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 화 (98/132)

98 화

나는 능숙하게 거짓말했다.

“내가 몽유병이 있었던 모양이야. 그날 놀라게 해서 미안하군.”

“아…….”

“내일 저녁에 시간을 비워두길 부탁한다고 그대의 어머니께 전해주게. 여태껏 왕성에서 시간을 허비하게 해서 미안하군.”

“아, 아닙니다! 좋은 경험이었어요. 제가 살면서 언제 이런 곳엘 오겠습니까…….”

다폴샤는 화들짝 놀라며 두 손을 저었다. 그 말에는 상당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부정한 땅에 묶여 살 때, 누구보다도 바깥 지역의 부유한 삶을 동경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으니.

나는 다폴샤의 쾌유를 한 번 더 빌어주고 그녀와의 자리를 파했다. 다폴샤는 어딘지 묘한 얼굴로 나와 멜의 얼굴을 살피다가 물러났다.

그녀와 인사를 끝낸 후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러면 알테슈메그의 다리는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사교 클럽에서 알테슈메그를 만난 건 녹시렐 영지에서 돌아온 지 두 달도 채 되기 전이었다.

‘고작 한 달 하고도 조금 더 지났을 때지.’

게다가 그 당시, 그는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건 멜의 검에 찔린 상처였다.

뼈가 부러진 것이 다 나을 정도인데 검에 찔린 손의 상처가 낫지 않았다는 건 이상하다.

“세르베인. 저 사람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그때 멜이 내 허리에 손을 두르며 물어왔다.

그저 잠입하는 동안 알게 된 인맥이라고 소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멜은 이제 나의 두 번째 생에 대해서도 인식하고 있기에 굳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내 두 번째 삶은 녹시렐 영지에서 자란 고아였어.”

“……응.”

“그런데 그곳이 당시에 부정한 땅으로 지정된 탓에 그냥 마을 전체가 매우 가난했었어. 그때 저 아이의 어머니, 틸리타를 돌보며 돈을 벌었거든.”

“…….”

“그런데 얼마 전 내가 잠입한 곳에서 그들을 만나게 됐어. 꽤 대단한 우연이지.”

나는 편한 대로 설명하다가 문득 멜이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정한 땅’이라는 건 인간들의 역사를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니까.

“부정한 땅…… 맞아. 그랬지…….”

그런데 뜻밖에도 멜은 이해한 얼굴이었다. 그 순간, 내가 없는 동안 그가 책을 아주 많이 있었다고 했던 게 기억났다.

멜이 의문이 해소되었는지 빙긋 미소 지었다.

나는 어째서인지 그 웃음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넘겨버렸다.

휴일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끼익-.

“왔군.”

다음날, 아침 일찍 접견실 문을 열자 미나엘이 무심하게 반겨왔다.

나는 제시간에 맞춰 왔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인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알테슈메그 가테는 이미 바닥에 꿇어 앉혀져 있었다. 또한 그 구겨진 예복과 초췌한 얼굴은 금방 심문을 받은 사람의 상태가 아니었다.

또한 미나엘의 앞에 놓인 탁자 위 커피와 다과 역시 꽤 사라진 상태였다.

‘내가 늦게 온 건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상당히 일이 진행된 듯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날씨가 흐린 탓에 조금 늦잠을 잤던 것 같기도 하다.

‘세르베인.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았는걸…… 더 자…….’

‘안 되는데…… 나 오늘-.’

‘으음…… 더 자자. 응?’

……절대 내게 엉겨오는 멜의 미인계에 당해 늦은 건 아니다.

그저 오늘 비가 꽤 많이 내릴 것인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해가 덜 뜬 듯이 창밖이 어두침침했던 탓이다…….

사실 그 일 외에도 조금 시간이 지체될 만한 사건이 있기는 했다.

아침 식사 시간, 나는 멜에게 억지로 음식을 권하지 않았다. 예의상 그의 앞에 간단한 과일과 샐러드가 차려졌지만, 내가 먹지 않아도 된다고 하자 멜은 억지로 음식을 먹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래서 오늘도 멜은 그저 나를 지켜보고, 나는 혼자 음식을 먹었다. 그런데 나를 빤히 바라보던 멜이 어떤 전조도 없이 말을 꺼냈다.

‘나 네가 바라는 대로 할게.’

‘……어?’

‘오늘부터 그 남자와 공부를 하겠다는 말이야.’

그가 헤론시와 수업을 듣겠다고 깜짝 선언을 한 탓에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내가 너무 기뻐하자 멜은 은근히 떨떠름해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살짝 토라진 그를 달래는 데에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내가 오늘 최대한 일찍…… 아.’

‘…….’

‘미안해, 멜. 오늘은 내가 조금 늦을 것 같아.’

‘괜찮아, 세르베인.’

요즘 들어 부쩍 이해심이 아주 많이 늘어난 듯한 멜은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내 곁에 다가와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는 단지 아주 평범한 것을 요구했다. 어쩐지 웃음기가 서린 음성으로.

‘대신 오늘 저녁은 나와 함께 먹도록 해.’

멜은 식사를 하지 않으니 내게 저녁까지는 돌아오라는 걸 에둘러 표현한 것일 테다.

나는 식은땀을 죽죽 흘리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었다.

아무튼 그렇게나 많은 일이 있었으니 늦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시계를 다시 확인했을 때, 나는 오히려 약속 시간보다 약간 일찍 도착했음을 확인했다.

“……미안한데 혹시 내가 약속 시간을 잘못 알았나?”

그리 물었지만 미나엘은 가볍게 고개만 저었다.

영문을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늦은 게 아니라니 안심하고 내 자리로 찾아갔다.

‘어차피 프로셴도 아직 안 왔다. 그가 그래도 시간 약속은 잘 지키는 편이니 나도 늦은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리 생각한 순간에 발견하고야 말았다.

프로셴이 접견실 구석 의자에서 널브러진 채 잠들어 있었다.

“뭐야?”

꽤 당혹스러워 저절로 의문문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같은 장소에 있는 미나엘이나 알테슈메그는 힐끔 나를 볼 뿐, 그걸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영문은 모르지만 나 역시 잠든 프로셴을 무시하고 내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고 나니 고개를 숙인 알테슈메그의 얼굴이 조금 더 잘 보였다. 그런데 유독 그의 얼굴이 피로해 보였다.

“자네는 왜 벌써 피곤한 기색이지?”

비꼬려는 의도가 아니라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아서 물었다.

심문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미나엘과 프로셴이 이곳에 일찍 도착해 그를 심문했다고 해도 고작 한, 두 시간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내 부탁으로 미나엘은 온건하게 심문을 진행했을 것이다. 알테슈메그의 몸에서 어떠한 외상도 찾을 수 없다는 게 그 증거였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알테슈메그는 시선을 바닥에 둔 채 더듬더듬 답해왔다. 상당히 제정신이 아닌 듯 해 보였다.

‘그냥 정신력 탓인 건가.’

참 나약한 남자라고 생각할 때 프로셴이 깨어났다.

“으…… 어…… 끝났어……?”

어딘가 잠이 덜 깨 늘어진 발음이 참 인상적이었다.

어째서 심문 도중에 자고 있었느냐는 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한가지 바라는 점이 있어서 말했다.

“이제 왕으로서 위엄을 갖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우리들 앞에서만 허술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면 괜찮았다.

하지만 알테슈메그는 엄연히 우리에게 속으로 반기를 든 인물이다. 그런 이에게 허술한 모습을 보여봤자 좋을 일 없다.

“미안…… 조금 피곤해서. 언제 잠들었지…….”

평소처럼 능글맞게, 혹은 멍청한 척을 하며 은근슬쩍 상황을 빠져나가던 것과 달리 그는 수긍하며 더듬더듬 옷매무새를 가다듬기만 했다.

‘정신이 없나 보군.’

이게 어찌 된 상황인지를 몰라 미나엘을 바라보니, 안색 하나 바뀌지 않은 얼굴이 답해왔다.

“네가 온건한 방법으로 그를 심문하라고 했지.”

“그래.”

“고문은 피해야 하니 다른 방법을 택했다. 몸에 상처가 남지 않도록.”

그 말을 듣는 순간 떠오른 방법이 있었다. 그건 죄인을 심문하는 기술 중 굉장히 고전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흘 전부터 잠을 재우지 않았다. 일정이 변경된 줄 몰랐던 프로셴이 들렀기에 그도 여기에 붙잡아뒀지.”

“뭐……?”

“나만 밤을 새우기에는 적적해서.”

미나엘이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어쩐지 평소에 차만 마시던 이의 앞에 커피잔이 놓여 있었다.

나는 이제 알테슈메그의 상태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봤다. 일반인이 사흘 동안 자지 않았는데 저 정도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거라면 꽤 대단한 수준이다.

미나엘은…… 아직 나조차 그녀의 정체를 확신하지 못하니 예외로 뒀다.

“하암. 우리가 엄청 고생했다구…… 그래서 세르베인, 네가 오늘 할 일은 없을지도 몰라. 우리가 물어볼 질문은 다 했거든…….”

프로셴이 줄기차게 기지개를 켰다. 그는 주섬주섬, 본인이 반쯤 깔아뭉개고, 혹은 반쯤 바닥에 쏟았던 서류를 갈무리해 내게 건넸다.

‘미나엘이 심문하고 프로셴이 서기 역할을 했군.’

그가 어느 대목에서 강한 졸음을 느꼈는지 흐트러진 필체가 고스란히 반영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문체였기에 읽는데 어렵지는 않았다.

왕족, 그것도 왕이 사용하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간드러진 문체였다.

팔락, 팔락…….

나는 미나엘의 질문과 알테슈메그의 답변이 기록된 서류를 살폈다. 서류에는 사흘 동안 진행된 심문의 모든 질문과 답변이 기록되어 있었다.

내가 서류를 넘길 때마다 알테슈메그의 목젖이 움직였다. 내가 이 심문을 마치길 바라는 모양이었다.

‘같은 질문을 반복적으로 했군. 신뢰성을 높이는 기본적인 방법이지.’

은근히 짜증 난 기색으로 같은 대답을 함! 아직 상태가 멀쩡해 보임.

서류 중간중간에 프로셴이 마치 고자질하는 것처럼 제 생각을 덧붙인 부분들이 보였다.

다-임-공-유-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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