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 화 (94/132)

94 화

헤론시는 멜의 교육 담당이 됐다.

애석하지만 교육을 받을 당사자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은 결과였다.

“부족하지만 제가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하겠습니다.”

헤론시가 꽤 기쁘게 그 일을 받아들인 것과 달리 멜은 다소 불편해 보였다.

그런데 의외인 건, 그가 적극적으로 거부 의사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괜찮은 건가?’

걱정스레 멜을 바라보니, 멜이 귀신같이 시선을 알아차리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무표정했던 얼굴은 어느새 눈꼬리가 내려와 침울해졌다.

“…….”

멜은 헤론시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내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없이 서운함을 표현했다.

그 모습을 관찰하던 헤론시는 뒤늦게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다만, 저는 저분에게 무엇을 가르치면 됩니까?”

“상식?”

프로셴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이후에는 그저 상쾌하게 웃을 뿐이었다.

척 봐도 더 설명해줄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예……?”

당혹스러워 보이는 헤론시가 꽤 불쌍했지만, 나 역시 프로셴이 택한 단어 외의 설명을 찾을 수 없었다.

‘상식……이 가장 적절한 단어긴 하지.’

“아무튼, 대가로 방을 조금 더 좋은 곳으로 옮겨주겠다.”

프로셴은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를 비웠다. 어지간히 멜 때문에 속을 썩였던 모양이다.

“……그,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하게.”

나는 헤론시에게 심심한 격려를 남기고 나왔다. 멜에게도 인사를 하라는 의미로 눈짓했지만, 그는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다가 내 곁에 찰싹 붙기만 했다.

‘그래. 차차 배워나가면 되지.’

방 밖으로 나오자 멜은 더 거리낄 것도 없다는 듯, 내 어깨에 얼굴을 부볐다.

타인이 했다면 노골적인 아양이지만, 멜이 그걸 노리고 했을 리는 없지.

“세르베인. 저 사람은 누구야……? 물론 네가 원하는 거니까 거부하지는 않을게. 그런데 어떻게 알게 된 사이야?”

절대 프로셴이 꾸민 일이라고 말하면 안 되겠군.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눈이 마주친 프로셴이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이야기가 긴데…… 바로 설명해줄게. 그러니까-.”

내가 절절매는 사이에 미나엘은 시계를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현재 상황에서 더 일정을 진행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얼굴이었다.

“네 모습을 보니 알테슈메그는 내일 심문해야겠군.”

프로셴은 그저 빨리 쉬러 가고 싶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할 일이 많아졌다던가, 알테슈메그의 심문이 얼마나 중요한 안건인지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아무튼 내일 심문은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 자백실을 이용하면 안 되나?”

프로셴은 무심코 그리 말했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어색하게 나와 미나엘의 눈치를 살폈다.

‘의도인지, 실수인지 모르겠어.’

예전이라면 분명히 실수로 했을 텐데 말이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다가 미나엘에게 물었다.

“그동안 자백실을 사용했어?”

자백실은 말이 좋아 자백실이지…… 사실 고문실이었다.

왕실에서 대대적으로 죄인들을 심문할 때 사용하던 장소고, 온갖 효율적 심문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고 알고 있다.

나는 여태껏 그곳을 사용한 적이 없으니, 저곳을 사용했다는 건 미나엘일 것이다.

‘그곳을 사용했다고 하니 내 평판이 녹시렐 가문의 악마인 거지…….’

이 일 또한 내 명의를 빌리고 했을 게 아닌가. 딱히 미나엘에게 화가 난 것은 아니지만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런 내 반응을 무엇이라 해석한 건지 미나엘이 조금 굳어진 안색으로 말했다.

“이번에는 네가 벌인 일이라고 흘리지 않겠다.”

……이미 사교계의 몇몇 가문에서는 내가 알테슈메그를 3층에서 떨어트렸다는 것도 소문이 났다.

그 탓에 내가 알테슈메그를 사교 클럽에서 발견했을 때, 굳이 이미 다친 손을 뚫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처참한 꼴로 왕실에서 돌아오면 당연히 내가 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나의 어색한 얼굴을 보자 미나엘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는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옛날이라면 굳이 내 평판을 신경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내게 적이 많아지면 멜의 적도 많아지는 거다.’

나는 멜을 바다로 보낼 줄 알았기에 신성 왕국 기사단의 명단을 조사하고, 그들을 말살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제는 이곳에서 멜과 행복하게 지낼 것이지 않던가.

“내일 일에 대해 부탁할 게 있어.”

사실 이걸 부탁하면 알테슈메그만 이득을 보는 꼴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자백실에 보내져도 뭐라 할 말이 없어야 했다.

국왕파가 되겠다는 선언을 받아줬더니 뒤에서는 귀족파와 연을 이어가려 하질 않나. 내 신상을 유포하기까지도 했다.

‘게다가 사교 클럽에서는 여전히 신을 믿는다는 망발까지 꺼냈지.’

그 이외에 확정된 죄목은 아니지만, 거슬리는 사항들도 많다.

그는 귀족파에서 멸시당하기는 하지만 특별한 상징을 가진 존재 같았다. 헤론시가 말해줬던 편지의 내용도 신경 쓰였다.

아무튼 그 모든 것을 통 틀었을 때, 죽이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게 더 어려웠다.

‘하지만 그 남자가 강압적으로 심문한다고 곧이곧대로 정보를 뱉어낼 것 같지 않아.’

하지만 나는 안다. 어쭙잖게 제 안위를 챙길 인간이었다면, 기껏 상황이 우세한 국왕파로 돌아선 주제에 귀족파에 몸담는 짓을 저지르지 않는다.

‘다른 방법을 취해야겠어.’

그 다른 방법이란 것은 상당히 온건한 방법이었다. 타인이 보기에는 그에게 자비라도 내리는 꼴로 보일 것이다.

그런 오해가 못마땅하지만…… 사실 그가 오늘 보인 행동을 생각해 조금 자비를 베푼 점도 있기는 하다.

‘아부 목적이었겠지만 제 딴에 내 손을 지혈하려 하고 검도 빌려줬었지.’

……검은 사실 내가 강탈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나는 곁에서 이 상황을 말없이 관찰하고 있던 멜을 간과하고 부탁했다.

“알테슈메그를 심문할 때 험한 방법은 가급적 사용하지 말아줘.”

* * *

방으로 돌아온 뒤, 나는 멜에게 헤론시의 존재를 설명했다.

그 남자의 정체와 내가 성을 비운 동안 했던 일들.

이전에는 굳이 멜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던 정치적 상황까지도 전부 이야기했다.

‘혹시 이해를 못하면 어떡하지?’

하지만 내 우려가 무색하게도, 멜은 너무나 쉽게 상황을 이해했다.

덕분에 헤론시가 훌륭한 잉여 인력이라는 점을 피력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는 다른 요소들을 더 신경 쓰는 듯, 교육에 대해서는 조금 시들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남자한테 네 교육을 맡긴 거야. 게다가…… 네게 홀리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고.”

하지만 나는 반응이 시들한 것과 납득은 별개의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설명해줘서 고마워, 세르베인, 하지만 내가 걱정되지 않아?”

결국 원점인가.

멜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 틀린 말이 아니긴 했다. 멜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불안할 만한 일이었다.

가뜩이나 사람을 두려워하던 그가 이제 막 신원이 확보된 남자에게 교육을 받아야 한다니.

‘하지만 현재 헤론시 만큼 적합한 인물이 없다.’

나는 그의 뺨을 조심스레 만지작거리며 달랬다.

“하지만 앞으로 네가 나와 함께 지내면 다른 사람들과도 많이 만나게 될 거야.”

“…….”

“멜. 네게 필요한 건 내가 아닌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방법이야.”

프로셴은 멜을 교육시키지 못한다. 미나엘은 바쁘다. 그 외의 외부인은 멜에게 홀릴지도 모른다.

‘처음에야 괜찮을지 모르지. 하지만 나중에 홀리면 손을 쓰기 복잡해진다.’

하지만 헤론시는 다르다. 그는 바깥은 그 누구와도 인연이 없다.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여차하면 그 자리에서 제거해도 뒷수습이 어렵지 않은 인물이다.

그 탓에 틸리타와 다폴샤는 후보로 넣을 수 없었다. 만일 그들이 멜에게 홀리는 사태가 발생한다고 해도, 나는 그들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걸 원하지 않아.”

애처롭고 불쌍한 척, 멜이 내 손에 뺨을 비비며 동정을 구했다.

하지만 나는 속지 않았다. 그 예쁜 눈동자 한편에는 비관이 서려 있었다.

‘무서운 것보다는 그냥 다른 존재와의 교류가 싫은 거야.’

나는 어떤 말도 멜을 설득시키지 못할 걸 알았다. 그래서 한숨을 삼키며 나를 대가로 내세웠다.

“대신 네가 원하는 만큼 계속 같이 있을게.”

“……내가 원하는 만큼?”

멜이 기다렸다는 듯 되묻는 모습을 본 순간 정신을 차렸다. 말실수를 했다는 본능적인 예감이 들었다.

그는 그저 말갛게 웃을 뿐인데 왜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까.

나는 서둘러 말을 교묘히 바꿨다.

“응. 정말 자주 널 보러 갈게.”

“싫어. 그걸로는 안 돼.”

순순히 넘어갈 줄 알았던 멜이 단호히 말했다. 예상했지만 그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와 별개로, 나는 내가 멜의 요구 사항을 거절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체념했다.

“나랑 늘 같이 있어.”

* * *

“옛날 생각난다.”

멜은 화사하게 웃으며 내 옆에 나란히 누웠다.

목이 아프지도 않은지, 누운 상태에서 나를 계속 바라보는 시선은 끈질겼다.

아주 아련한 추억을 회상하는 듯 잔잔한 달빛이 그의 눈에 일렁였다. 아름다운 눈빛이었지만 나는 애써 그 시선을 외면했다.

하지만 정면만 보고 뻣뻣이 굳어 있어도 귓가에 닿는 목소리는 상냥하기 그지없었다.

“네가 잘 때는 수조 앞에 커튼을 쳤었잖아. 기억나?”

……고작해야 녹시렐 저택에서 나와 다시 재회했을 때를 떠올릴 줄 알았는데.

멜은 내 예상보다 훨씬 예전의 일을 언급했다.

그와 평화롭게 지난 삶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게 조금은 아쉬웠어. 네가 자는 모습을 못 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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