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공작님.”
응접실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틸리타와 그녀의 딸, 다폴샤가 있었다.
왕궁에 그들을 데리고 온 후, 너무 바빠서 며칠이나 지난 후에 정식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마련하게 되었다.
틸리타는 철저히 격식을 지키며 사무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고, 다폴샤는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내 시선이 본인에게 닿는 것을 못 견뎌 하는 낌새가 보였다.
‘살롱에 잠입했을 때 나의 상관으로 있었던 일 때문인가.’
그런 걸로 불안해할 필요는 없는데. 내가 일부러 잠입한 일이었으니까.
괜찮다고, 그 일로 불안해하지 말라고 말을 해줄까 고민할 때, 미안하게도 틸리타가 먼저 나의 안부를 물어왔다.
“괜찮으십니까, 공작님?”
그건 벌써 며칠이나 전의 내 상태에 대한 안부 인사 같았다.
내가 왕궁에 돌아오자마자 급속도로 안색이 어두워졌던 걸 지금까지 염려한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그때는 잠입을 마치고 오랜만에 왕궁에 돌아오니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와 그랬던 것뿐이야.”
“……그게 아니라 어제의 일에 대해 여쭙는 겁니다.”
나는 사용인들이 들어와 준비해 준 차를 들려다가 멈췄다.
‘어제? 내가 어제 틸리타를 만난 적이 있었나?’
요즘 워낙 정신을 놓고 사는 탓에 어딘가에서 틸리타와 마주친 후 무심코 잊어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동안 정식적으로 회의를 가지지는 못했어도 틸리타와는 몇 번 지나가다 마주치며 짧게 인사를 나누곤 했으니까.
최대한 기억을 되살리려고 노력하자 틸리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정확히는 오늘 새벽에 복도에서 다폴샤와 마주치셨다고 들었습니다. 굉장히 불안정하신 상태로요.”
내가 아무리 요 근래 정신을 빼놓고 살았다지만 한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어제, 그러니까 오늘 새벽에 복도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닌 적이 없었다.
게다가 틸리타가 아닌 다폴샤와 만났다면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동안 다폴샤와는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으니까.
“다른 사람과 착각한 것 아닌가?”
“아닙니다, 공작님. 정말 기억 안 나시나요? 비를 맞아 젖은 채 복도에 계셨잖아요.”
여태껏 안절부절못하던 다폴샤가 제법 억울했는지 성급히 반박했다.
틸리타가 살짝 표정을 굳힌 채 눈치를 주자 다폴샤는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 낌새를 봤을 때 다폴샤가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비를 맞은 채 왕궁 내부를 서성인 적이 없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기 위해 다폴샤에게 물었다.
“괜찮으니 계속 말해봐. 내가 비를 맞은 채 복도에서 또 뭘 했지?”
“제가 말을 걸어도 공작님께서는 처음에 대답하지 않으셨어요. 그러다가…….”
다폴샤는 여전히 내가 왜 모르는 척 구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동시에 자기가 묻고 넘어가야 하는 일을 괜히 들춘 게 아닌가 불안해하는 시선으로 말을 이었다.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뭐냐고 물으셨어요.”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잘못 이해한 것 같았기에 다시 물었다.
“자네의 이름을 물어봤다는 의미지?”
“아니요. 공작님 본인의 이름을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답했더니 그냥 지나가셨습니다…….”
나는 다폴샤의 증언에 대해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일단 다폴샤가 봤다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요즘 정신을 빼놓고 산 것은 맞지만, 병적인 수준으로 이상한 짓을 하는 상태는 아니었다.
‘게다가 젖은 옷도 없었고 말이지.’
그렇다면 내 모습으로 분장한 사람이 돌아다닌 것일 확률이 높았다.
변장이 성공적인지 확인하기 위해 다폴샤에게 이름을 물은 것이리라.
“내 생각에는 누군가가 나로 위장하고 왕궁에 숨어든 것 같군.”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목적은 나를 암살하거나, 그게 아니라도 국왕파의 핵심 인물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었겠지.
프로셴이나 미나엘을 노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새벽에 숨어들어왔는데 지금까지 희생자가 없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지 않나?’
의문스러운 요소가 있긴 하지만 지금은 빠른 조치가 더 중요하다.
서둘러 성을 봉쇄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날 때, 틸리타가 나를 멈춰 세웠다.
“공작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지?”
“제 딸은 저에게 분장을 알아보는 것에 대해서 철저히 교육을 받은 아이입니다. 그 방면에 대해서는 저보다도 뛰어나다고 확신합니다.”
“…….”
“가령 공작님께서 잠입하셨을 때 검은 머리칼로 염색한 것까지도 눈치챘던 아이입니다. 염색하지 않은 검은 모발과의 차이 때문이었죠. 그 탓에 저는 공작님이 잠입한 첫날부터 이미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염색약이 전부 빠져 붉은빛으로 돌아온 나의 머리칼을 무심코 만졌다.
틸리타가 사교 클럽의 지하실에 숨어든 이들이 나와 미나엘이라는 것을 그런 이유로 알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얼굴에 다른 이목구비를 올리기 위한 분장을 했다면 그런 것쯤은 단번에 간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까지 들었을 때는 비틀린 기분을 숨길 수 없었다.
아무리 틸리타가 나와 인연이 깊은 사이라지만 그 말을 순순히 곱게 들을 수 없었다.
“그 말은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서 새벽에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의미인가?”
“죄송하지만 그런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틸리타의 냉정한 녹색 눈이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얼굴에 서린 긴장감을 읽어 냈다.
틸리타는 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내가 귀족이고, 그녀는 평민이기에.
‘그런데도 내게 그런 말을 한 것은 진심으로 그 가능성을 의심한다는 것이지.’
결국 자리에 다시 앉았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찌푸렸던 인상을 풀려고 노력했다.
“…….”
긴장 어린 분위기가 방 안을 채웠다.
나는 내게 씌워진 오해, 혹은 진실일지도 모르는 일을 해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다폴샤.”
“예? 네, 공작님.”
“내가 무슨 옷을 입고 있었지?”
만약 내가 정말로 밤중에 흠뻑 젖은 옷을 입고 성안을 배회했다면, 성안 어디에선가 그 옷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내 방에는 그런 옷이 없으니까.
내 물음에 다폴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너무 인상적인 의상이었다는 듯이.
“흰 드레스였습니다. 레이스가 많지만 전체적으로는 수수한 형태였죠.”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말을 들은 틸리타의 무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내게는 묘사만 들어도 떠오르는 의상이 있었다.
내 얼굴을 하고서 그런 옷을 입었다면…… 그건 절대로 귀족파에서 보낸 사람일 수가 없었다.
또한 내가 입었을 리도 없었다.
이번 생의 세르베인 녹시렐로 살면서 그런 의상은 구비 해둔 적도 없으니까.
드르륵!
“공작님?”
뒤에서 나를 부르는 틸리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곧장 멜이 있는 층으로 향했다.
“정말 매일 청소했는데 왜 이렇게…… 헉, 공작님!”
그 층에는 열심히 복도를 청소 중이던 사용인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이 나누던 대화를 들었다.
‘분명 청소를 했는데도 매일 복도가 어지럽혀졌다는 의미였어.’
사용인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안절부절못했다.
청소를 그동안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타박받을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잠시 자리를 비워줘.”
“예, 공작님. 저…… 죄송합니다. 그동안 복도가 더러웠던 건-.”
“그대들의 탓이 아니라는 걸 알아. 나야말로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탓해 미안하군.”
빠르게 대꾸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사용인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리를 벗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절그럭.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아직 미처 청소하지 못한 위치에 가니 또다시 어떤 것이 밟히기 시작했다.
또한 프로셴이 말한 대로, 복도의 물기가 미처 마르지 않아 젖은 곳도 드문드문 보였다.
“…….”
나는 무릎을 굽혀 바닥을 유심히 바라봤다.
바닥을 손가락으로 쓸어 본 뒤 눈앞에 가져와 유심히 관찰했다.
까끌한 흰 가루가 묻어났다.
그걸 봤을 때 순간 떠오른 가설이 있었다.
그래서 비위생적인 걸 알지만 손가락을 입 안에 가져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퉤.”
입 안에 머금었던 물질을 곧장 뱉어냈다.
한동안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소금이야.”
비가 아니라 바닷물이었다.
* * *
“이게 네 흔적일 수는 없어.”
멜이 저택에서 바닷물이 되어 사라질 뻔했던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그 핏물 섞인 바닷물은 멜이 완전한 인간도, 인어도 아니라는 것을 반증했다.
설령 멜이 이제는 완전한 인어가 되었다고 해도…… 그는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니 이 투명한 바닷물이 멜의 흔적은 아닐 테다.
‘바다가 널 찾으러 온 걸 거야.’
나는 곧장 멜의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멜. 문을 열어줘.”
차분히 문을 두드렸다.
내 감정적 동요를 숨기기 위해 부러 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목소리를 냈다.
“네 얼굴을 보며 할 말이 있어. 제발 문을 열어줘.”
불안하게도 안쪽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똑똑.
“멜? 왜 대답을 안 해?”
방문에 귀를 댔지만 아무런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사실 멜이 일부러 기척을 내주지 않으면 나는 눈치를 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