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화
이딴 정보를 돈 주고 구하는 일부 귀족들의 멍청함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헤론시가 다루는 정보 중 귀족 사회에 관련된 건 이런 것들 뿐이었다.
‘정말 후일을 도모한다면 다른 일을 구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데 그만두길 고민할 때는 제법 괜찮은 정보도 간혹 들려오곤 했다. 마치 지금처럼.
“또 귀금속 가게에 수배지가 내려왔다는군. 녹시렐 가문의 증표를 아직도 못 찾은 모양이야.”
“이쯤 되면 그냥 포기해도 되지 않나? 이제 와 그쪽 가문의 후손이 살아있다고 해도 그들이 뭘 할 수 있겠어.”
“흠……. 일단 우리야 어마어마한 돈을 벌 수 있는 거니 이득이지.”
“허 참. 이 사람아, 우리가 찾아내야 이득이 생기는 거지.”
결국 헤론시는 미래를 기약하며, 이곳에서 오래 일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오래 일하다 보면 제가 접근할 수 있는 정보의 질도 높아질 것이라고 위안했다.
……그게 몇 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아직 녹시렐 공작 가문의 증표를 찾지 못했다고 했지. 그렇다면 녹시렐의 혈통이 남아 있을 거다. 그들 역시 즈레이카 왕조의 복위를 바랄 거야.’
당시에 헤론시는 꿈에 부풀어 있었고 안일했다.
자신이 그런 정보를 얻을 때까지 안전하게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혹은 녹시렐 가문, 저처럼 즈레이카 왕실의 혈통을 가진 이들과 접촉할 기회가 올 것이라고.
* * *
몇 달 뒤 헤론시는 제 일에 익숙해졌다. 일의 만족도 역시 높아졌다.
높은 기대를 접었기 때문에 그런 걸까. 헤론시는 한 달 동안 빠른 적응을 보여줬다.
덕분에 계약 기간 역시 1년으로 늘어났다.
“여기 완벽히 정리를 끝냈습니다.”
“깔끔히 잘했군.”
“감사합니다.”
귀족들의 사교 클럽에서 꽤 이름을 날리는 평민. 자신이 꾸준히 맡고 있는 조사 대상이었다.
사진 속 남자는 불쾌하게도 저와 미묘하게 닮아 있었다.
……사실 저보다 훨씬 반짝거리게 잘생긴 미모긴 했다.
선명한 금발, 최상급 보석을 깎은 듯 반짝이는 자안, 나른한 듯 긴 눈매.
하지만 헤프게 웃고, 귀족의 비위를 맞춰주며 돈을 버는 평민일 뿐이다.
‘이 남자는 하필 쓰레기 같은 귀족들에서 인기가 많아 뒷조사까지 당하는 건지…….’
남자의 상황에 동정심을 느끼기도 했다.
아무튼 그 평민의 사소한 취향까지도 정리해서 몇몇 귀족들에게 넘기는 일쯤은 이제 웃는 척까지 하며 할 수 있을 만큼 무감각해졌다.
‘오늘은 일이 끝나고 서점에 가야겠어.’
마침내 헤론시는 현재의 삶에 완전히 만족했다.
처음에는 공부가 안되는 정보들 뿐이다, 즈레이카 왕조 복위를 위한 정보가 없다, 말하며 불평했지만 이제는 달랐다.
‘공부는 내가 책을 사서 독학하면 되는걸. 책을 살 수 있는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자.’
사실 그는 왕위에 본래 큰 미련이 없었다.
제 혈통으로 인해 의무감을 느낀 것이지, 본인이 간절히 바라던 것은 아니었다.
‘이런 삶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냥 잠자코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
평온한 일상 속에서 이전의 일들은 잊어버렸다.
가테 백작 부인. 정체 모를 여자. 아딜리아 신성 왕국의 언어로 적힌 편지 같은 것들.
그로부터 얼마 뒤, 헤론시는 어떤 소식을 접했다.
일하던 중, 저보다 경력이 많은 서기들의 대화를 엿듣다가 알게 된 것이었다.
“자네, 그 말 들었어?”
“어쩐지 근래 의사들이 들락날락하는 모습이 보이더라니.”
“그렇지 않아도 의뢰가 들어 왔어. 더 실력이 좋은 의사를 찾아달라고 하더군.”
가테 백작 부인의 건강 상태가 심각해졌다는 이야기였다.
‘아. 그 편지.’
그때에야 헤론시는 다시 그 편지에 대한 일을 떠올렸다.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보니 거기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나는 그때 신성왕국의 교리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니, 편지의 ‘어머니’라는 부분이 교리와 관련된 은유적 표현일 것이라 짐작하고 넘어갔어.’
그동안 헤론시는 여러 분야에 관한 책을 사서 공부했다. 그 가운데에는 신성 왕국의 교리에 대한 것도 있었다.
좋아하지는 않지만, 적을 파악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공부한 내용이었다.
헤론시는 이제 자신할 수 있었다. 제가 웬만한 사제들보다도 더 교리의 기원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하지만 교리에 ‘어머니’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부분이나, ‘어머니’라는 역할과 관련된 상징적 의미는 없었어.’
그렇다면 그 편지에서 지칭하는 존재는 가테 백작 부인이 맞다.
또한 그 경우에 편지의 발신자로 가능한 자는…… 알테슈메그 가테뿐이다.
* * *
“이 정도로 허약한 줄은 몰랐지.”
프로셴이 혀를 차며 감탄했다.
나 역시, 나 이외의 허약한 체질의 사람을 보는 건 처음이기에 당혹스러웠다.
“그러게.”
나는 어색하게 맞장구치고는 편지의 내용에 대해 생각했다.
여러 정황을 봤을 때, 그가 가테 백작 가문과 내통자가 아니라는 점은 신뢰해도 될 것 같았다.
‘애초에 알테슈메그는 헤론시의 존재를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니 사교 클럽에서도 저를 버리고 귀족파들이 뭉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 했지.’
그런데 그 편지의 의미는 무엇일까. 누구의 얼굴에 경멸하는 기색이 있었다는 걸까.
‘또한 편지를 전달해달라고 말했던 여자의 정체는 뭐지?’
알테슈메그는 왜 굳이 타인을 통해 외부에서 제 어머니에게로 편지를 보낸 것일까.
알테슈메그 가테를 조사했을 때, 그가 가테 저택 외에 다른 곳에 거주했다는 기록은 없었다.
‘그 편지의 발신자가 알테슈메그가 아닐 가능성은 정말로 없나?’
나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기다가 툭, 내뱉었다.
“아무튼 헤론시의 능력치는 예상 밖이야. 생각보다 많이 유능해.”
애초에 독학으로 아딜리아의 언어를 익혔다는 것부터가 그의 지능이 뛰어나다는 증거였다.
즈레이카가 신성 왕국이던 시절, 귀족들은 아딜리아의 언어를 어느 정도로 익혔는지에 따라 서로의 교양 수준을 품평하곤 했다.
평민들은 그 언어를 접할 기회가 없었기에, 평민처럼 살았던 프로셴은 그 언어를 몰랐다.
물론 이제는 신성 왕국과 적대시 하기에 공부할 필요가 없는 언어지만.
‘초조하지 않나? 현 귀족들이 더 지지할만한 대상은 누가 봐도 헤론시다. 그런데도 살려둘 건가?’
지금도 프로셴의 얼굴은 그저 태평했다.
헤론시의 존재를 의식해 나와 미나엘의 작위 수여식까지 미뤘던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고 물어보려 할 때, 미나엘이 돌아왔다.
“예상대로 그저 기절일 뿐이다.”
헤론시가 쓰러진 후, 가장 먼저 그의 상태를 파악하고 사용인을 부른 건 미나엘이었다.
나는 그 과정에 대해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가 블미에였고, 나의 주치의였다는 과거를 알고 있으니까.
그 사실을 이제는 프로셴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어째서인지 미나엘에게 물었다.
“미나엘. 언제 의술을 배웠었어?”
“그건 의술이 아니다. 상태를 그냥 확인한 거지.”
“배웠다는 건 부정 안 하네.”
미나엘은 굳이 숨길 의지가 없었는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프로셴은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갔다. 그의 입장에서는 마땅히 궁금해할 만한 사항이긴 했다.
내가 미나엘의 과거에 대해 그렇게나 자세히 설명해주지는 않았으니까.
“언제 배웠어? 헥사바임 가문에 있었을 때?”
“그래. 아주 어렸을 때 기초적인 것만 흥미로 공부했다. 그래서 기억나는 건 없군.”
귀찮다는 듯이 대꾸한 뒤 미나엘은 휙 고개를 돌렸다. 더 질문을 받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새삼, 나도 의아한 점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생에서 미나엘이 누군가를 치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약 100년 전, 블미에는 당시에 꽤 명성 있는 의사였다.
귀족 여성이 의사라는 험한 직종을 선택한 것도 그 이유가 되겠지만, 실력이 좋았던 탓에 더 유명했다.
‘그렇게나 뛰어난 의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왜 손을 뗀 거지?’
그때부터 꾸준히 의사로서 활동했다면 아마 현존하는 모든 이들 중 가장 뛰어난 의사가 되었을 것이다. 의술에 커다란 진보를 일으켰을지도 모르지.
‘이상하군.’
이것 외에도 사소하게 지나쳤던 의문들이 있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며 넘겼지만, 그런 것들이 어느새 너무 많이 쌓여버렸다.
나는 생각에 잠겼고, 프로셴은 또 여러 가지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 질문 세례가 짜증 났는지, 미나엘이 살풋 인상을 찡그리더니 쌀쌀맞게 말했다.
“아무튼 의식도 정상적으로 차렸다고 하니, 이만 알테슈메그를 보러 가도록 하지.”
“아니. 잠깐 얼굴을 보고 가야겠어.”
나는 미심쩍은 얼굴로 프로셴을 바라봤다. 그 말을 꺼낸 건 프로셴이었다.
애초에 그는 헤론시를 심문하러 오는 것조차 귀찮아하지 않았던가.
갑자기 생각을 고쳐먹은 이유가 궁금했다.
‘의도를 모르겠군. 견제인가, 혹은 동정인가,’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달칵.
우리는 헤론시가 옮겨진 의무실로 이동했다.
문을 열자 그는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다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놀라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정신을 잃어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쓰러지지 않게 노력할 테니 곧바로 진행하셔도 괜찮습니다.”
절절매는 모습을 보니 조금 죄책감이 들려 했다.
‘몸이 아파 기절한 게 본인 탓은 아니지 않나.’
아무튼, 그가 작성한 기록을 보니 조금 인식이 바뀌었다. 어찌 되었든 그도 피해자다.
그런데 융통성 없이 방금 기절한 사람을 붙들고 어떻게 심문을 하겠는가.
나는 헤론시의 말에 부정하며, 그를 안심시키려 했다.
“아니. 우린 그저 상태를 확인하러-”
“네가 교육을 해줘야 할 사람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