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화
“안녕, 멜.”
나 역시 이 상황이 못내 어색했지만 천연덕스럽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멜은 나의 흐트러진 모습을 본 채, 더욱더 동요하는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장난스럽게 덧붙이고 말았다.
“그리고…… 꿈이 아니란다?”
“아, 아, 아.”
그 말이 기폭제가 된 것처럼,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개진 멜이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 모습이…… 사람을 굉장히 동하게 했다.
“나, 나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
멜이 후다닥 이불로 내 몸을 둘둘 말았다. 그리고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이 표현이 적합한지는 모르겠지만, 제 새끼가 엄한 것이라도 보고 배울까 봐 서둘러 품 안에 집어넣는 부모의 모습이었다.
‘우리…… 연인 아니었나?’
물론 나도 처음이고, 멜이 먼저 접촉을 시도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해서 조금 당황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그런 걸 못 할 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내가 할 말을 잃고 그를 바라보기만 하자 멜이 힐긋 나를 내려다봤다. 하지만 순식간에 또 평정심을 잃더니 말을 더듬었다.
“세, 세르베인……! 옷을 단정하게 해야지!”
이거 네가 그런 건데…….
목 끝까지 그 말이 나오려 했지만 나는 허탈하게 웃기만 했다. 툭툭, 열린 단추를 다시 똑바로 잠갔다.
그제서야 멜은 풀어진 얼굴을 하고서 나를 더 끌어안았다. 하지만 이전처럼 그 부빗거림을 귀여운 강아지나 고양이의 행동에 비유하며 무고하게 느낄 수는 없었다.
그 품에 안긴 채 나는 한 가지를 짐작했다.
어쩌면 멜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 * *
얼마 후, 다시 사용인을 불러들여 아침 식사를 준비하라 일렀다.
“아, 알겠습니다. 곧 준비하겠습니다!”
아침에 무심코 침실에 들어왔다가 상황을 목격한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을 봤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다 들은 것이라고 짐작됐다.
사용인들 사이에 퍼졌다면 뭐…… 조만간 소수의 귀족의 귀에도 소문이 닿을 것이다.
‘막상 이후에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 그런 소문이 도니 억울하군.’
그때 곧장 자리를 떠나지 않고 머뭇거리던 사용인이 주저하다 물어왔다.
“저…… 그런데 공작님. 그분의 식사도 함께 준비할까요?”
워낙 멜이 그동안 식사를 잘하지 못하고 토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아침을 준비해야 할지 망설여지는 모양이다.
“그래. 준비해줘.”
문득 그런 예감이 들었다. 멜은 이제 인간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그러니 녹시렐 저택에서 무언가를 섭취했던 것처럼, 다시 식사를 할 날이 다가올 것이라고.
하지만 사용인은 혹시 멜이 먹고 토했을 때 제게 돌아올 불이익이 두려운지 거듭 물었다.
“그동안 그분께서는…… 식사를 잘하지 못하셨는데 괜찮을까요? 주방장에게 환자를 위한 특별한 메뉴로 구성하라고 이를까요?”
아무래도 인간이 식사를 아예 하지 않을 리는 없으니, 사용인 역시 멜이 그동안 쭉 굶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상하게 생각하는 점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점 역시 소문으로 새어나갈까 봐 조금 염려됐다.
나는 복잡하고 불안한 심경을 억누르고 답했다.
“괜찮아. 그런데 해산물은 꼭 제외해줘. 내 것도 포함해서.”
“!”
순간, 사용인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짧게 정적이 흘렀다.
이유를 몰라 물끄러미 바라보니, 갑자기 사용인이 덜덜 떨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죄, 죄송합니다, 공작님! 그동안 그분의 식사에 해산물이 있었어요…….”
그건 미처 알지 못했다.
멜이 그걸 보며 속으로 고통스러워했을 것을 생각하니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사실 음식에 해산물이 없었다고 해도 그는 그동안 먹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식사를 잘하지 못하셨으니 육류는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그랬는데, 그 탓이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해산물 탓인지 알았더라면 진작에 조치를 취했을 터인데……!”
“……괜찮다. 미리 알려주지 않은 내 탓도 있는걸. 다만 이제부터는 꼭 명심하도록. 그렇다면 이 일은 눈감아주겠다.”
“감사합니다……!”
사용인은 고개를 힘차게 주억거리더니 곧장 부엌으로 달려갔다.
사용인에게는 방금이 굉장히 두려운 순간이었겠지만, 나는 조금 안심했다.
일단 멜의 식사에 대한 그들의 의문은 이 정도로 해소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준비된 식사를 멜은 조금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정말로 괜찮은 거 맞아?”
“그럼. 그냥 아침이라서 많이 안 들어가서 그래.”
내 물음에 빙긋 웃던 멜은 입안으로 포도알을 가져갔다. 그나마 과일이 먹을만한 듯했다.
하지만 멜은 그 조그마한 포도알 하나를 굉장히 오랫동안 입속에 머금다가 삼켰다.
그 얼굴이 상당히 창백해 보였다.
‘이제 다시 식사를 할 때가 된 줄 알았는데.’
멜의 체온은 이제 인간과 비슷하게 따뜻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다시 인간에 가까워진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멜은 허기를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고기류를 거들떠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달각
나는 조심스레 식기를 내려놓았다. 내 몫의 식사는 다 끝난 지 오래였지만, 멜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질질 끌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멜은 내가 저 때문에 식사를 그만두었다고 생각했는지 당황했다.
“세르베인, 왜 더 먹지를 않아? 혹시 나 때문이야? 내가 빵을 먹지 말라고 해서 그러는 거야……? 하지만 그건 건강에 나쁘잖아. 아니면 내가 안 먹어서 그래……?”
멜이 허둥지둥 과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제가 잘 안 먹는 탓에 내 심기가 틀어진 것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새였다.
“아니야, 멜. 진정해.”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의 떨리는 손을 잡아챘다. 나는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하는지 감을 잡기 힘들었다.
그러다가 이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가장 먼저 물었다.
“멜, 저번부터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는데…….”
“응……?”
“왜 계속 빵을 먹지 말라고 하는 거야?”
녹시렐 저택에서 그와 지냈을 때부터 존재했던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그보다 심각한 문제들이 워낙 많아 미처 짚고 넘어가지 못한 주제였다.
멜은 왜 당연한 것을 묻냐는 듯,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야 그걸 먹으면 너는 아프니까.”
“내가 언제 그걸 먹고 아팠어?”
내 기억에는 빵을 먹고 아팠던 것보다, 그가 해준 이상한 요리들을 먹으며 속이 메슥거렸던 적이 더 많은 것 같은데 말이지.
하지만 멜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날, 숲에서 너는 억지로 빵을 먹고 토했었잖아.”
멜은 약 100년 전의 일을 며칠 전의 이야기처럼 꺼냈다.
나는 멍하니 그때가 언제였는지 떠올리다가 당황했다.
“그……랬던 적이 있긴 해. 하지만 빵은 인간에게 해롭지 않아. 그건 인간의 주식인걸.”
“아니야, 세르베인. 내가 책에서 봤어. 빵은 몸이 약한 사람들에게 안 좋대. 소화하기에 불편할 수가 있다고 했어. 대신 스프류나-.”
멜이 갑자기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환자가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에 대한 주제였다.
멜은 저택에서 지내면서 책을 많이 읽었다고 했다. 그 탓에 멜은 간혹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인어답지 않게 복잡한 인간 세상의 지식을 뽐내곤 했다.
‘그래서 내내 음식을 갈아댔던 건가…….’
하지만 그가 요리할 때 적합하지 않은 재료들을 무작정 갈아댔던 것처럼, 그 지식은 약간 실제 생활과는 동떨어진 면도 있었다.
하지만 그 노력 역시도 사랑스러워서 웃음이 나왔다. 나는 멜의 뺨을 살살 어루만졌다.
“나는 이제 건강하잖아. 그러니까 염려하지 않아도 돼.”
“그래도…….”
“그리고 내가 먹는다고 해서 너도 음식을 억지로 먹을 필요는 없어.”
그 말까지 했을 때는 멜이 흠칫 굳었다.
저가 음식을 억지로 먹었다는 걸 눈치 못 챘을 것이라 생각한 듯했다.
‘너와 관련된 일인데 그럴 리가 있겠니.’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고는 밖에서 대기하던 사용인들을 불러 음식을 치우게 했다.
멜은 내심 음식을 먹고 싶지 않았는지 내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
‘싫었다면 그냥 말하면 될 것을.’
멜은 여전히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분명히 표현하지를 못했다. 그게 마음이 아팠다.
……타인과 대화하는 방법을 익히면 이런 점도 어느 정도 개선되지 않을까?
나는 그의 뺨을 만지작거리다가 어제 했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멜. 오늘부터 헤론시 공에게 교육을 받으러 가.”
“싫어……!”
……아니, 이럴 때는 또 방금의 생각이 무색할 정도로 좋고 싫음이 분명한데 말이지.
나는 헛웃음을 숨기다가 미끼를 던졌다.
“멜. 넌 어떤 집이 좋아?”
“어……?”
“어제 말했잖아. 작위 수여식이 진행되면 성에서 나가서 살 거라고. 수도에 집을 얻을 생각이야.”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멜이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렸다.
사실 미리 구해둔 저택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정말로 의식주를 해결할 장소로써 구한 곳이기 때문에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어차피 나는 별로 바라는 게 없으니 멜이 원하는 대로 고쳐야겠어.’
더 커다란 정원을 만들까, 혹은 바다가 훤히 보이도록 창을 더 크게 낼까.
나는 웃으며 그의 옆으로 다가선 채 귀에 대고 속삭였다.
“헤론시에게서 집의 구조에 대해 배워봐. 그다음에 네가 원하는 걸 내게 말해줘.”
“…….”
“우리가 같이 살 집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