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화
‘녹시렐 가문에 대대로 정신병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던데 누가 그 후손 아니랄까 봐…….’
알테슈메그는 공작이 이대로 자신을 버리고 가주길 원했다.
시종이 시킨 대로 그냥 복도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이 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테슈메그는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데 여전히 복도로 떨어지는 피가 보였다.
그 피는 녹시렐 공작의 손에 난 상처에서 흐르고 있었다.
‘그간의 전적이 있다 보니 또 누구 한 명 처리하고 피를 묻혀온 줄 알았지…….’
알테슈메그는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제복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물론 그 즉시 왜 자신이 손수건을 꺼냈는지 잠시 의아해졌지만.
‘내가 미친 건가?’
알테슈메그는 이제 다 나은 제 손바닥 위에 놓인 흰 손수건을 몇 번이나 쥐었다가 펴길 반복했다.
제 원수인 녹시렐 공작을 위해 손수건을 꺼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손이 베이든, 화상을 입었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하지만 이미 꺼낸 손수건, 그래도…… 다친…… 레……이디……를 앞에 두고 다시 집어넣는 것도 이상할 테지.
알테슈메그는 주저하다가 녹시렐 공작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저…… 잠시 손 좀 보겠습니다.”
호랑이의 앞발을 잡는 것처럼 눈치를 봤다.
뜻밖에 공작이 생각에 빠진 탓에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는 안심했다.
알테슈메그는 세르베인의 손을 조심스레, 그리고 신속하게 손수건으로 묶으며 지혈했다.
생각보다 그 손이 가늘고 여리다는 것에 놀랐던 것 같기도 하다.
“공작님. 빨리 의사를 만나러 가보시는 것이-.”
“뭐,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경은 불이 어디 있는지 아나?”
갑자기 웬 불 타령이지?
알테슈메그는 손수건으로 나비 모양 매듭을 만들다가 벙쪄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공작이 손을 거둬가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불…… 말입니까? 그, 일단 불은 나중에 찾고 의사를 보러 가시는 게 어떠신지…….”
“나중에 내가 알아서 갈 거니 그건 신경 끄게. 그런데 불은 어디 있어?”
“불은 왜 찾으십니까?”
“조금 어두워서. 등불이 필요할 것 같아.”
지금은 정오였다.
알테슈메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사교적으로 웃는 얼굴을 유지했지만, 등 뒤는 식은땀으로 젖어서 축축했다.
성안은 등불 따위는 필요 없을 정도로 밝았다.
알테슈메그는 이 상황에서 저 공작에게 불을 쥐여주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그때 공작이 히죽 웃었다.
알테슈메그는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왜. 안 믿겨?”
“믿, 믿, 믿습니다.”
수도 없이 긴 시간 동안 기도했던 때에 속삭였던 말이다.
전혀 그때와 비슷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 말이 튀어나왔다.‘어떻게 해야 하지? 진짜로 불은 주면 안 될 것 같은데.’
알테슈메그는 끊임없이 녹시렐 공작의 눈치를 살폈다. 가만히 서 있어도 바닥이 배에 올라탄 것마냥 울렁이는 기분이었다.
‘……그냥 불을 줄까? 그러면 나한테서 신경 끄고 제 갈 길 갈 것 같은데. 하긴. 불을 줘봤자 뭘 하겠어. 성에 불이라도 지르게?’
그 생각까지 닿자 알테슈메그는 저절로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성을 태우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태우려는 것이면 어떡하지?’
저 손을 보니, 공작의 상처에서 나온 피긴 하지만 어쨌든 누군가를 처리하려다가 생긴 상처일 게 분명했다.
살생에 동조하는 것은 죄다.
이미 져버리기를 결심한 교리지만 알테슈메그의 주황색 눈동자가 사시나무 떨리듯이 흔들렸다.
‘빨리 시종이 저를 찾아오길 기다리며 시간을 끌어야 하나?’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녹시렐 공작을 수습할 수 있을 만한 유일한 존재.
그 남자의 존재가 이번만큼 반가웠던 적이 없었다.
알테슈메그는 안심하고 표정을 푼 채 물었다.
“그런데 멜 공자는 어디 계십니까?”
……하지만 그게 지뢰일 줄은 몰랐지.
“네가 멜을 왜 찾아?”
경이라는 호칭이 날아갔다.
‘사실 여태껏 그 호칭으로 불러 준다는 게 놀라운 편이긴 했지만.’
알테슈메그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침을 삼켰다.
사실 이때부터 약간의 불안감을 감지한 상태였다.
“그야…… 공작님을 보니 그분의 안부도 생각났을 뿐입니다.”
“…….”
“전 남자에 관심 없습니다. 정말 단순한 겉치레 인사인걸요.”
괜히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니 더 이상했다. 하지만 저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알테슈메그는 이런 상황에 스스로 굴욕감을 느꼈지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면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런가…….”
다행히 녹시렐 공작은 수긍하는 기색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바닥으로 향하는 시선을 보니 조금 마음이 진정됐다.
하지만 호러 연극 속 주인공처럼, 공작은 갑자기 고개를 쳐들더니 물었다.
“내가 납득할 줄 알았어? 멜을 만나러 온 건가? 왜,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기사단 예복을 입은 거야? 응?”
이 의부증 환자가.
알테슈메그는 속에서 혈압이 올라 바들바들 떨리는 혈관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예복을 차려입은 건 당신네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잖아!’
알테슈메그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며 천천히 심호흡했다.
분명 이 사람, 오늘이 제 심문 날이라는 걸 잊어버렸다.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 이 사람에게는 그런 하찮은 안건이었다는 걸 알게 되니 울거나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겨우 감정을 다스린 후, 알테슈메그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언젠가, 부랑자에게 달려들던 녹시렐 공작을 막아설 때만큼 당혹스러운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그 기록이 갱신되었다.
“공작님. 오늘은 제…… 심문 날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갖출 수 있는 최고의 예의를 갖춰 이곳에 온 것입니다.”
“그럼 대기실에 있을 것이지 왜 밖을 어슬렁거렸지? 역시 멜을-”
“제가…… 그랬던…… 이유는…… 시종이…… 제게 있을 곳을 소개해 주지 않더군요. 하하…….”
애써 잊고 있었던 수모가 다시 떠올랐다.
이를 악물고 겪었던 굴욕을 고백하니 그제서야 녹시렐 공작의 표정이 풀렸다.
“그런가.”
그 반응에 잠시 안도하는 순간 녹시렐 공작이 갑자기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또 왜.’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모르는 폭탄을 보는 것처럼, 알테슈메그의 얼굴이 푸르죽죽해졌다.
이내 공작은 또다시 검으로 상대의 목숨을 노리는 것처럼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니야. 네가 언제부터 멜과 친했다고 그의 안부를 묻지? 겉치레라도 묻지 않을 텐데. 여태껏 물은 적 없었잖아. 그런데 나를 보고 그가 떠올랐다면 그것부터가 관심의 표현 아닌가?”
잘못 걸렸다.
알테슈메그는 이제 해탈한 얼굴로 빙긋 웃었다.
‘내가 다시는 당신한테 먼저 말 거나 봐라.’
속으로 그리 다짐하다 보니 드는 의문이 있었다. 알테슈메그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나는 왜 녹시렐 공작을 굳이 따라와서 계속 말을 걸고, 머저리처럼 손까지 지혈해준 거지?’
……나중에 꼬투리 안 잡히려고 그런 거지. 그래. 그런 거야.
애써 생각을 지워버린 후, 알테슈메그는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원래는 언급하지 않으려고 했던 주제였다.
“이건 저에 대한 처분이 결정 나면 말씀드리려 했는데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공작님. 저의 가문에서 곧…… 다과회를 엽니다. ……어머니께서 차를 즐기셔서 종종 주변 분들을 초대하곤 하셨죠.”
사실은 가테 백작의 결정이었다.
가테 부인의 건강은 취미 삼아 다과회를 계획할 만큼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물론 처음에는 저도 함께 동조해서 짠 계획이었다. 오히려 자신이 더 강력하게 이 일을 실행하자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실행하기 망설여졌다.
그 이유는…… 역시나 모르겠다.
“원래는 부부 동반 참석인데 비록 공작님께서는 미혼이시지만 어머니께서 꼭 초대를 원하셔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혼자 오시기에는 망설여질 수 있을 테니 멜 공자와 함께 오시라는 말을 하기 위해 안부를 여쭙게 되었습니다.”
“…….”
“여기, 초대장입니다.”
겉옷 안주머니에서 초대장을 꺼냈다.
사실은 꺼내 보지도 않고 그대로 저택에 가져갈 계획이었는데 이렇게 되어버렸다.
“그 말은 사실인가 보군.”
초대장을 찬찬히 살피던 녹시렐 공작이 무심히 말했다.
초대장은 굉장히 정성스레 만들어져 있었고, 녹시렐 공작의 이름이 이미 적혀있었다.
딱 봐도 급조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경의 말을 믿어주지.”
다시 ‘경’이라는 호칭을 회복했다.
이제는 정말 녹시렐 공작을 의사에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는 복도에 그냥 서 있겠어.’
알테슈메그가 그리 다짐하며 이만 작별 인사를 건네려 할 때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나와 함께 불을 찾으러 가지.”
또다시 불 타령이다.
알테슈메그는 적당히 ‘모릅니다. 저는 왕성에 자주 오지 못해서요.’라고 대처하려 했지만 생각을 바꾸었다.
그 이유가 정말로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궁금해서 여쭈는데 불은 왜 찾으십니까? 어두워서 그러셨다고 말씀하셨지만, 솔직히 지금은 너무 밝은걸요.”
“내가 어두워서 불이 필요하다고 말했었나?”
제가 했던 말도 잊은 모양이다. 그만큼 대충 댄 변명이란 것이지.
알테슈메그는 짜게 식은 표정을 애써 감추고 공손히 답했다.
“예. 그러셨습니다.”
“성을 태우려고.”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