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 화 (95/132)

95 화

빙글, 그가 마침내 내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 얼굴 위에는 고통스러운 기색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조금, 안심했다.

‘다행이야. 나와 과거에 함께 했던 시간이 네게 나쁜 기억이 되지 않았다니.’

그 덕에 나는 그와 쭉 한방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 조금 느슨해진 기분으로 답했다.

“응. 기억하지. 그때는 네가 조금은 편하게 있길 바라서 그랬었어.”

“알고 있어. 넌 사실 매우 사려 깊었잖아.”

“……내가?”

미약하게나마 존재하던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 어색하게 웃었다.

이제 보니 과거의 일이 상처가 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미화되어버린 듯했다…….

그 순간, 멜이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응. 그리고 너는 처음부터 나를 무사히 바다로 보내주려고 받아들여 줬잖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사실 네 일기장을 봤거든.”

“!”

일기장 따위는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나는 순식간에 얼굴에 피가 몰리는 것을 느꼈다. 설마 멜이 일기장을 찾아냈을 줄은 몰랐다.

‘내가 거기에 무슨 내용을 적었더라?’

너무 옛날에 적은 내용이라 무엇을 적었는지 확신할 수도 없어서 더욱 수치스러워졌다.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어서 대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려 했다.

하지만 멜은 내게 도망칠 기회를 주지 않고 이불을 막아내더니,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이번 삶은 어때?”

귓가에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 긴장을 눈치챘기에 이불을 쥔 손에서 힘이 풀렸다.

나를 놀리지 않을까 고민했는데 전혀 그런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내 머리칼을 귀 뒤에 넘겨주며, 조용히 말을 이어왔다.

“친구를 사귄 것 같아 다행이야. 사실 질투가 나지만 네가 바라던 일이었으니까 참아볼게.”

“…….”

“우린 이제 저택을 벗어났어. 그러니 함께 꽃도 보고, 책도 읽자. 그리고 네가 원하는 곳으로 함께 여행도 가자.”

이제야 나는 멜이 나를 회유하려 할 때마다 왜 꽃을 보거나, 책을 읽자고 말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 옛날에 내가 혼자서 적어놓고 잊어버렸던, 나의 바람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너의 부모님은 어때? 너를 아껴주셔?”

멜이 나를 제품 안에 끌어안았다.

나는 심장이 쿵쿵 뛰어서, 매달리듯 그의 팔을 붙잡은 채 가만히 안겨 있었다.

한참 동안 간신히 숨만 몰아쉬었다. 그럼에도 멜은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 속에 내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나는 늦게나마 간신히 목소리를 끌어냈다.

“……응. 아껴주셔.”

“다행이야. 네가 사랑받고 자라서 기뻐.”

멜이 다정히 내 등을 토닥였다. 나는 그의 위로를 마음 편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 때문에 멜은 이제 자신의 부모와 같은 존재인 바다에 가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좋은 부모님을 만났다고 하니 제 일처럼 기뻐하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춰왔다.

“인간 세상에서는 연인이 생기면 부모님을 뵈러 간다며. 나도 갈게. 언제가 좋을까?”

다정한 나의 인어.

나는 네게 그만큼의 애정을 베풀지 못했던 것 같은데 너는 어떻게 이토록 다정할 수 있을까.

‘세르베인. 있잖아, 이 꽃이 계절을 착각해서 피었다고 해도 너무 대단하지 않아?’

예전부터 그랬다. 너는 나의 낮은 기대치를 부수고 늘 그 이상에 도달했다.

매일매일이 절정인 것처럼 너는 다정함으로 나의 기록을 부수었었다.

‘이렇게 추운데도, 눈 속인데도 꽃을 피웠잖아. 나는 이 꽃이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어.’

네가 내게 속삭인 모든 말들을 기억한다. 그 문장들이 전부 충격적이었기에.

한 존재가 어떻게 이렇게나 따뜻하게 생각하고, 그렇게나 다정한 언어를 말할 수 있는 걸까.

그게 의문이었다. 네가 겪었던 상황은, 또한 내가 야기했던 상황은 결코 다정하고 온화하지 않았는데.

‘그러니까…… 그러니까…….’

네 사랑의 근원이 어디인지 궁금할 정도로 너는 의문스러운 존재였다.

의아할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그러니까, 너도 살았으면 좋겠어.’

그런 너를 보며 그 옛날, 사랑받지 못하고 살아온 세르베인 녹시렐은 마음을 고쳐먹었더랬다. 고작 살날이 얼마 남지도 않았던 때에.

생각했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지. 나도 너처럼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지, 라고.

너는 매일 내가 삶에 걸어오던 기대를 부수고, 늘 그 위를 원하도록 했다.

……그런 내가 네가 없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괜찮겠어? 무섭지 않아?”

그딴 건 불가능하다.

옛날에 멜을 바다에서 데려온 사람은 나의 아버지였던 녹시렐 공작이었다.

그 탓에 멜은 아버지를 무서워했다. 이제는 저택을 나왔지만, 그럼에도 멜은 인간들이 무섭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기적이게도 네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런 나의 염려를 눈치챈 듯, 멜은 미소 지으며 답했다.

“너를 사랑해주시잖아. 그러니 괜찮아.”

* * *

다음날, 눈을 뜨자 창을 통해 환한 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코앞에 자리한 멜의 얼굴을 보고 잠시 얼어버렸다.

‘꿈인 줄 알았는데.’

간밤에 침대 위에 혼자 있는 꿈을 꿨다. 무의식중에 그와 쭉 한방을 써야 한다는 현실에서 도피하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우음…….”

멜이 작은 신음성을 내며 내 어깨를 파고들었다. 여리게 내쉬는 숨이 부드러웠다.

나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뻣뻣하게 다시 눕고 말았다.

여전히 꿈나라에 있는 멜의 모습은 흰 솜털이 보송한 소동물 같았다. 그런데 잠에서 깨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오늘 할 일이 많은데 큰일이네.’

원래라면 일어나자마자 곧장 종을 울려 사용인을 불렀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앞으로 쭉 그러하겠지.

‘조금만 있다가 가자.’

곤히 잠든 멜을 혼자 두고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나중에 깨어났을 때 그가 얼마나 서운해하겠는가.

스륵-.

그 순간 멜이 뒤척였다. 그는 나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멜에게는 미안하지만…… 상당히 숨쉬기가 답답하고 불편했다.

“으으응…….”

이제 잠에서 깨어나려는 모양이다.

인내심을 가지고 그가 깨어나길 기다리는데, 그의 손이 내 등을 쓸었다.

잠결에 한 행동임을 알지만, 순간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멜?”

억지로 팔을 풀어낼 생각도 못하고 멜의 이름만 조심스레 불렀다.

하지만 멜은 여전히 꿈나라에서 헤매는 중이었다.

“세…… 르베인…….”

옹알거리며 내 이름을 부르는 그 얼굴이 무척이나 무고해 보였다.

하지만 그 손은 이제 내 허리를 쓸고 있었다.

“저기…… 멜?”

난처하게 웃으며 다시 그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에도 멜의 손은 매끄럽고 능숙하게 움직였다. 등 뒤에서 교차한 손이 한쪽은 허리 아래로 미끄러지듯 내려가고, 다른 한쪽은 위로 올라왔다.

‘정신 차리자. 눈앞에 있는 건…… 멜이다. 순수하고 착한 멜이라고.’

괜히 민감하게 반응하면 멜이 의아해할 것이다.

그는 뽀뽀와 포옹밖에 모르는…… 그야말로 몸만 큰 아기니까.

“멜, 일어나봐. 응? 착하지…….”

그의 품에 안겨 팔이 거의 봉인된 탓에, 나 역시도 멜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그를 도닥이는 수밖에 없었다. 팔이 그 정도밖에 움직이지 않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사락…….

그때 멜이 천천히 눈을 떴다. 잠에서 덜 깬 눈은 피곤한 게 아니라 몽환적으로 보였다.

바로 코앞에서 마주한 시선에 멜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나처럼 잠시 이 상황을 꿈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 멍한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멜. 일어나. 아침이야.”

그 탓에 그 얼굴이 더 가까이 다가오는 줄도 몰랐던 것 같다.

“아. 꿈인가 봐.”

멜이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그는 조금은 슬픈 듯, 하지만 기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가까이 다가온 그가 내 어깨에 얼굴을 부벼올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 예상은 빗나갔다.

“?!”

입술이 부딪혔다.

여기까지는 사실 익숙했다.

녹시렐 저택에서도 그는 아기새가 부리로 쪼는 것처럼 내게 계속 입을 맞춰 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멜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 순간에도 그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눈꼬리를 휘어 웃고 있었다.

사락-.

그의 손이 내 옷자락을 헤칠 때는 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냅다 그의 손을 붙잡고는 외쳤다.

“메, 멜?! 정신을 차려-”

“공작님 일어나셨습니까?”

그 순간, 평소보다 늦은 기상 시각에 의아해하며 방 밖을 맴돌던 사용인이 기척을 듣고 들어왔다.

하지만 그녀는 침대 위의 공작과 소문 속의 유명한 남자가 함께 얽혀 있는 것을 보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 죄, 죄송합니다……! 필요하시면 부르십시오!”

그냥 바라보는 것도 원치 않아 눈을 가리게 시키던 분이다.

그런데 침대 위에서의 모습을 봤으니……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른다!

사용인은 당황 속에 허우적거리며 도망치듯 방에서 빠져나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분명했다.

나는 그 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봤다.

‘곧 성안에 소문이 퍼지겠군.’

성안뿐이면 다행인가. 사교계에 퍼질지도 모른다.

저절로 앞으로의 일에 머리가 아파 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하지만 이 소란 덕분에 멜은 정신을 차린 듯했다.

“세…… 르베인?”

그는 내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심각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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