야 하는데 그 이전에 내가 취하게 생겼다. 하지만 내 통제를 벗어났을 뿐, 정신은 아주 멀쩡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나도 그만 마셔야 할 것 같다는 데에는 동의해. 이만 침대로-.”

그 말을 하며 멜을 안심시켜주기 위해 그와 시선을 맞춘 순간이었다. 

멜의 푸른 눈동자에 맺힌 눈물이 마치 내게로 떨어질 듯 가까웠다.

“……”

“세르베인, 왜 그래……?”

멜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탓에 그의 한쪽 쇄골을 가리던 가운이 살짝 아래로 흘러내렸다.

정정한다. 아무래도 정신 역시 내 통제를 벗어난 것 같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런 충동을 느낄 리 없지 않은가.

그의 몸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어느새 내 손은 마시다 만 와인잔을 들고 있었다.

아직 반쯤 남은 붉은 액체가 찰랑이며 멜의 시선을 끌었다. 

혹시 내가 술을 더 마실까 염려한 것인지 내가 든 잔을 뺏기 위해 손을 뻗으려 했다.

그 순간 나는 잔을 멜의 몸 위에서 기울였다.

촤륵.

“……세르베인?”

와인이 멜의 샤워가운을 적셨다. 

일부는 내 의도대로 그의 쇄골에 고였다. 그 붉은 액체가 마치 불멸을 가져다 준다는 신들의 음료인 넥타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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