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 화 (100/132)

100 화

‘손에 피를 많이 묻히면 능력이 사라질 수도 있나.’

넝마가 된 꼴의 알테슈메그를 내려다봤다. 그는 정말로 본인이 죽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기색이었다.

그 꼴을 보니 문득 내가 왜 여기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나 의문이 들었다.

“정말로 지하 감옥을 경험해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군.”

나는 마음에도 없는 협박을 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시간이 너무 늦었다. 슬슬 돌아갈 때가 되었다.

“그대의 신성력 따위엔 관심 없어. 어차피 평생 바깥세상에 공표할 일 없이 살아야 할 테니까. 살고 싶다면 말이야.”

말로는 관심이 없다고 했지만 사실 꽤 부러운 능력이긴 했다.

그 신성력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알테슈메그의 몸을 칼끝으로 살짝 그었고, 그 정도 상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으니 그럴 수밖에.

“마지막 기회를 주지. 평생 입 다물고 사는 것을 조건으로 이 땅에 발을 붙일 수는 있게 해주겠어.”

그 순간 멍청히 허공만 보던 눈동자에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알테슈메그는 허겁지겁 나를 올려다봤고, 내가 진심이라는 것에 더욱 당혹스러워하는 얼굴을 했다.

그는 어떤 것을 묻고 싶은 듯, 몇 번 입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끝내 삼켜버리더니 다른 말을 꺼냈다.

“……조건이 뭡니까?”

당연히 조건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점이 좋았다. 나름 제 분수를 알고 있지 않나.

하지만 내가 그에게 내민 조건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더는 숨기는 것이 없다고 맹세할 수 있나?”

내가 생각해도 이건 너무 시혜적인 대우였다. 돌아온 미나엘과 프로셴이 화를 낼 게 분명하다.

나는 어째서 이 남자에게 몇 번이나 자비를 베푸는 것일까. 사실은 이 남자뿐만이 아니지 않나. 몰락을 목전에 둔 모든 이들에게 그러했다.

나의 가문이 하루아침에 몰락한 날, 죽음의 앞에 선 내가 끊임없이 기도하며 원했던 것이 그런 기회였기 때문일까. 

내 삶을 지옥에 몰아넣은 이들의 후손에게도 내 다짐처럼 냉혹해질 수가 없었다.

알테슈메그는 이번에도 어떤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술을 떨었지만 고개를 푹 숙이며 답했다.

“……없습니다.”

* * *

알테슈메그에게 감시자를 붙여 그의 집으로 돌려보내겠다는 결정에 미나엘이 크게 반발했다. 저런 위험 분자를 사지 멀쩡히 살려둔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사실 내가 그동안 교황 쪽 인물들을 적극적으로 제거하지 않은 건 세력 균형을 위해서였어.”

나는 그녀를 이해시키기 위해 그동안 미뤄뒀던 이야기를 이제야 꺼냈다.

“너는 내가 교황을 살려두고 그냥 귀양만 보내려 했을 때 분명 미친 줄 알았겠지.”

“사실이다.”

“……그래. 아무튼, 그냥 착한 척하려고 그런 건 아니었어.”

내가 알테슈메그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겠다고 하자 미나엘은 잠시 이성을 잃었었다.

그녀는 내게 참아왔던 것이 상당히 많은 듯, 서슴없이 내가 해왔던 결정들을 비꼬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를 대신해 교황과 그의 측근들을 처리한 것도 결국 나였지.’

‘그건-.’

‘알량한 동정심인가? 혹은 이제 와서 손에 피 묻히지 않고 깨끗한 척하고 싶어서 그러나? 아니면 귀족파 사이에서 천사표라도 얻어보려는 심산인가? 그것에 이득이 있는지 나는 모르겠군.’

방금 전의 일을 생각하니 다시 간담이 서늘해졌다. 

오죽하면 마찬가지로 내 결정에 불만을 품었던 프로셴은 차마 의견을 표하지도 못하고 눈치만 살폈을까.

나는 간신히 진정시킨 미나엘에게 계속해서 설명했다.

이제부터 할 말은…… 왕인 프로셴을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니었지만, 그는 이미 내 계획을 알고 있으니 직접적으로 말했다.

“네가 말한 대로, 그래. 내가 유약하게 그들을 처벌했던 것은 사실 왕권과 귀족들의 권력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어. 이대로 가면 왕권이 매우 강해질 테니까.”

하지만 미나엘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네 말대로 유약하게 굴면 왕권은 약해지겠지. 그런데 우리가 왕권이 약해지기를 바랄 이유가 없지 않나. 국왕파인 우리에게는 그게 이득인데.”

“……나는.”

이제부터가 문제다. 

미나엘은 쭉 귀족 여성으로 살아왔기에 내 선택에 동의하리라 생각하지 못해서 그동안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미나엘의 진짜 정체, 그녀가 평범한 귀족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니 밝힐 수 있었다.

“나는 신분이 없는 사회를 만들려고 했어. 왕과 귀족이 동등해져 마침내 그 차이가 사라지고, 점진적으로는 권력자들과 평민들 사이의 차이 역시 사라지도록 하려고 했지. 왕과 귀족 사이의 차이가 없어진다면, 귀족과 평민 사이를 가르는 혈통의 특별성 역시 부정당하는 것이니까.”

“뭐……?.”

“그런데…… 아무래도 지금까지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긴 해.”

미나엘이 나를 위해서 한 일, 녹시렐 공작을 위시해 교황파 귀족들을 처리했던 일들을 생각했다. 이미 왕권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그래서 나는 원래대로라면 먼 훗날에 일어나도록 계획했던 일을 앞당기기로 했다.

“대신 이제는 왕권을 이용해 평민을 직접 정계로 들이려 해.”

* * *

미나엘에게 폭탄을 던져준 주제에 나는 태평하게 알테슈메그를 배웅하러 나왔다. 

미나엘과 단둘이 한 공간에 있는 것이 두려웠던 프로셴도 나와 함께였다.

나는 예의상 당장 마차를 타고 가테 저택으로 향하려던 알테슈메그를 붙잡고 권유했다.

“하루 더 머물다가 가는 게 낫지 않겠나? 시간이 늦었는데.”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사실 자정을 넘은 시간만 문제가 아니었다. 바깥은 폭풍우가 심했다. 

이런 날씨에서 마차를 타고 먼 길을 가는 것은 위험하다.

하지만 알테슈메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 돌아갈 것이라고 의견을 굳힌 모양이었다. 

우리가 있는 이 성이 그에게는 지옥 같을 테니 이해는 됐다.

마지막으로 그를 보내주기 전에 프로셴이 알테슈메그의 향후 처우에 대한 일을 예고했다.

“당연하겠지만, 그대 가문에 약속된 후작 지위는 없는 것으로 하지.”

“……감사합니다.”

“남작가나 평민으로 강등시킬지 고려해보겠어.”

“감……사합니다.”

직위를 강등시킨다는 말에 알테슈메그의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그가 뭐라고 반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사실 신성이 부정당한 시대에 신성력을 가진 인간으로서 목숨을 부지한 것이 이미 기적이었다.

다그닥, 다그닥-.

나와 프로셴은 알테슈메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는 우리가 붙여준 여러 명의 감시책들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갔다.

쏴아아-.

비가 더욱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물안개 때문에 시야까지 불분명해졌다. 

그때 먹구름 낀 하늘을 가르는 번개가 보였다.

우르릉, 쾅!

얼마 지나지 않아 귀를 찢을 듯한 천둥소리에 옆에 있던 프로셴이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보자 반사적으로 말이 나왔다.

“멜도 천둥소리를 무서워하려나.”

그 순간 알테슈메그를 배웅하던 모습 그대로 성문 쪽을 바라보던 프로셴이 숨을 멈췄다.

엄청난 빗소리 아래에서 그걸 알 수 있었던 건, 그의 몸이 일순간 굳어서 미동도 없었기 때문이다.

‘왜 그러지? ……그냥 내 착각인가.’

갑자기 분위기가 견딜 수 없게 어색해졌다. 하지만 그럴 이유가…… 없지 않나?

영문은 모르겠지만 내 쪽에서 먼저 인사를 하며 분위기를 푸는 편이 나아 보였다. 

‘오늘 고생 많았고, 내일 보자.’ 정도면 적당할 것 같았다.

내가 작별 인사를 건네려고 할 때, 프로셴이 입을 열었다.

“있잖아, 저번에 네가 내게 무슨 말을 하려던 거였냐고 물었잖아.”

내가 그랬던 적이 있었나? 

무심코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자 프로셴이 푸핫, 실없게 웃고 말았다.

하지만 그 웃음은 조금도 우스워서 나온 것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네가 잠입에서 돌아온 날, 네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인어가 나타났었잖아.”

“아, 아…… 그랬었지.”

“그래서 말 못 했는데, 네가 무슨 말 하려고 했냐고 나중에 물었었잖아. 무슨 일 때문인지 온 성의 복도가 물바다가 되었던 날에 말이야.”

이제야 기억났다. 그런데 조금…… 놀랍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했다.

나는 그가 이렇게나 세세하게 사소한 날들을 기억하며 사는 줄 예상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기억력이 안 좋은 편일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는데 내 예상이 틀렸다.

프로셴은 내가 그날 일을 완전히 기억해낸 듯하자, 못다한 말을 이으려는 것 같았다.

그는 빙긋 미소 지었다. 결심한 듯, 혹은 체념한 듯한 얼굴이었다.

“좋아해.”

“…….”

“그 말을 할 용기가 안 나서, 그동안 비겁한 방법으로 널 얻으려고 했었어. 네가 날 사랑하지 않아도 내 곁에 묶어 두기라도 하고 싶었어. 그래서 미안해.”

빗방울을 가득 머금은 바람이 우리를 갈랐다. 

나는 끊임없이 나뭇가지가 어딘가에 부딪히고 꺾이는 소리에 한눈을 팔았다.

즉, 잘못 들은 것인가 의심했다.

“……미안한데, 뭐라고?”

“사-.”

프로셴의 얼굴이 한순간 일그러졌다. 

얼굴 위에 억지로 덧씌웠던 웃는 가면이 흘러내린 순간이었다.

그는 더는 잘못 들을 수 없게 짧게 말했다.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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