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화
푸른 눈이 사르르 접히며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분명 웃는 낯이었다. 하지만 나는 미묘한 서늘함을 지울 수 없었다.
지금은 그가 제정신인 걸까. 속으로 그딴 것을 가늠했다.
어차피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를 다시 버릴 일 따위 없는데도.
하지만 내 입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가 바다로 돌아갔다면 필시 상처받았을 것이면서, 그딴 말을 올렸다.
“왜 바다로 가지 않았어? 너도 알잖아. 나는 계속 너를 바다로 보낼 거라고,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만 했잖아.”
“거짓말인 걸 알거든.”
멜이 자신을 밀어내는 내 손을 마주 잡았다.
나는 그가 뻗어오는 손을 잡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닿는 체온이 서늘할 테니까.
그건 멜이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인어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마주 잡은 손은 놀랍게도 따뜻했다.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왜 그렇게 절박하게 달려온 건데?”
“…….”
“편지를 쓰지 않았던 걸 원망하진 않을게. 나를 두고 왕궁을 비운 것에 대해서도 탓하지 않을게. 왕궁에 와도 늘 내 곁에 있어 주겠다던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해서도 묻지 않을게.”
“…….”
“내가……, 내가…….”
멜이 갑자기 말하는 것에 뜸을 들였다.
이전까지는 숨을 쉬기라도 하는지 의아할 정도로 빠르게 말을 이어온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풀썩.
멜이 주저앉았다. 나는 그의 몸에 이상이 생겨 쓰러진 것인 줄 알고 놀라 그를 끌어안으려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내 들려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내, 내가…… 내가 너를 죽여서 미안해.”
한 번도 제 입으로 시인한 적 없는 말이었다. 멜은 늘 그것이 꿈이었다고 말하거나, 잊어버리곤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 멍하니 그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덜덜 떨려 오는 두 손이 내 손을 붙잡았다.
멜은 내 손을 제 입가로 가져갔다. 내 손가락의 모든 마디 위에 입 맞추며 그가 눈물 흘렸다.
“변명하지 않을게. 너를 때때로 원망했던 것도 사실이야.”
“…….”
“때때로 그날 그 일이 있었지만 네가 마음만 먹었다면 나를…… 바다에 보내줄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곤 했어. 그래서 쉽게 너를 탓하며, 네가 왜 과거를 잊지 못하는지 답답해했어. 나는 그 의문들 역시 과거라는 이유로 묻어버렸으니까.”
“…….”
“어차피 그 비극은 네 예상에도 없었던 건데. 네 잘못도 아니었는데…….”
심장이 쿵쿵 뛰었다. 숨이 가빠왔다.
나는 덜덜 떨리는 몸을 억지로 제어하려 노력하며 멜의 손에서 내 손을 빼내려 했다.
미처 멜이 왜 갑자기 사과하는 것인지 머릿속으로 정리하기도 전에 빠른 반박이 흘러나왔다.
“아니. 내 잘못이 맞아. 나는 우리 가문이 곧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런데 이기심에 너를 빨리 바다로 보내지 않았어. 그래서 네가 고통받은 거야.”
“네가 무엇을 알았겠어. 설령 그렇다고 해도 넌 그때 어렸잖아. 고작…… 열다섯 살이었잖아. 그렇게나 짧은 생 동안 너는 고통받기만 하고 끝이 났잖아.”
멜이 나를 올려다봤다. 울음을 겨우 삼키고 말을 잇느라 찡그린 얼굴이었다.
용서를 구하는 건 멜이었지만 나는 알았다. 정말로 용서를 받는 건 나였다.
“내가 먼저 부탁했어. 한 달만 더 네 곁에 있게 해달라고. 그러니까 그건…… 내가 저택에 갇혀야 했던 건…….”
“…….”
“네 잘못이 아니었어, 세르베인. 널 해친 이들이 나빴던 거야.”
그 말을 멜에게 듣고 싶었던 것 같다.
추악하고 이기적인 욕심이지만, 나는 그 말을 멜에게서 듣고 싶었다.
나도 몰랐던 나의 욕망을 확인하고야 말았다.
누구보다도 가장 힘들었을 그에게서,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을 이끌어 내고 말았다.
구원과 죄책감이 동시에 찾아왔다. 환희와 죽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나를 충동질했다.
“믿지 않아도 돼. 하지만 꼭 들어줘. 널 호수에 빠뜨린 후, 단 한 순간도 행복했던 적 없어. 단 한 순간도 후회하지 않았던 적이 없어. 네가 어떻게 나를 다시 찾아왔는데…… 내가 그때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런 짓을 저질렀어.”
사실 알고 있었다. 네가 거짓을 말할 리 없으니까. 네 말을 믿지 못한 적이 없으니까.
네가 정말 그때 현실과 꿈을 혼동해 그런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눈물을 그친 멜은 갑자기 내 손을 제 목으로 이끌어 담담히 말했다.
“원한다면 이번에는 네 손으로 나를 끝내줘.”
“……그런 말 하지 마.”
“나를 바다로 보낼 거라며. 그럴 거면 차라리 네 손으로 나를 죽여줘.”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저었다.
울음에 목이 막혀 소리를 낼 수 없었다. 하지만 멜은 사근사근하게 나를 설득해왔다.
“어차피 바닷물이 되어 바다로 돌아가는 건 똑같잖아. 그러니까 제발 네 손으로 나를 끝내줘. 네게 버림받느니 그게 더 행복할 거야.”
정말로 네가 나를 사랑하는 걸까.
나를 죽이게 된 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껴 내 곁에 있는 건 아닐까.
네가 너무 여리고 순수한 영혼인 탓에, 죄책감을 못 이겨 내 손에 죽고 싶다고 말하는 것 아닐까.
“나는…… 믿을 수가 없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순간 멜의 눈에 상처가 어렸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
“네가 그런 일을 겪고도 나를 사랑한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 그게 정말 사실이야? 죄책감 때문에 내 곁에 있는 게 아니야?”
“세르베인…….”
“진실을 말해줘. 사실을 말해. 여태껏 네게 거짓만 말하던 내가 요구할 자격이 없다는 건 알지만 솔직히 말해줘.”
“사실이야.”
멜이 주저 없이 말했다.
어느새 멜은 바닥에서 일어나 나를 마주 보며 섰다. 그는 우는 듯, 웃는 얼굴을 하고서 내 뺨을 조심스레 쓸었다.
그 손이 조금 따뜻했던 것 같다.
“처음 내가 호수에서 나오게 되었을 때, 저택으로 걸어가면서 생각했어. 네게서 한마디만 들어도 곧바로 용서해버릴 것 같다고.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설령 그것이 성의 없는 거짓이라고 해도 널 용서해버릴 것 같다고. 널 보기만 해도 모든 고통이 사라질 것 같다고.”
“…….”
“사랑해. 몇 번이나 내게 돌아와 나를 저택에서 이끌어 내려 한 너를 전부 기억해. 그런데 어떻게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그 순간,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맹세코 한 번도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었다.
공작가의 후계자로 태어나, 기억할 수 있는 어린 시절부터 의젓한 척을 해야 했다. 그래야 어머니의 죄책감을 덜어드릴 수 있으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나를 기생충처럼 바라보던 아버지에게 소리 내어 우는 꼴 따위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다음 생에는 어땠더라.
비빌 언덕이 없는 고아로 자라, 제 입에 풀칠하는 것도 힘겨운 사람들의 틈에서 호의를 구걸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리 내어 울어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이번 생에서는…….
“사실 난 한 번도 너를 원망한 적 없어. 그 일을 끄집어낸 것도, 그냥 너를 바다로 보내기 위한 변명이었어. 하지만 사실은 널 보내고 싶지 않아.”
울음을 토해내면서도 그 말만큼은 흔들림 없이 내뱉었다. 늘 해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사실 멜은 내게 무릎을 꿇을 필요가 없었다. 내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용서를 하기 이전에, 그가 내게 죄를 지었다는 생각조차 없었으니까.
그러니 내가 그를 원망을 했을 리도 없었다.
“세르베인. 울지 마. 난 너를 떠나지 않아.”
나를 끌어안은 채, 멜이 다정히 내 등을 도닥였다.
그는 눈물에 젖은 내 뺨에 입을 맞추며 사근히 속삭였다.
“이젠 너를 고통스럽게 하는 건 없을 거야.”
* * *
그를 폐허 같은 방에서 빼내 내 방으로 데려왔다. 분명 안 좋은 기억만 가득할 그 방에 멜을 둘 수가 없었다.
내 방에서는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하지만 멜은 창밖으로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붕대에 감긴 내 손만 바라보고 있었다.
“멜, 있잖아…….”
이제야 함께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는데 현실은 별개의 문제였다.
패악질을 부리든, 앓아눕든, 뒷일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던 시절과는 달랐다.
내 위치가 그럴 수가 없는 위치가 되어버렸다.
“괜찮아. 다녀와.”
손을 둘러싼 붕대를 초조하게 매만질 때 멜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나는 조금 놀라서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차피 넌 나를 안 떠날 거잖아. 그런 확신이 있다면 나는 정말로 괜찮아.”
잠시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멜은 놀랍도록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그동안 그의 정서는 어딘지 미성숙한 시절에 멈추어 있었던 것 같았음에도.
부쩍 늘어난 멜의 인내심에 안도하면서도 조금 의아해졌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기에 그를 침대에 앉혀 두고 말했다.
“밖에 사용인들이 있어. 뭔가 필요하면 말로 설명하면 돼.”
“응.”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바로 나를 불러.”
“하하, 알겠어. 난 정말로 괜찮아.”
멜은 웃으며 나를 배웅했다.
나는 그를 이 방에 혼자 두고 떠나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달칵.
“…….”
문이 닫혔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듣던 멜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세르베인의 방을 둘러봤다.
마침내 그 시선이 협탁에 머물렀을 때.
그는 아무런 징조도 없이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