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 화 (86/132)

86 화

여태껏 별다른 말도 걸지 않고 방치했으면서 갑자기 찾아오는 게 어이가 없었겠지.

멜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런데도…… 너무 초조해져서 신경이 예민해졌다.

“나를 위해서 스스로 방에 들어간 거 아니었어?”

덜커덕, 덜커덕.

잠긴 문고리를 강박적으로 돌려댔다. 하지만 문은 여전히 잠긴 채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 내가 너를 찾으러 오면, 다시 나를 만나주려고 바다로 가지 않고 방에 남은 게 아니었어?”

쾅쾅!

“멜, 내가 부르잖아. 왜 대답하지 않아?”

설마 그사이에 생각이 변한 걸까.

이성을 되찾고 보니, 본인이 여기에서 기다릴 이유가 없다는 걸 알게 된 걸까.

본인의 감정이 한낱 착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일지도 모르지.

쾅!쾅!!

“문 열어!!!”

나를 버리고 바다로 가버린 거야?

밤중에 너를 찾아온 바다와 함께.

“네가 나를 떠날 수 있을 것 같아?!!”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땐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얼마나 소리를 질렀던 것인지 목이 쉬기 직전이었고, 피 맛이 느껴졌다.

근처에 있던 촛대를 집어 들었다. 있는 힘껏 문고리를 내리쳤다.

쨍! 캉!!

‘문을 열었을 때 멜이 없으면 어떡하지?’

순간 내리치던 팔이 멈출 뻔했지만, 다시 더욱 세게 내려쳤다.

외면해봤자 변하는 건 없다.

여태껏 멜을 만나지 않고, 그가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던 걸 놔두어서는 안 됐다.

“내가 보내줘야 넌 갈 수 있어!”

쨍그랑!

부러진 촛대가 부서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부러진 날카로운 단면에 손이 베였다. 순식간에 손이 피로 흠뻑 젖었다.

반만 남은 붉은 촛대를 바라보다가 원망을 담아 문을 향해 던졌다.

하지만 심하게 베인 손으로는 촛대를 세게 던질 수 없었다.

“……그래.”

여전히 열리지 않는 문을 보니 실실 웃음이 나왔다.

“불이라도 지르면 나와줄래? 네가 안 나오면 나는 죽는 거야.”

그때 내가 불이 난 숲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너의 희생 덕분이었다.

그때는 나를 좋아하지도 않았으면서 착해 빠져서는 그런 행동을 했었지.

“이미 바다로 돌아가서 없는 거야?”

“…….”

“……그래도 상관없어.”

그러면 그냥 죽는 거지.

뒷말은 삼키고 뒤돌았다. 불을 가지러 갈 셈이었다.

* * *

멜은 문 앞에 서 있었다.

이번에는 도저히 제 환각이나 환청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너무나 선명한 실체였다.

멍하니 세르베인이 외치는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문을 열어도 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네가 괜찮은 것 같지 않아.’

세르베인이 안정되면 다시 그 애의 곁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내가 널 이렇게 만든 걸까?’

쾅! 쨍그랑!

‘너를 위한다면…… 조금 더 기다렸다가 널 만나야 하는 거 아닐까?’

문고리를 내려치고, 문을 내려치는 소리가 반복해서 들렸다.

멜은 세르베인이 제 손으로 문을 두드리는 것보다는 무언가로 문고리를 내려치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손이 덜 아플 테니까.

세르베인의 행동들이 무섭지는 않았다.

스스로도 이상하다는 걸 알지만 그게 꽤…… 오랜만이라 기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시 만난 이후 너는 조금도 초조해 보이지 않았거든.”

무심코 작게 중얼거린 멜이 서둘러 제 입을 막았다.

하지만 다행히 세르베인은 문을 두드리는 소음 탓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멜은 계속해서 문고리에 손을 대었다가 그만두길 반복했다.

‘지금 너를 만나면 행복하겠지. 네가 날 좋아하고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다시는 내게 바다로 가라는 소리를 하지 않을 거야.’

그 생각을 하자 마음이 들뜨고 웃음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멜은 곧바로 다시 우울해졌다.

‘하지만 내가 정상이 아닌데.’

환각과 환청을 겪고 있다는 걸 알면 또 버림받을지도 모른다.

‘네가 안정되길 바라서 멀어진 건데, 지금 널 만나면 다 허사로 돌아가는 게 아닐까?’

제게 집착해주는 세르베인이 좋았다.

가족도 친구도 일도 일상도 다 내팽개치고 자신만 바라는 세르베인이 좋았다.

세르베인과 함께 수도를 떠나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돼. 넌…….’

하지만 멜은 분명히 기억했다.

세르베인은 친구를 가지길 원했다.

또 자신을 사랑해주는 가족을 원했고, 집을 떠나 바깥 생활을 경험하는 것도 원했다.

‘네가 또다시 후회하고, 꿈만 꾸는 삶을 살게 하지 않을 거야.’

세르베인이 뭐라고 해도 자신은 그녀의 곁에 남을 것이다.

그녀가 바라는 삶을 사는 모습을 그 곁에서 지켜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되었다.

밤마다 저를 찾아오는 환청이 있었다.

‘그때 문을 열었더라면 환영까지 보았겠지.’

결심했다.

적어도 그 끔찍한 환상이 나를 찾아오지 않을 때 문을 열 것이라고.

네가 안심하고 신뢰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을 때 문을 열 것이다.

멜은 단념하고 문고리에서 손을 뗐다.

그 순간 웃음기 어린 세르베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이라도 지르면 나와줄래? 네가 안 나오면 나는 죽는 거야.”

멜은 자신도 모르게 표정을 딱딱히 굳혔다.

순간적으로 제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잠깐의 정적 후, 밖에서 음울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미 바다로 돌아가서 없는 거야?”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이상한 것이 있었다.

그저 세르베인이 저를 보고 싶어서 찾아와 외친 말이라 생각해 무심코 넘겼던 말들이었다.

‘왜…… 계속 내가 바다로 돌아갔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계속 여기에 있었잖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상관없어.”

이번에는 갑자기 세르베인이 문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멜은 그것이 잠깐 멀어지는 연기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발소리는 계속해서 멀어졌다.

정말로…… 단념한 것처럼.

‘뭐가 상관이 없다는 거야?’

몸이 덜덜 떨릴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추위를 느끼지 않는데도 그랬다.

‘방금까지만 해도 문을 열라고, 나를 보고 싶다고 소리를 질렀으면서 그렇게 빠르게 단념할 수 있는 거야? 바다로 갔어도 상관없다는 거야? 왜? 어째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발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멜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둘러 문고리를 잡았다.

빨리 세르베인을 붙잡으러 가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또 버려질지 몰랐다.

덜커덩, 덜컹!

고장난 문고리는 마음과 달리 쉽게 열리지 않았다.

멜은 결국 힘으로 문고리를 부수고 문을 열었다.

“……세르베인?”

그런데 열린 문 앞에 세르베인이 서 있었다.

* * *

알테슈메그는 오늘 일부러 기사단의 예복을 갖춰 입고 입성했다.

오늘은 비공식적 재판이 있는 날이었다. 제 가문과 자신의 처우가 오늘 결정 나는 것이다.

“가테 경께서는 잠시 기다려 주시죠.”

“……그러지.”

시종의 말에 알테슈메그는 가까스로 평정심을 가장하고 웃으며 답했다.

하지만 속은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대기실조차 안내해주지 않는다니.’

분명 왕을 보좌하며 지금 가테 백작가가 어떤 상태인지 아는 것이지.

알현 시각이 잡힐 때까지 복도에서 알아서 기다리라는 것은 충격적인 수준의 푸대접이었다.

‘고작 하급 귀족 따위였던 주제에.’

알테슈메그는 이를 악물었다.

프로셴, 그 하찮아 보이던 남자는 왕이 되자 제 직속 시종으로 어느 변방의, 존재 여부도 몰랐던 하급 귀족을 데려왔다.

‘원래라면 내가 들어갔어야 할 자리인데.’

백작 가문보다 고위 계급의 귀족 자제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는 알테슈메그가 지원하기만 했다면 자신의 것이 되었을 자리였다.

저벅저벅.

알테슈메그는 마음대로 걸음을 옮겼다.

분명 몇 시간 동안이고 세워둘 게 분명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가만히 서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걷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게 덜 자존심 상했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던 중, 알테슈메그의 진한 주홍색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몇 시간이고 세워둘 줄 알았는데 곧바로 일정이 잡힌 건가?’

걷자마자 녹시렐 공작을 발견할 줄이야.

녹시렐 공작은 어디론가 바쁘게 가고 있었다.

저를 만나러 온 것일지도 몰랐다.

“공작님.”

“…….”

“……공작님?”

하지만 알테슈메그는 곧 확신할 수 있었다.

녹시렐 공작의 목적은 자신이 아니라는 것.

또한 지금 저를 무시하고 걸어 가버린 공작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녹시렐 공작은 제가 불러도 듣지 못한 것처럼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꼴도 보기 싫은 인간의 부름이라 일부러 무시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상태가 이상해 보였다.

저벅저벅.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

“들리기는 하시죠?”

알테슈메그는 세르베인의 뒤를 따라갔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다가 녹시렐 공작의 한쪽 손이 피범벅인 것을 보고는 뒤늦게 기함하며 팔을 잡았다.

“이번에는 누구의 피를 묻히신 겁니까?”

녹시렐 공작이 거칠게 뒤돌아 자신을 바라봤다.

알테슈메그는 녹시렐 공작의 짐승 같은 노란 눈동자와 마주치자 저절로 목 뒤에 소름이 끼쳤다.

공작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눈빛과의 괴리감이 느껴지는 차분함이 더욱 불길했다.

“경이 왜 여기 있지?”

“죄송합니다.”

‘공작님께서 오늘로 일정을 잡으셨잖습니까.’라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냥 저절로 사죄의 말부터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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