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 화 (88/132)

88 화

“그래야 멜이 문을 열어주지 않겠어?”

알테슈메그는 떠올렸던 말을 잊어버렸다.

설마 성을 태우겠거니, 그보다는 사람을 태운다는 게 더 믿음직하다고 생각했는데 예측이 빗나갔다.

‘도대체 저 제정신 아닌 계획을 어떻게 만류하지?’

가만히 뒀다가는 백 퍼센트 실행한다.

여태껏 봐왔던 녹시렐 공작의 실행력이라면 분명했다.

알테슈메그가 고장난 것처럼 멍하니 서 있자 세르베인은 살풋 인상을 찡그렸다.

“하긴. 경은 이제 이곳에 막 왔으니 모르겠군. 가보게.”

휙, 뒤돌아 가버리는 산호빛 머리칼이 가볍게 흩날렸다.

그 형체가 조금씩 멀어지는 것을 보다가 정신을 차린 알테슈메그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제, 제가 문을 열어 보겠습니다! 그러면 되지 왜 불을 지릅니까?!”

* * *

사실 왕성 안의 문들은 침입자들에 대한 대비로 굉장히 두껍고 견고했다.

알테슈메그 역시 자신이 힘으로 부수는 것보다는 열쇠공을 부르는 게 합리적인 걸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열쇠공이 올 때까지 이 사람이 불을 지르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없거든.’

알테슈메그는 세르베인의 피 흘리는 손을 봤다.

이미 흰 손수건이 빨갛게 변했지만, 더 이상 피가 흐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저 손도 분명 문을 열려다가 다친 것이 분명했다.

알테슈메그는 세르베인을 뒤따라가다가, 그 옆으로 다가서서 걸으며 물었다.

“공작님. 일단 손부터 치료받으시는 게 어떠십니까?”

앞만 향해 걸어가던 몸이 고개만 비스듬히 돌려 저를 바라봤다.

알테슈메그는 흠칫 떨었다.

저 사람이 지금 제정신이 아니란 걸 알아서 그런 걸까. 눈이 마주칠 때마다 화들짝 놀란 듯이 심장이 반응했다.

“경이 내 걱정을 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군.”

세르베인은 한쪽 입꼬리만 짧게 올렸다가 내려버리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걱정하는 척하느라 고생한다고 비꼬는 의미였다. 그게 묘하게 어이가 없고 섭섭했다.

‘본인도 내가 다리 다쳤을 때 스스로 물건을 사러 갔으면서.’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알테슈메그는 또다시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무의식적으로 제 뺨을 때렸다.

짝!

‘내 다리가 누구 때문에 그 모양이 됐는지 잊었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오려 할 때 세르베인이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는 미친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한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내 공작이 본인의 머리를 검지로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머리에 문제가 있냐는 뜻이었다.

“의사를 봐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경인 것 같군.”

사돈 남 말 하시네.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지만 알테슈메그는 가까스로 억지웃음을 지어 삼켰다.

사실 스스로도 조금, 아까부터 조금 머릿속이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기에 ‘공작님이 더 급하죠.’라는 중의적인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절그럭, 절그럭.

그런데 걷던 중 갑자기 발에 이상한 이물질이 밟히기 시작했다. 또한 물이 흥건한 채 방치된 바닥도 곳곳에 보였다.

꽤 지저분하고 불쾌한 느낌이었기에 알테슈메그가 물었다.

“혹시 왕성은 청소를 매일 하지 않-.”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을 하다가 멈췄다.

이 층의 복도를 계속 걷고 있다는 건 여기에 멜 공자의 방이 있다는 의미였다.

‘……설마 사용인들이 그 남자를 볼까 봐 청소도 안 시킨 건가?’

그럴싸한 가설이 들자 알테슈메그는 입을 다물었다.

녹시렐 공작이 왜 갑자기 말을 멈추냐고 물어보면 어쩌지 고민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대신 공작은 갑자기 제 앞을 가로막더니 말했다.

“경은 이만 가 봐.”

영문도 모른 채 알테슈메그는 세르베인의 뒤에 멈춰 섰다.

폭풍 속의 고요처럼, 미처 이유를 묻기도 전에 세르베인은 자신이 할 말만 차분히 이었다.

“시종, 혹은 아무 사용인들에게 말해. 녹시렐 공작이 응접실에서 기다리라 말했다고. 그럼 안내해줄 거다. 그리고 잠시 빌리지.”

세르베인은 뒤돌아 알테슈메그의 검을 잡았다. 아직 왕실 기사단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압수당하지 않았던 무기였다.

챙!

타인의 허리에 찬 검을 뽑는 것답지 않게 빠른 발도였다. 이전에 그녀가 왕의 검을 대신 뽑았을 때 봤던 모습이었다.

“공작님, 갑자기 이게 무슨-!”

알테슈메그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항의를 하려 했지만 세르베인은 이미 뛰쳐나간 후였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어디를 향했는지는 명백했으니까.

피가 고이고 부러진 촛대가 굴러다니는 폐허 같은 풍경 앞의 방이었다.

* * *

촛대에 심하게 베인 손이 아프지도 않았다. 손수건을 뚫고 다시 피가 축축이 흘러나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검을 미끄러트리지 않기 위해 더욱 힘을 줘서 잡았다.

물이 이미 말랐던 복도에 새로 물이 고인 곳이 있었다.

‘그건 간밤에 이곳을 방문했던 자가 또 발걸음을 했다는 의미겠지.’

얼마 되지 않는 거리를 뛰는 것인데도, 그 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아직 저 방 안에 멜이, 혹은 제 형상을 따라 한 그 존재가 남아 있을지. 모든 게 불확실했다.

‘정확한 정체는 모르지만 바다가 보낸 존재일 거다. 또다시 여기에 왔다는 거면 멜이 내가 문을 두드리던 그 시점에는 여기에 있었다는 거야.’

타다닥!

‘……그런데 왜 너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어?’

거기까지 생각하자 걸음이 저절로 멈췄다. 속이 메스꺼워지기 시작했다.

‘누가 문을 열었을까. 바다가? 아니면 네가?’

내게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지만 바다에게는 문을 열어준 건가? 바다로 돌아가려고?

문고리가 이미 떨어져 있었기에, 세게 걷어차기만 한다면 문은 열릴 것이다.

하지만 그 앞에 도달하자 걸음이 멈추고 말았다. 충동적으로 뽑았던 검이 무겁게 느껴졌다.

실성과 울음이 동시에 나올 것 같던 순간에 갑자기 문이 열렸다.

벌컥!

눈으로 따라갈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제 팔을 잡고 끌어당겨 품에 안은 이가 누구인지 알게 되자 검을 놓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세르베인.”

갑작스러운 재회였다. 하지만 다급한 손짓과 달리 답해오는 음성은 차분했다.

그간의 공백이 없었다는 듯, 그는 나를 안아왔다. 내게는 그것이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널 다시 만나면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밤을 새워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너는 이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나를 대할 줄은 몰랐다.

방금은 내게 문조차 열어주지 않았으면서. 갑자기 태도가 변한 이유가 무엇이지?

‘그건 네가 또 모든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인가?’

“멜. 괜……찮아?”

의도하지 않았는데 덜덜 떨리듯이 목소리가 나왔다. 불안을 숨길 수가 없었다.

나는 그 품에 묻혔던 고개를 들어 멜을 이리저리 살폈다. 또한 방 안을 살폈다.

……곳곳이 젖어 있었다. 네가 녹시렐 저택에서 바닷물이 되어 사라질 뻔했던 때의 풍경처럼.

심장이 툭, 떨어진 듯이 순간적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멜은 엉망이 된 방 안이 보이지 않는 듯, 한가롭게 서 있었다.

나는 그와 달리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처럼 불안했기에 숨 가쁘게 물었다.

“여기…… 누가 왔었어? 뭐였어? 왜 왔대? 내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어? 너 어떻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세르베인.”

차가운 손이 부드럽게 내 입을 가렸다. 이후엔 천천히 내 뺨을 쓸었다.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멜과 그 존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그래서 네가 이렇게 아픈 표정을 짓는 것이다. 그래서 네가 나를 마주할 용기를 얻게 된 것이다.

흐드러지게 핀 장미처럼 아름다웠던 얼굴에 푸른 수심이 어려 있었다.

나를 보며 다정히 미소 짓고 있었지만, 눈에서는 곧장 물이 흐를 것 같았다.

나는 그래서 멜이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존재에 대해 물을 수밖에 없었다.

“누구였어?”

“사람이 아니었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 것뿐이야. 그러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사람이 아니면 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짐작 가는 존재가 있었다.

바다에서 나타나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다면 인어일 것이다.

인어 외의 존재가 또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왜인지 이 방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멜을 찾아온 존재가 같은 인어일 것 같다고 예감했다.

“인어야?”

‘바다는 분명 내게 너를 보내라고 했는데, 더 못 기다리고 다른 인어를 보내 너를 데리고 가려 한 거야?’

그것 역시 묻고 싶었지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내가 멜에게 바다로 돌아가라고 종용했으면서, 그런 질문을 할 자격이 없지 않은가.

“……그게 중요해?”

멜은 굳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겁먹은 것을 숨기기 위해 무표정을 가장하는 특유의 불안정함이 있었다.

처음에는 무엇 때문에 그의 심기가 틀어졌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어 들려오는 말 때문에 알게 되었다.

“저게 인어라면? 온전한 인어라면 나를 버리고 저것을 취할 거야?”

멜은 천천히 내 두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손수건에 감긴 오른손을 보고는 왈칵,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결국 그는 내 왼손만을 잡은 채, 제 뺨 위로 내 손을 이끌었다.

내 손에 얼굴을 기대며 그가 말했다. 상냥하고 애처로운 목소리였다.

“나보다 아름다운 인어는 없어.”

알고 있다.

“설령 내게 꼬리가 없다고 해도 네 눈에는 내가 가장 아름답잖아.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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