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 화 (90/132)

90 화

드르륵!

협탁을 뒤지는 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멜은 조급한 기색도 없이 천천히, 하지만 샅샅이 방의 모든 곳을 뒤졌다.

때때로 급한 손짓은 물건을 심하게 흐트러뜨리곤 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바로 잡으며 다음 목표를 향해 움직였다.

즈레이카 신성 왕국 기사단 명단

손길이 멈췄다.

목표를 발견한 이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팔락!

멜은 서류를 빠르게 넘겼다. 대강 이름을 훑고 넘어가는 듯한 시선은 사망 표시된 이름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멜은 찰나에 모든 이름을 외우고 서류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제 사랑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 사람이 염려하지 않게.

“죽었다 해도 무슨 상관이야.”

제 손으로 이룬 목표가 아니었다.

한때는 사랑만 알던 생명체가 다짐했다.

“말했잖아. 약속할게.”

침대에 걸터앉아 가볍게 다리를 흔들었다. 그러다가 풀썩,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의 명화 속에서 세상이 창조되던 시기에 이미 존재하던 바다를 찾을 수 있었다.

“이젠 너를 고통스럽게 하는 건 없을 거라고.”

* * *

먼저 헤론시 공을 만나러 갔다.

그가 알테슈메그에 대해 기술한 내용이 이후, 알테슈메그를 심문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다 작성하였습니다.”

헤론시의 중지는 펜에 짓눌려 덕지덕지 반창고를 붙인 상태였다.

그 두꺼운 책을 짧은 시간 내에 빼곡히 채우느라 손가락이 헐었던 듯했다.

“와. 정말 다 적었네?”

프로셴은 책을 받아들고 가볍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분명 평소처럼 발랄하지만, 묘하게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음성이었다.

“나중에 정리해서 특이점만 알려줘.”

활자 알러지가 있는 그는 책을 휙휙, 넘겨보다가 이내 그것을 미나엘에게 넘겼다.

그 책을 다 채우느라 고생한 사람 앞에서 취하기에는 꽤 가차 없는 제스처였다.

미나엘은 내 곁에 서서 책을 천천히 넘겼다. 내 두 손이 무거운 책을 들 만한 상태가 아니었기에 한 행동이었다.

‘꽤 쓸만한 내용이 많겠어.’

얼핏 봐도 헤론시는 충실히 기록을 해냈다. 하지만 나는 이전에 특히 강조했던 내용에 관해 물었다.

“알테슈메그 가테에 대한 기록은?”

“……마지막 10페이지 정도가 그 내용입니다.”

“터무니없이 적어. 그에 대해 특히 자세히 적으라고 했을 텐데.”

본인도 양이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드물게 헤론시의 얼굴에 난처함이 스쳤다.

상황이 시궁창이라도 늘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던 그에게는 큰 변화였다.

촤르륵!

미나엘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알테슈메그에 대한 내용이 적힌 페이지를 펼쳤다.

프로셴도 그 내용만큼은 제법 신경 쓰였는지, 미나엘의 옆에 붙어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가테 백작가문. 즈레이카 신성 왕국 시절,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신앙심이 깊었던 가문에 속함.

알테슈메그 가테: 가테 백작가의 외동. 어린 시절 대외 활동 없음.

분량이 작더라도 내용이 핵심적이라면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가테 부인: 약 5년 전부터 건강 악화. 최근 더욱 심해짐.

그런데 이 내용들은 너무…… 희소성이 없다.

“심각하군. 우리가 이런 내용도 모를 것이라 생각했나?”

보다 못해 미나엘이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나는 그녀가 분노하지 않았다는 것에 의의를 두었지만, 헤론시는 제법 당황했다.

“저는…… 꽤 오랫동안 감금당했기에 그 가문이 갑자기 왜 그렇게나 중요하게 여겨지는지 이유를 모릅니다. 교황파에서 국왕파로 순식간에 정치적 이념을 바꿔버린 것 외에 특이점이 없지 않습니까……?”

역시 감금당한 채 지내느라 별달리 아는 것이 없는 건가.

혹시 모르니 조금 더 압박해봐야겠다. 그리 생각할 때, 눈치 빠른 프로셴이 나섰다.

“실망이네. 자네가 이렇게나 쓸모없을 줄은 몰랐어.”

“…….”

“정말로 이 내용이 다라면 굳이 너를 내 성에서 지내게 해줄 필요성을 못 느끼겠는데…….”

프로셴의 웃음은 묘하게 서늘한 구석이 있었다. 비슷한 계열의 보랏빛 눈동자가 마주쳤다.

헤론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애를 쓰다가, 우리가 아직 모든 기록을 보지 않았다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가장 뒤에 적힌 내용은 저만 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팔락.

호기롭게 꺼냈지만, 그 음성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미나엘이 종이를 넘겼다.

그건 분명히 경멸하는 기색이지 않았습니까.

제 눈의 비늘이 한 꺼풀 벗겨졌습니다.

떨어진 비늘을 주워들고 억지로 눈에 끼워 맞춰야 하는지,

혹은 저를 삼키고 있는 갈증에 잠식당할 것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이건 무슨 내용의 시지?”

“시가 아니라 편지입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그 내용이 시라고 생각했지만 헤론시는 그것이 편지라고 답했다.

어떤 내용을 특정하는지, 당사자가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울 내용의 편지.

심상치 않은 내용이 담겨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우리가 유심히 편지의 내용을 살피자 헤론시가 부가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저는 귀족파에 붙잡히기 전, 줄곧 가테 백작가와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건 제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니라…… 태어나 보니 그곳에서 태어난 것뿐입니다.”

나는 그가 덧붙인 구구절절한 변명을 잘라내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게 알테슈메그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라는 건가?”

“……수신자가 가테 백작 부인이니 그럴 것으로 추측합니다.”

“자네가 이 내용을 어떻게 알지?”

“약 5년 전, 가테 부인의 건강이 나빠졌다고 적은 내용을 보셨을 겁니다. 그 직전의 시기에 제가 가테 부인에게 직접 전달한 내용이니까요.”

“……자네가 가테 가문의 안주인과 직접 소통하던 사이라고?”

이 점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대화에 끼어든 프로셴의 표정이 이전에 본 적 없이 딱딱해졌다.

‘이 자는 이전에 무슨 일을 하며 지냈던 것이지?’

프로셴의 경우를 대입해 헤론시 역시 안정적 직장이 없는 불안정한 삶을 살아왔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런 삶을 살다가 운 나쁘게 귀족파에 붙잡힌 것이라고.

‘하지만 그 추측이 틀렸을지도 모르겠어.’

우리의 안색이 서늘해지자 헤론시의 얼굴은 이제 창백함을 넘어 파리해졌다.

여태껏 침착함을 가장하고 억지로 미소를 올리고 있던 얼굴에는 일순간 피로함이 스쳤다.

“그에 대한 해명도 적어 놓았습니다. 부디 먼저 읽으시고…….”

그는 체념한 듯 무어라 한 마디를 덧붙이다가 쓰러졌다.

풀썩!

“……헤론시 공?”

* * *

19세, 이제는 보육 시설에도 머물지 못하게 되었다.

헤론시는 거리를 떠돌았다. 생각 없이 살아야 하는 인생이었다.

하지만 으레 거부하려 하면 더 현실에 얽매이듯, 그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고민했다.

‘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새까만 먹구름은 해가 지지 않았는데도 세상을 어둡게 만들었다.

거세게 내릴 것 같던 비는 생각보다 약하게 내리다가 멈추길 반복했다. 불길하게도.

백금발의 남자는 붉은 장미가 숭덩숭덩 핀 담벼락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

꽤 낭만적 장면일지도 모르지만, 남자의 행색은 만신창이였다.

달리던 도중 몇 번이나 넘어졌던가. 붉은 피가 흐를 때까지 까진 무릎과 손바닥이 아팠다.

“……우습네.”

연약한 덩굴과 꽃들 아래에 숨어 비를 피하는 모습이 스스로 보기에도 우스웠다.

이런 하찮은 인생도 살 의미가 있는 걸까.

……그럼에도 그는 바라는 게 있었다.

‘책을 읽고 싶어. 공부를 하고 싶어.’

보육 시설에서 지내던 무렵에는 책을 읽는 게 가능했다. 협소하지만 그곳에는 책장이 있었고, 책도 꽤 있었으니까.

학교에 입학한다면 훨씬 더 많이 책을 읽고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성인이 된 헤론시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고등 교육 기관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들어갈 수는 없을 거야.”

자신은 확실히 보증된 신분도 없을뿐더러 돈도 없으니까.

“하긴. 공부는 무슨. 당장 먹고살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주제에.”

마침 부슬부슬 내리던 비도 잠시 그쳤다. 어서 자리를 피해야 한다.

지금 그가 비를 피한 이곳은 가테 백작가의 담장이었다.

‘불량배들을 피해 뛰어오다 보니 여기까지 와버렸군.’

거리에 내몰린 부랑자가 가장 먼저 겪게 되는 건 불량배들의 폭력과 갈취였다.

헤론시는 정해진 수순처럼 그들에게 시달리다가 도망치는 걸 반복했다.

“하지만 여기서 더 머문다면 이제는 기사들에게 쫓기겠지.”

그리고 제 신분으로는 그편이 훨씬 두렵다.

가테 백작은 가진 작위에 비해 명성이 낮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굉장히 신실한 신도라는 점은 예측 가능했다. 교황이 지정한 기념일만 되면 저택 주변이 과도하게 꾸며지곤 했으니까.

‘호시탐탐 교황의 눈에 잘 보일 생각만 하고 있겠지. 그런 자에게 걸리면 끝장이다.’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그의 팔목을 잡아채는 이가 있었다.

“!”

‘불량배들이 여기까지 따라왔나? 혹은 기사들인가?’

갑자기 놀란 탓에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차마 고개를 뒤로 돌려 상대를 확인할 용기도 없었다.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는 악의가 없이 가녀렸다.

“저기, 얘. 놀라지 말아. 부탁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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