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 화 (101/132)

101 화

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처음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프로셴이 눈물을 흘리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이전에 늘 그가 유약하고 멍청한 편이라고 생각했으면서 그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니. 그런데도 그걸 이상하게 여긴 적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프로셴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 고백을 혹시라도 거짓이라고 의심할 수가 없었다.

“나도 알아. 그동안 내가 그 감정을 얼마나 비웃었는지. 하지만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어떤 감정이 사랑이 될 수 있어……?”

그 말은 마치 내가 아니라 그 스스로에게 묻는 듯한 말이었다.

나는 비를 맞은 제비꽃 같은 눈동자를 보며 아연해졌다. 

그 변명 같은 말이 사실은 변명이 아니라, 진심임을 알았다.

정혼자가 있는 주제에 사교클럽에서 방탕하게 놀아나며, 시시때때로 아무에게나 사랑을 속삭이던 귀족들을 질리게 봤던 그가 나중에는 ‘사랑’이란 말만 들어도 역겨워했던 것을 기억한다.

‘세르베인.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멜을 만나기 이전, 기억이 없던 시절의 나는 스스로가 무성애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한테도 성애적으로 끌림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프로셴은 이성적으로 제 화려한 외모에 끌리지 않는 내 성향에 만족스러워했다. 

더불어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내 모습에 동질감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그랬던 그가 변했다. 

나는 프로셴이 도대체 언제부터 내게 그런 감정을 품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후회했어. ‘네게 더 일찍 고백했다면, 네게 거절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비겁한 수 따위나 계획하지 말고 솔직하게 고백했다면 뭔가 바뀌지 않았을까?’ 하고.”

“…….”

“그런데 있잖아……. 네가 말했잖아. 네가 그 인어를 만난 건 우연이 아니었다고. 그러니까, 그거지…… 운명이었던 거지.”

나랑은 다르게 말이야. 

자조하듯 피식 웃으며 바닥을 보는 프로셴의 속눈썹에는 여전히 눈물이 매달려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눈을 휘어 웃더니 소매로 눈물을 닦아냈다. 물기 어린 보랏빛 눈동자가 선명히 나를 비췄다.

“어차피 알아, 네가 그 인어를 좋아한다는 거. 조금의 여지도 없이 내 고백이 거절당할 것도 알았어. 그래도 더 늦기 전에 한 번은 말해주고 싶었어.”

“……”

“네가 결혼식 올린 후에나 ‘한때 좋아했어.’라고, 지금은 안 그렇다는 척 말하면 그건 너무…… 찌질하잖아. 하하…….”

알테슈메그를 심문하기 전 사흘 동안의 휴일. 

사실 그동안 내가 한 일은 그저 멜을 옆에 두고 노닥거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나는 멜과 함께 살 집의 수리를 계획했고, 멜에게 옷을 맞춰주며 그의 수치를 알아내 디자이너에게 의뢰했다. 

또한…… 수도의 가장 뛰어난 세공사에게 의뢰해 반지를 맞췄다.

‘그 예비 녹시렐 공작이 어마어마한 거금을 치러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반지 한 쌍을 만들라고 의뢰했다더라.’

그 소식이 세간에 떠돌지 않을 리가 없다.

결국 프로셴도 알았던 것이다. 작위 수여식만 끝나면 내가 무엇을 실행할 것인지.

프로셴은 내게 그 어떤 대답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발갛게 부어오른 눈을 하고서 싱긋 웃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음 주에 작위 수여식을 진행할게.”

“……”

“실은 준비는 진작에 끝났었어. 미나엘은 몰랐겠지만…… 그냥, 내가 비겁하게 계속 미루고 있었던 것뿐이야. 이런저런 핑계나 대면서.”

사실은 예상한 것이지 않나.

헤론시의 존재 때문에 우리를 신뢰할 수 없어서 작위 수여식을 미룬다고 했던 것은 여러모로 허점이 많은 선택이었다. 

또한, 불안하다는 것치고 프로셴은 너무나 태평히 미나엘과 나의 잠입이 길어지는 것을 용납했었다.

프로셴은 뒤늦게 나의 반응이 두려웠는지, 서둘러 뒤돌아 도망치려 했다.

타악!

나는 그에게 그 어떤 희망도 줄 수 없는 주제에 그 뒷모습을 붙잡고 말았다. 

어떤 배려의 말도 지금 이 순간에는 비수로 느껴지겠지만, 그 말을 해야 했다.

나는 몇 번이나 속으로 말을 고르다가 무던한 척 내뱉었다.

“고마워. 네가 처음 사랑을 인정했던 게 나라서 솔직히 영광이라고 생각해.”

“영광이라니…… 사람 놀리는 거야?”

프로셴이 일부러 장난스러운 척 웃으며 핀잔을 뒀다. 조금은 진심이 섞인 것일 테다.

“말주변이 없어서 미안. 그런데 진심이야. 사실 내가 타인에게 쉽게 사랑받을 부류는 아니잖아.”

내 말에 프로셴이 눈을 껌뻑껌뻑, 감았다 떴다. 

내가 말한 내용을 전혀 생각도 못 해봤다는 반응이었다.

그 반응은 조금 감동이었기에 나는 소리 없이 살짝 미소만 지었다.

“하지만 네 말대로 내가 네 고백을 받아줄 수는 없어. 그렇다고 네 사랑이 이걸로 끝은 아니라고 생각해.”

“방금 고백한 사람한테 새 사랑이 찾아올 거라고 말하는 거는 조금 가혹하지 않아?”

“그렇긴 한데, 아무리 봐도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은 미래잖아.”

“넌…… 감정이 없어?”

프로셴은 이제 눈물이 쏙 들어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금 황당하다는 기색이었다.

나는 그의 기운을 북돋기 위해 그런 건데 상황이 내 마음처럼 흐르지를 않았다. 

이건 마치…… 고백한 사람을 놀리는 것 같은 상황이지 않은가.

하지만 내게 고백하던 순간의 우는 얼굴보다는 이 얼굴이 더 나아 보였다. 나는 그를 끌어안았다.

“프로셴.”

“……왜.”

“너도 네 사랑을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너무 낙담하지 마.”

조금도 위로가 되지 못할 걸 안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밖에 없었다.

* * *

또 울음을 터뜨린 프로셴을 달래주다 보니 시간이 더 늦어버렸다.

방으로 돌아갈수록 심장이 쿵쿵 뛰었다. 멜에게 뭐라 말할 변명조차 없었다.

‘오늘 일 때문에 다시는 헤론시와 수업을 듣지 않겠다고 해도 뭐라 할 말이 없네…….’

사실 이른 오후에 이미 일정이 늦어질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용인을 통해 멜에게 소식을 전해 달라고 했었는데 그들은 멜을 찾지 못했다.

‘안 보이시더라고요……. 방 안에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혹시 계실까 봐 그 앞에서 공작님의 일정을 말씀드리긴 했어요.’

멜은 인어니까 평범한 인간은 그의 인기척을 느낄 수 없다.

아무튼 성안의 다른 곳을 돌아다니지 않았다면 그는 내 방에만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늦으리란 건 들을 수 있었겠지.

그는 여전히 사람이 무서워서 방 안에 숨어있었던 것 같았다. 

바깥에서 사용인들이 불러도 대답조차 하지 않은 채.

적어도 그가 사람을 홀리는 능력을 제어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나 두려움에 떨 필요는 없을 텐데. 마음이 심란했다.

달칵.

“멜……?”

문을 연 순간, 나는 세게 몰아치는 바람에 눈을 감아야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내 방의 가장 큰 창문이 열려 있었다. 커튼이 비바람에 속절없이 휘날렸고, 물방울이 내 얼굴까지 튀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멜이 있었다.

터엉!

“아, 세르베인……. 미안해. 내 예상보다 너무 늦어버려서…….”

창문이 닫히고, 온몸이 젖은 멜이 내게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멜이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갔음을 알았다. 

또한 나의 귀가보다도 늦게, 지금 이 순간에 돌아왔다는 것을.

그가 혼자서, 그것도 이 성을 벗어날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성의 출입문에는 기사들이 있으니까 멜이 실수로라도 길을 잘못 들어 그곳으로 향하면 내게 전해지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창문으로 나갔을 줄이야. 이번이 처음이 아닐지도 몰랐다.

“세르베인. 내가 늦어서 화난 거야……? 미안해……. 나도 저녁때쯤에는 돌아올 수 있을 줄 알았어. 말하고 나가면 네가 날 안 보내줄 것 같아서……. 아니, 그러면 당연히 안 나가겠지만 이번은 어쩔 수가 없어서…….”

아무 대답 없는 나를 보며 멜이 안절부절못했다. 습관처럼 제 빈 손목을 만지작거리는 손이 보였다.

멜의 예상과 달리 나는 화나지 않았다. 너무 당혹스럽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어차피 멜이 돌아왔으니 상관이 없다고 여겨서 그런 걸까.

그가 어디로 향했는지 불안해하고 무서워하는 것보다 의아함이 앞섰다.

“……어디 갔다가 왔어?”

“아……! 세르베인! 더 이상 기사들을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그 순간, 멜이 의기양양하게 칭찬을 바라는 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폭풍우가 삼키지 못한 달빛이 그 청순한 얼굴에 만연했다.

‘어디를 갔냐고 물었는데 갑자기 기사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거지?’

멍청히 서 있는 내게 멜이 순진한 얼굴을 하며 다가왔다. 

그 순간 비릿한 향이 코끝을 찔러왔다.

“혹시 식사 했어……? 나는 아직 안 했어. 너랑 약속했잖아.”

“…….”

“음…… 사과, 사과 맞나? 사과는 한입 베어 물었어. 확인하고 싶어서…… 그런데 괜찮아!”

멜은 헤실헤실 웃으며 내 어깨를 감싸 문 쪽으로 나를 이끌었다. 식당으로 가려는 것 같았다.

그의 몸이 내게 닿자, 나는 어둠 속에서 멜의 옷이 비에 젖은 게 아니란 걸 확신했다.

“아…… 피가 묻어버렸네.”

멜의 옷을 적신 피가 내게 옮겨왔다. 

멜은 곤란한 얼굴을 하고서 나를 내려다봤다. 꽤 침울한 안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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