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 화 (99/132)

99 화

그는 알테슈메그의 감정적 반응까지 기록했다. 객관적인 증거로 사용하지는 못하더라도 사실 우리끼리 참고하기에는 괜찮은 자료였다.

이전에 남의 눈치를 많이 봐야 하는 일을 했던 만큼, 그는 속으로만 뒤틀린 귀족의 기분을 잘 파악해냈다.

(피곤한 기색으로 중얼거리듯) ……저는 신성왕국으로 돌아가는 것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종교를 없애는 것은 과한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잠을 재우지 않을수록 알테슈메그의 답변에 변화가 생겼다.

더욱 진실에 근접한 대답들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착실히 조사에 응했군.’

고문을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알테슈메그는 진실을 꽤 많이 토해냈다. 그의 가문만큼은 구제해주겠다는 것이 효과적인 회유였던 건가.

‘애초에 다시 배신하지 않았으면 될 일을.’

나는 알테슈메그가 제출하고, 몇 번이나 입으로 더 증언한 귀족 가문들을 훑었다. 예상대로 그날 사교 클럽에 모였던 이들보다 더 많은 이들이 그곳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거슬리는 점이 있었다. 편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78차 질문: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다는 게 무슨 의미인 것 같나.

78-1차 답변: 비늘이…… 떨어졌다는 의미 아닐까요?

78-2차 답변: 저는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

.

.

78-25차 답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 같습니다……. 무슨 내용인지는 저야 모르죠…….

(이후 편지 내용에 대한 다른 검증을 통해 본인이 작성한 바가 아닌 것으로 추정됨.)

헤론시가 분명히 주장했다. 그 편지의 ‘어머니’라는 표현이 교리상 사용되는 표현일까 봐 손수 공부까지 했다고. 하지만 교리에는 그 내용이 없었다.

‘신성 왕국 교리로 인해 귀족들의 정부, 혼외 임신은 엄격히 금지됐다.’

혼외자일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면 가테 백작이 길길이 날뛰었을 테니.

‘가까운 관계의 친척 아이인가? 혹은 후원자일 수도 있다.’

나는 온갖 추측들을 일단 억눌렀다. 아직 해야 하는 질문이 있었다.

“미나엘, 프로셴. 수고했어. 이제부터는 내가 맡도록 하지. 이만 가서 쉬어도 좋아.”

“와- 정말?”

“나는 남도록 하지.”

순식간에 밝아졌던 프로셴의 얼굴이 어두침침해졌다. 그는 미나엘을 괴물 보듯 하다가 어쩔 수 없이 말했다.

“나도…… 남을게.”

굳이 눈치 보며 남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알테슈메그는 질린 얼굴로 우리 셋을 바라보고 있었다. 같은 질문만 25번씩 받았을 테니 그럴 만도 했다.

“예전에 자네가 녹시렐 저택 3층에서 떨어졌었지.”

“……예.”

“어떻게 다리뼈가 부러진 것이 찢어진 손바닥보다 빨리 나을 수 있지?”

알테슈메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신체를 제어하기 힘든 것 같았다. 그는 살짝 떨리는 입술로 답했다.

“전, 기사입니다. 3층에서 떨어질 때 낙법을 사용했죠. 그래서…… 사실 뼈가 부러지진 않았습니다. 염좌 정도……? 사실 조금 부러졌는데 그게 깔끔히 부러져서…….”

횡설수설하는 얼굴을 무심히 내려다봤다. 사교 클럽에서 알테슈메그를 만났을 때, 그의 다리가 나았고 손은 낫지 않은 상태였다는 건 다른 이들에게 미처 알려주지 않았던 사항이었다. 그게 중요한 단서가 될 거라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미나엘. 그렇다고 해도 3층에서 떨어져 다친 다리가 한 달이 조금 지났을 때 낫는다고 생각해?”

내가 심문하는 동안 프로셴을 대신해 대화록을 작성하던 미나엘이 고개를 들었다.

“다시 떨어트리고 데려와 진찰시켜보면 되겠군.”

“죄송합니다!”

그 순간 알테슈메그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손에 얼마나 식은땀이 흐른 것인지 그의 손에 닿은 카펫의 색이 변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공작님이 사랑하는 그 남자 역시 저와 같은 존재이지 않습니까! 다시는 욕심 부리지 않을 테니 제발……!”

“같은 존재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나는 진심으로 이해되지 않아서 물은 것이었지만 알테슈메그는 비꼬는 것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는 내가 부정하려는 것인 줄 알았는지 다급히 항변했다.

“그 남자가 제 손을 찔렀잖습니까! 그래서 제 손이 낫지 않았다는 걸 아시면서 왜 그러십니까!”

“…….”

“그 남자가 저와 같이 신성력이 있기에 그런 것이잖습니까! 그래서 그 남자가 찌른 상처는 신성력으로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저를 신성력이 있다고 죽이시면, 그 남자 역시 살아서는 안 될 겁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미나엘은 물론이고 프로셴 역시 잠이 한순간에 달아난 것처럼 보였다.

뒤늦게 우리의 반응을 보고 알테슈메그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눈치였다. 그의 얼굴이 시체처럼 새파래졌다.

하지만 너무나 확신하고 있는 잘못된 명제, ‘멜 공자 역시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제 실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알테슈메그의 덜덜 떨리는 눈동자를 마주 본 채 입을 열었다.

“심문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군.”

* * *

이제야 아귀가 들어맞았다.

알테슈메그, 그러니까 가테 백작 가문이 어째서 신성 왕국을 옹호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주축을 이룰 수 있었는지.

“그저 교리상 존재하는 능력인 줄 알았는데…….”

“이 나라에서 신성력을 가진 첫 번째 인간이 저 자라니. 신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군.”

나도 미나엘의 말에 동의했다. 여태껏 몇 번의 교황이 교체되는 동안 신성력이 있었던 자는 없었다. 그만큼 알테슈메그의 존재는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교황청에서 가테 가문을 억압했나.’

가테 가문은 정작 신성 왕국이 전성기이던 시절에는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다. 제게 없는 힘을 가지고 있는 어린 알테슈메그를 시기한 교황의 탓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교황의 존재가 사라졌다. 또한 종교 역시 사라지려 하자 현시점에서 가테 가문은 귀족파 사이에서 누구보다도 강한 구심점이 되었을 것이다.

‘그동안의 패악 때문에 신을 믿지 않았던 백성들도 신성력을 가진 존재를 직접 목격한다면 얼마든지 생각이 변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귀족파가 헤론시를 손에 얻기 전에 알테슈메그 가테에게 집착했던 것이다.

“……그러면.”

바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포박된 채 바닥에 쓰러진 알테슈메그를 바라봤다. 그는 초점 없이 쓰러진 채 허공을 바라보다가 나를 올려다봤다.

“그자는…… 정체가 무엇입니까.”

멜의 존재를 묻는 것이다. 나는 노을이 불타는 것 같은 알테슈메그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는 애초에 네가 믿는 신의 존재도 모르는 이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절대 평범한 인간은 아닐 것입니다.”

쏴아아-!

바깥에는 폭풍우가 치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예상하긴 했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날씨였다.

투웅!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번번이 커다란 창문을 치고 도망갔다. 바깥세상이 새까맸다.

시각은 이미 저녁을 훌쩍 지나버렸다.

나는 알테슈메그의 노을 같은 눈동자를 계속해서 바라봤다. 어쩌면 그는 과거의 나와 닮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말했다.

“왜 그렇게 죽음이라도 맞이한 것처럼 자포자기한 얼굴이지?”

“당신은 교황까지 죽인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신성력을 가진 일개 백작 가문의 아들 따위, 쉽게 죽이시겠죠.”

이전에 한번 목도한 적 있는 눈빛이었다. 처음 알테슈메그를 녹시렐 저택에서 마주했을 때 그는 끝없는 증오를 가지고 있었다.

그 증오의 원인은 내가 제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르는 존재기에 존재했던 것인가.

구구절절, 나는 교황을 죽일 의도가 없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냥 물끄러미 알테슈메그를 내려다봤다.

똑똑.

“공작님……?”

시간이 되었는데도 내가 약속장소로 오지 않자 틸리타와 다폴샤가 이곳에 왔다. 그들은 바닥에 엎드린 익숙한 얼굴, 알테슈메그 가테를 보고 흠칫 굳었다.

하지만 알테슈메그는 새로운 두 사람이 집무실에 들어왔음에도 줄기차게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프로셴.”

“응?”

“저들은 내가 살던…… 아니지. 아무튼, 부정한 땅에 살던 이들이야. 그리고 이번에 우리와 거래를 하기로 했지.”

“아아…… 응. 편의를 봐달라는 거지?”

“그래. 부탁할게. 세부 계약 내용은 미나엘이 알고 있으니 그녀와 함께 일 좀 처리해줘.”

“알겠어.”

달칵.

모두가 나간 빈 집무실에는 거센 비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만 들렸다. 알테슈메그는 차분히 눈을 감으며 말했다.

“저를 죽이고 제 가문은 부디 보존해주십시오.”

“…….”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여태껏 심문하셨으니 아실 것 아닙니까. 모든 건 저의 독단이었고, 신성력 역시 저 혼자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참 의문스러웠다.

나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는데, 그의 존재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내 눈앞에 신의 힘을 가진 자가 나타났다. 그것도 즈레이카 왕국에서 처음으로.

“죽이라니. 그대라면 내가 혼자 남은 틈을 타 나를 죽일 시도를 해야 정상 아닌가?”

털썩.

일부러 알테슈메그의 앞에 쭈그려 앉아 조소를 지었다.

그저, 앞에 선 사람은 죽일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사람을 무도한 이로 몰아가는 것이 거슬려서 놀려줄 셈으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알테슈메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렇죠. 어차피 신의 사자라고 하기에는 손에 피를 너무 묻혀버렸죠.”

“…….”

“이 미약한 신성력 역시 사라지길 바라며 제게 더 죄를 지으라고 하는 걸 보니, 당신은 정말로 녹시렐의 악마였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