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 화 (91/132)

91 화

그러고 보니 제 손목을 잡은 손은 부드럽고 작았다.

헤론시는 간신히 심호흡을 하고 뒤를 돌았다.

기사가 아니라 그저 저택의 사용인이라면 적당히 불쌍한 척해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뒤에 있는 인영은 로브를 푹 눌러 써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다만 목소리를 통해 저와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라는 것만 짐작 가능했다.

“이 편지를 가테 백작 부인께 전해 주렴. 사례는 넉넉히 할게.”

왜 사용인이 로브를 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더 하위 직급의 사용인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그냥 제안을 받아들여 자신도 이 저택의 사용인인 척 상황을 벗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헤론시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저…… 저는 사용인이 아닌데요?”

갓 고아원을 벗어난 시절, 헤론시는 제 스스로 세상의 험한 일들을 제법 겪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때의 자신은 세상의 쓴맛을 덜 겪었고 극심하게 순수했다.

“알고 있어.”

“그런데 제가 어떻게 그분께 편지를…….”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분께서 이쪽으로 오실 거야. 네가 할 일은 편지를 잘 간수했다가 담장 너머로 팔을 뻗어서 편지를 전해 주기만 하면 돼. 부탁할게.”

차륵!

사근사근한 목소리의 여자는 헤론시의 손에 편지와 돈주머니를 쥐여줬다.

단순 노동의 대가로 주기에는 과했다.

‘평범한 사용인은 아닌 것 같아. 말투가 그래.’

헤론시는 여자의 지위를 추측해봤다.

‘또한 너무 순진해. 내가 편지와 돈을 들고 그냥 도망가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지?’

너무 오만한 탓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여자의 모습을 관찰했다.

하지만 로브 밖으로 나온 손은 미세하게 움찔거리며 불안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건 귀족들 특유의 거절을 배제한 오만한 요구가 아니었다.

차분한 척하고 있지만, 거절은 생각조차 하면 안 되는 상황의 절박함이었다.

“……정말로 부탁할게.”

여자는 한번 부탁을 하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은 헤론시 보다도 더 도망자의 모습에 가까워 보였다.

그 탓이었다. 헤론시는 충동적으로 그 로브 끝자락을 붙잡았다.

로브를 쓴 여자의 걸음이 멈추었다.

“저, 누구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글쎄.”

스치듯 작게 중얼거린 말을 분명히 들었다. 이상한 대답이었다.

차라리 ‘네까짓 게 알 바 없다.’라든가 ‘묻지 마라.’라는 식으로 답했다면 더 평범했을 것이다. 적당히 신분이 높은 사람이겠거니, 추측이 가능하니까.

하지만 여자는 억지로 밝은 기색을 꾸며내 답했다.

“내가 누군지 물어봐 줘서 고마워. 그런데 답은 못 해.”

타다닥!

혼자 남은 헤론시는 담벼락 아래에서 편지와 돈주머니를 멍하니 바라봤다.

챠륵!

주머니 안을 확인해봤다. 거기에는 당분간의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큰돈이 들어 있었다.

마치 한바탕 꿈이라도 꾼 것 같았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비가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쏴아아-!

“……비가 세게 내려서 잠깐 기다려 주는 거야.”

스스로 그리 변명하며 헤론시는 담장 아래에서 가테 부인을 기다렸다.

가테 가문도 교황파에 속하지만, 그들의 권세는 그다지 강하지 않았기에 참을만했다.

‘하지만 결국 돈 때문이지.’

고작 돈 한 푼으로 쉽게 꺾인 제 신념이 우스웠다.

하지만 돈만 들고 내버리기에는 여자의 절박함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헤론시는 허술하게도 편지 봉투가 봉인되어있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남이 보면 어쩌려고.”

남의 편지를 보면 안 된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제 정체를 알려주지 않는 여자가 궁금했고, 굳이 사용인이 아닌 사람을 통해 가테 백작 부인에게 전달해야 하는 말이 궁금하기도 했다.

팔락

조심스레 편지를 꺼냈을 때, 그곳에 적힌 것은 즈레이카 왕국의 언어가 아니었다.

“그래서 순순히 편지를 맡겼던 건가.”

즈레이카가 신성 왕국임을 선포하기 이전, 먼저 존재했던 신성 왕국.

똑같은 교리를 공유하며, 같은 신성 왕국이란 이유로 현재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가깝게 교류하는 타국. 아딜리아 신성 왕국.

타국의 언어를 일개 평민이 이해할 리 없었다. 그러니 여자는 그렇게나 무방비하게 제게 편지를 맡기고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안타깝게 됐군.”

하지만 헤론시는 아딜리아의 언어를 배운 전적이 있었다.

그들 역시 자신이 증오하는 원수기 때문에.

철퍽, 철벅!

편지를 다 읽은 순간, 비에 젖은 땅을 급히 밟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그 발소리를 뒤따르는 사용인의 목소리도 들렸다.

“마님. 비가 이렇게 많이 내리는데 산책이라니요.”

“오랜만에 비 내음을 맡고 싶어서 그렇단다. 너희는 잠시 물러가 있으렴.”

헤론시는 무성히 얽혀 빈틈이 거의 없는 장미 넝쿨 뒤에 숨었다. 귀로는 계속 담장 너머의 상황에 집중했다.

가테 부인은 끝내 사용인들을 전부 물러내고 정원을 돌아다녔다.

점점 담장에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산책하는 사람답지 않게 무언가를 찾듯이 초조한 발걸음이었다.

‘이 편지를 찾는 걸 거야.’

헤론시는 싸늘한 얼굴로 편지를 내려다봤다.

아딜리아 신성 왕국의 언어로 적힌 편지.

‘그다지 전해 주고 싶지 않아.’

해석을 했지만 편지의 의미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내용이 너무 불투명했다.

하지만 어찌 됐든, 대놓고 신성 왕국을 찬양하듯 그 나라의 언어로 적힌 편지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이 편지를 쓴 사람은 가테 가문의 후계자겠지.

그렇다면 본인이 저택에서 가테 부인에게 편지를 전달, 아니 그냥 직접 대화하면 되지 않나?

‘이 지역에 살며 가테 가문의 자식이 저택을 비웠다는 소식은 없었는데…….’

일단 사생아일 리는 없었다.

가테 백작 가문은 독실한 신자였고, 신성 왕국의 교리는 사생아를 만드는 것을 금지했다.

‘설령 교리를 무시했다고 해도, 신체 특성상 가테 백작이 아닌 가테 백작 부인이 남몰래 사생아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헤론시는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려 애썼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이 지역에 살며, 헤론시를 포함한 이곳의 주민들은 가테 가문에 대해 무지할 수가 없었다.

‘일단 그들에게 자식은 한 명뿐이야. 알테슈메그 가테.’

같은 집에 사는 하나뿐인 자식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굳이 저택 외부인을 통해 편지를 전할 리 없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교리상의 은유적 표현인가? 발신자는 교황청의 누군가고?’

헤론시는 아딜리아의 언어를 알았지만, 그들이 만든 세부적인 교리는 잘 몰랐다.

또한 즈레이카 신성 왕국은 아딜리아 신성 왕국이 만든 교리를 공유한다고 선포했지만, 전파 과정에 바뀐 부분이 있을지도 몰랐다.

‘평민들은 정말로 쉬운, 지켜야 하는 규칙에 대한 교리들만 알지. 아무튼 그편이 가장 가능성이 높아.’

헤론시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

흙탕물에 이 편지를 찢어 녹여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눈앞에 그려지듯 떠오르는 모습이 있었다.

망설이던 손, 저보다 더 도망자 같던 뒷모습.

사락!

어쩔 수 없이 헤론시는 장미 넝쿨 사이로 팔을 집어넣었다.

“!”

편지를 쥔 제 손을 발견했는지, 흠칫 놀라는 가테 백작 부인의 기척이 느껴졌다.

스륵.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빼내는 움직임을 느꼈다.

헤론시는 상대에게 편지를 전달하고 나서 곧장 자리를 비웠다.

‘이 돈이면 당분간 직업을 구할 때까지는 거처를 마련할 수 있겠지.’

타다다닥!

그 자리를 도망치듯 벗어나며, 머릿속으로는 앞으로의 삶을 계획했다.

막막하던 미래가 조금은 밑그림을 그려가는 것 같았다. 우습게도 교황파 귀족을 도운 대가로.

하지만 바라는 대로 살 수는 없더라도, 그저 살아갈 수는 있으리라.

* * *

“먼저 1개월 기간의 서기직을 주지. 그 이후에 계약을 연장하든지 말든지 고려해보겠다.”

원하던 대로 헤론시는 일을 구할 수 있었다.

허약한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뛰어난 머리를 이용해 제법 고임금의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

“예, 감사합니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귀족들이나 부유한 평민들에게 정보를 사고파는 업체의 서기직이었다.

설령 그것이 합법적인 일이 아니라고 해도 헤론시는 그 일이 마음에 들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건 아니지만, 비슷한 만큼의 지식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이런 일이 또 뭐가 있겠어. 게다가 더 희귀한 정보들을 얻게 될 수도 있지.’

비록 학교에 가지 못하더라도 어떤 것을 계속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헤론시는 그것이 가장 기뻤다.

또한…… 그동안 불가능하리라 생각해서 묻어뒀지만, 늘 마음속에서 의무처럼 여겨왔던 목표를 떠올렸다.

‘즈레이카 왕조의 복위를 원하는 세력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하지만 그 두 가지 기대는 모두 부숴졌다.

헤론시에게 주어지는 정보와 일은 하찮은 것들 뿐이었다.

“수도에서 유명한 사교 클럽에 대한 정보다. 귀족들에게 팔아야 하는 정보니 똑바로 정리하도록.”

처음 지시를 받았을 때는 꽤 번드르르한 일인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유명 사교 클럽에서 모의 되는 귀족들의 비밀 계획 같은 걸 다룰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신입 서기 따위에게 고급 정보를 다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사교 클럽에서 귀족들에게 아양이나 떠는 평민의 취향을 왜 정리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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