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 화 (97/132)

97 화

내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멜의 목부터 서서히 귀 끝까지 분홍빛이 올라왔다.

이내 그는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게. 일단 외부인은 안 들어오게 하면 좋겠어.”

……나는 집 구조에 대해 말한 건데.

나는 헛헛하게 웃다가 이내 훌쩍 흘러버린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는 정말 갈 때가 되었다.

달칵.

멜은 내가 시계를 보자 작별을 예상했는지 조금 침울한 얼굴로 찻잔만 내려다봤다.

두 손으로 잔을 감싼 채, 찻물 속을 들여다보는 모습은 마치 호기심 많은 고양이 같았다.

“…….”

그 모습을 내려다보니 문득, 충동이 들었다.

“멜.”

그 이름을 부르며 그가 든 찻잔 위로 한쪽 손을 가볍게 올렸다. 천천히 누르자 멜이 찻잔을 자연스레 탁자 위에 두었다.

“왜 그래, 세르베인?”

나를 올려다보는 푸른 눈동자에 무표정한 내 얼굴이 비쳐 보였다. 하지만 정말 무감정해서 그런 표정을 지은 건 아니었다.

의아한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충동적으로 그 입을 맞췄다.

“……!”

멜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혀를 섞었다. 마치 그가 오늘 아침에 내게 하였듯이.

키스는 그다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멜이 너무 놀란 것 같았기 때문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세, 세, 세르베인…… 어, 어떻게…….”

입이 자유로워지자마자 멜이 내 이름을 심하게 더듬으며 불렀다.

나는 여름의 복숭아처럼 수줍은 두 뺨을 감싼 채 그의 이마에 내 이마를 겹쳤다. 웃음이 흘렀다.

“멜. 내가 살아온 시간을 다 합치면 얼만큼인지 알아?”

나는 이제 알았다.

멜이 저택에서 내게 포옹과 가벼운 뽀뽀만 했던 것은 그의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늘 그의 시선에 어렸던 세르베인 녹시렐을 위한 것이란 걸.

사실 그 시절에도 수조 속의 너를 끄집어내 입 맞추고 싶었던 내 마음을 알까. 그때 이미 실행하긴 했지만.

“사랑해. 나도 너와 함께하는 모든 것을 원해왔어.”

그 말이 끝마침과 동시에 내 목을 감싸 끌어당기는 너의 손길을 느꼈다.

네가 나를 가두었던 그 호수의 물을 삼켰던 것처럼, 너를 삼켜냈다.

* * *

멜이 어떤 대상을 홀리게 하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다만 내 경험상 멜에게 홀리려면 한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멜을 꾸준히 봐올 것.

물론 이걸로 설명되지 않는 사례도 있긴 했다.

첫 번째는 나의 아버지였던 녹시렐 공작.

당시, 아버지는 내게 주었던 멜을 죽이려 했었다.

그 시도가 나로 인해 불발된 후에는 멜을 해치지 않았지만, 그가 꾸준히 멜을 감시해왔으리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 가능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멜에게 홀리지 않았다.

두 번째 예외는 내가 멜을 녹시렐 저택에서 빼내 왔을 때 마주친 부랑자다.

‘그 남자는 마주친 즉시 멜에게 홀렸지.’

길에서 마주친 부랑자와 그 시절의 나를 포함한 소수 사용인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바다, 혹은 멜을 찾아왔던 인어는 이에 대한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순순히 내게 도움을 줄 것 같지는 않아. 멜을 바다로 데려가려고 득달같이 달려들지 않으면 다행이지.’

따라서 그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할 테다.

그래서 나는 독자적으로 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군.’

나는 멜의 얼굴을 가리지 않고 그와 함께 왕성 내부를 배회했다. 마주치는 사용인들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꽈악!

“세르베인, 왜 그래?”

“……미안.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성안을 순찰하는 한 무더기의 기사들을 마주칠 때면 무의식적으로 멜의 손을 꽉 잡고 말았다. 부디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이 멜과 마주 잡은 손에는 차지 않기를 바랐다.

혼자 있을 때면 오히려 전생의 기억이 희미했다. 하지만 멜과 함께 있을 때면 그 순간의 기억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선명해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기사들을 보면 움츠러들곤 했다. 기억이 없던 때에는 조금도 그러지 않았으면서.

“……괜찮아, 세르베인.”

촉.

멜이 꽉 붙잡은 내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멜은 내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를 것이다. 그가 여태껏 들은 것은 고작해야 내가 꽤 불행한 마지막을 맞이했을 것이라는 설명뿐이니까.

“다시는 네가 두려워하는 일 따위 생기지 않을 거야.”

하지만 멜은 나의 감정만큼은 너무나 쉽게 눈치채서, 잘 모르는 상태에서 하는 위로일 텐데도 그게 참 마음에 와닿았다.

나는 그가 내게 했듯이, 그의 손을 당겨와 입 맞췄다. 살짝 간지러웠는지 눈꼬리를 휘며 미소 짓는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그 순간, 여러 명의 사용인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다른 쪽으로 둘러 가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우리와 최대한 거리를 벌린 채,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말없이 인사만 하고 지나쳤다.

애초에 멜의 얼굴을 본 일반인들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성을 배회하고 있었다.

나는 멜의 손을 잡고 조심스레, 그들이 지나간 코너를 향해 다가갔다.

예상대로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남자…… 그 사람이지……?”

“드디어 의부증이 개선되셨나 봐!”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 사용인들은 멜의 외모보다, 내가 멜의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 놀란 것 같았다.

‘반응이 천지 차이군.’

그들 이전에도 이미 여러 사람과 마주쳤었다. 몇몇은 멜의 얼굴을 보고 우뚝 굳어 서기도 했다.

다행히 그건 홀렸다기보다, 지나치게 잘생긴 이성을 목격했을 때 놀란 일시적인 모습에 가까웠다.

물론 그 상태에서 멜을 꾸준히 보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지만.

“세르베인. 그런데 정말로 일을 미뤄도 되는 거야?”

내가 속으로 네 안위를 위해 얼마나 경계하고 있는지 모르겠지.

멜은 제 안위가 아니라 내 업무에 대해 걱정스러운 말을 꺼냈지만, 사실 표정은 매우 기뻐 보였다.

“응. 괜찮아. 어차피 내일부터는 다시 일할 건데 뭘.”

사실 안 괜찮을지도 모른다.

오늘로 벌써 사흘째다.

본래 심문이 있어야 했던 날, 나는 미나엘에게 알테슈메그 가테의 심문을 사흘이나 미루자고 했다. 상당히 욕먹을 것을 각오하고 한 행동이었다.

‘그러지.’

하지만 미나엘이 순순히 그러자고 답했다.

……사실 그 반응이 더 무서웠다. 나한테 너무 실망한 나머지 잔소리조차 하지 않는 것일까 봐.

어쨌든 두려움을 속으로 삭이고 희희낙락, 애첩에 홀린 바보 같은 왕처럼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저 너머에서 다폴샤가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

그녀는 나를 보고 흠칫 놀랐다가, 또 처음 보는 멜의 얼굴을 보고 흠칫 기함했다가, 머뭇거리길 반복했다.

귀족을 발견했는데 그냥 지나쳤다가는 후환이 두려운 것이지. 여전히 내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결국 내가 먼저 아는 체를 하고 나섰다.

“오랜만이군.”

“예, 공작님. 그…… 잘 지내셨습니까? 손은 괜찮으세요?”

다폴샤는 천천히 내게 다가오며 인사했다.

처음에는 나를 불편하게 여겨 다가오기 싫어서 그러는 줄 알았지만 다폴샤의 한쪽 다리에 깁스가 감겨 있었다.

……누가 보면 환자들의 모임처럼 보일 것이다.

“그 말은 내가 자네에게 물어야겠군. 다리는 어떻게 된 거지?”

“저번에 왕성 안에서 미끄러졌답니다. 그…… 접때 공작님과 면담이 있었던 날 오후에 말이죠…….”

그날이라면 또 다른 인어가 내 형체를 하고서 멜을 찾으러 왔던 때다.

왕성 안이 물바다가 되었었는데 그 탓에 미끄러져 다친 모양이었다.

“다리는 많이 다쳤나?”

거기에는 상당히 내 탓도 있는 것 같아 괜히 마음이 심란해졌다.

내 말에 다폴샤는 아하하, 웃더니 별것 아니라는 듯 답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냥 부러지기만 했어요.”

“……뭐?”

“깔끔하게 부러지기도 했고…… 왕성 안이다 보니 실력 있는 의사님께 치료를 받아 덕분에 빨리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다폴샤는 손가락 세 개를 펼치더니 말했다.

“아마 세 달 후면 완전히 나을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거, 굉장히 심각한 거 아닌가?

흔들리는 눈으로 다폴샤를 바라봤다.

나는 자잘하게 다친 적은 많았지만 골절상은 당한 적이 없었기에 저 어마어마한 회복 기간이 낯설었다.

“3주가 아니라…… 3달이라고?”

“공작님도 참. 골절이 어떻게 세 달 만에 낫습니까…….”

“하지만 알테-, 아무튼. 내가 아는 어느 기사는 3주도 안 되어서 나았던데?”

“그건 애초에 골절이 아니라 염좌였던 거 아닐까요.”

“3층에서 떨어졌을 때 염좌로 끝나는 게 가능한가?”

“제가 기사님들을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보통은 불가능하죠? 물론 아주 뛰어나신 분이시면 가능할 것 같아요.”

일단 알테슈메그는 ‘아주 뛰어나신 분’에 속하는 실력이 아니다. 오히려 자격 미달이지.

……그래. 그 당시에는 몰랐다지만, 이제는 나도 알지 않은가. 3층에서 떨어지면 사람이 어떤 상태가 되는지.

“그렇군. 알려줘서 고마워. 그나저나 빠른 쾌유를 빌지.”

“예, 공작님도요. 그런데 그…… 일은 어떻게 된 건가요?”

그 질문을 꺼내기까지 고민이 많았는지 다폴샤가 나의 안색을 찬찬히 살폈다. 굉장히 자세히.

어쨌든 그 애가 그렇게나 뭉뚱그려 물어도 나는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날, 나와 똑같이 생겼던 누군가의 정체를 묻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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