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 화 (84/132)

84 화

“……내일 또 올게.”

작게 중얼거렸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자는 건가.’

내가 죽은 줄 알고 나를 호수에 빠뜨린 뒤, 저택에 돌아가 내 방에서 웅크린 채 잠들어 있던 때처럼.

“차라리 네가 행복한 꿈을 꾸고 있으면 좋겠어. ……그리고 잊기를 바라.”

멜이 내게 과거를 잊어버리자고, 그러면 안 되냐고 말했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사과할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당장 본인이 괴로워서 꺼내는 이기심 따위가 아니었다.

“네가 괴롭지 않았으면 좋겠어.”

멜이 잊자고 말했던 것은, 그 스스로 느끼는 죄책감보다도 내가 과거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원치 않아서임을 알게 되었다.

솨아아-.

열린 창문을 통해 불어온 바람이 꽤 따뜻했다.

멜이 가져왔던 꽃들이 의미했듯, 겨울이 끝나버렸다는 징조였다.

문득 예전의 일이 떠올랐다.

“……눈 속에 꽃이 피었다고, 신기해하면서도 꺾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던 너를 기억해.”

멜이 내게 가져온 꽃들은 이미 시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 방의 화병에 꽂혀 있었다.

그 꽃들을 볼 때면 멜이 꽃다발을 만드는 사랑스러운 모습이 상상되면서도 갑자기 괴로워졌다.

아름답게 피었기에 꺾을 수 있었던 꽃과 초라하고 약했기에 보호해야 했던 꽃.

멜이 내게 보인 애정의 이유가 내가 약하고 불쌍했기 때문일까 봐 두려웠다.

* * *

한밤중, 모두가 잠든 어두운 복도에 인영이 어른거렸다.

바닥에는 젖은 드레스가 남긴 자국이 융단처럼 이어져 있었다.

똑똑.

흰 드레스를 입은 여자, 세르베인이 문을 두드렸다.

멜의 방문이었다.

“멜. 문을 열어줘.”

벌써 몇 번째였다.

멜은 밤마다 그 가녀리게 애원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

그럴 때마다 멜은 곧바로 문을 열어주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휩싸여 문 앞을 서성이곤 했다.

지금도 그랬다.

‘왜냐하면 네가 내게 부탁을 하는 건 정말 드문 일이니까. 또…… 내게 매달리는 것 역시…… 굉장히 드문 일이니까.’

문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애처롭고 나약했다.

이전에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음성이었기에 더욱 마음이 흔들렸다.

“멜……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잖아. 네가 문을 열어주지 않으니 너무 괴로워…….”

요 근래 세르베인은 참 달콤하고 연약한 말들을 했다.

그게 낯설었지만 듣기에 기분은 좋았다.

물론 또 거짓이겠지만 당장에 설탕 발린 말들이 듣기에는 좋지 않은가.

멜은 조용히 방문에 기대어 그 목소리를 들었다.

조곤조곤하게 이어지는 속삭임들을 계속 듣고 있으니 조금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멜. 우리 언제 바다로 갈까?”

“!”

하지만 그 한마디에 평온함은 불에 덴 것처럼 깨져버렸다.

멜은 문에 기댄 채 앉아 있다 벌떡 일어섰다.

‘안 들어. 안 들을 거야. 거 봐. 이전의 말들은 다 거짓말들이야. 결국 나를 바다로 보내려는 속셈이었잖아.’

고개를 흔들던 멜은 바삐 귀를 막았다.

이 방에서 쭉 그래왔듯, 침대 속으로 들어가 이불 안에 파묻혀 시간을 보낼 작정이었다.

그런데 침대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세르베인이 다급히 외쳤다.

“가지마!”

멈칫.

“내가…… 너무 다급했지? 바다로는 천천히 가자…… 나는 그냥 너랑 바다를 보고 싶어서 그런 거야…… 다른 의도는 없어.”

걸음을 멈추자마자 세르베인이 어르듯이 자신을 달래왔다.

절절매며 제가 문에서 조금이라도 더 멀어질까 전전긍긍하는 음성이었다.

멜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어느새 그 고운 얼굴에는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제 앞에 들이 밀어지는 고기가 미끼라는 걸 간파한 포식자처럼, 멜은 죽은 눈으로 방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걸음걸이였다.

“멜……? 잘 생각했어. 어서 문을 열어줘,”

마침내 멜은 방문 앞에 도착했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문 너머의 존재는 말을 멈추었다. 오로지 침묵만 존재했다.

스올이 숨죽인 채 희생자를 기다리는 것처럼.

금방이라도 열린 문틈 사이로 올가미를 뻗쳐올 것처럼.

멜은 다정하게 문을 쓰다듬을 것처럼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손이 닿기 직전, 주먹을 쥐어 문을 세게 내리쳤다.

콰앙!!!

힘을 조절한 탓에 문이 부서지진 않았다.

하지만 방 안의 모든 창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충격이었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사용인들이 놀라 다가올지도 몰랐다.

바깥에서 걸쩍거리는 인간들을 혐오하던 멜이지만, 지금만큼은 그들이 오길 바랐다.

스스로 정신을 차리기 위해.

‘환청이야.’

커다란 소음에 정신을 차린 까닭일까.

더 이상 그 교활한 속삭임이 들리지 않았다.

이로써 분명해졌다.

그 모든 속삭임은 정말로 환청이었다.

이전에 바다 앞에서 본 세르베인의 환상처럼, 불완전한 정신이 만들어 낸 허상이었다.

“결국 너는 오지 않았구나.”

가만히 문 앞에 서 있던 멜의 몸이 조금씩 흔들렸다.

흰 셔츠에 감긴 긴 팔이 춤을 추듯, 혹은 경련하듯 떨리는 모습은 달빛 아래에서 스산하게 보였다.

이내 그는 낮게 끓어오르듯이 웃기 시작했다.

“흐…… 하하하!”

오열하는 기분으로 웃었다.

전부 또 제 환청이었다.

세르베인은 기척에 둔감했다.

뭐, 인간치고는 꽤 예민한 편이었지만 결국 제 기척은 알아챌 수가 없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모든 감각이 무디니까.

저택에서 세르베인은 제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 때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계속 놀라곤 했다.

멜은 실실 웃으며 중얼거렸다.

“사실 그럴 필요 없었는데. 나는 늘 네 문 앞에 서 있었거든.”

문 앞뿐일까.

자신은 언제나 세르베인을 지켜보고, 기척을 듣고 있었다.

그때가 좋았다. 그녀가 온전히 제 통제 속에 있을 때가 좋았다.

그 저택에 단둘이 있었던 때가 가장 완벽했다.

“……그러니까 이건 다 내 착각이야.”

희열에 차 있던 목소리가 갑자기 우울해졌다.

그런 세르베인이 제가 문에 붙어 있었는지, 문에서 멀어지는지, 걸음을 멈췄는지 알 리 없었다.

상상 속의 세르베인이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세르베인…….”

멜은 제 손에 얼굴을 묻으며 오열했다.

세르베인이 저를 무서워했다.

제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앞에서 멜은 그런 일 따위 없을 거라고 확실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건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 했던 짓이라고, 이제는 그럴 일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이상하다는 걸 아는데 네 곁에 있을 수는 없는 거잖아.”

이렇게 시시때때로 환각과 환청을 겪는데 무슨 자신감으로 네 곁에 있을 수 있겠어.

너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이 방을 나가서는 안 돼.

그날 밤, 천둥 번개와 폭우가 창밖 풍경을 메웠다.

* * *

“물 범벅이더라고. 알아?”

나는 프로셴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가 왜 당연한 말을 꺼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면 간밤에 비가 그렇게 왔는데 당연히 바깥에 물이 많지 않겠어?”

“아니…… 그게 아니라…….”

“수재 피해가 크지 않아야 할 텐데.”

나는 혀를 차며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틸리타를 만나서 할 말이 있었다. 그래서 가뜩이나 바쁜데 프로셴이 따라오며 계속 말을 붙여왔다.

“바깥이 아니라 왕궁 안이 말이야. 복도가 온통 물 범벅이었어.”

“사용인들 신발에 젖은 것이겠지.”

“신발 정도가 아니었는데…….”

프로셴은 계속 뭔가가 걸린다는 듯이 불편한 티를 냈다.

나는 그에게 가서 일이나 하라고 대꾸하려다가, 말을 바꾸었다.

“프로셴. 시종에게 성 관리에 신경 좀 쓰라고 전해줘. 그에게 말해두면 사용인들에게 전해지겠지.”

“왜? 불편한 일이라도 있었어?”

“……멜의 방이 있는 복도가 더러워서.”

숨기려던 사실을 어쩔 수 없이 밝히고야 말았다.

내 대답에 프로셴은 잠시 굳은 얼굴을 하다가, 어색한 웃음을 올렸다.

“아…… 역시 그 남자한테 가보고 있었구나.”

프로셴이나 미나엘이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멜을 자주 만나러 가지 않았었다.

그래서 아침에만 몰래 멜에게 방문하곤 했는데, 예상대로 프로셴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사실 네가 왕궁에 없던 동안에도 청소는 꾸준히 이뤄져서…… 뭔가 일이 있는 모양이야. 내가 알아볼게.”

프로셴은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이제 저 웃음이 정말 생각 없어서 떠오르는 게 아니라 꾸며낸 것임을 알았다.

그 꾸며낸 웃음을 보니 뒤늦게 떠오른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멜이 방에 들어오는 탓에 듣지 못한 말이 있었어.’

이전에 본적 없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프로셴은 내게 무언가를 고백하려 했었다.

뒤늦게 그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이냐고 물으려 했지만, 프로셴의 인사가 더 빨랐다.

“나는 이만 가볼게.”

그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보다 빠른 걸음걸이였다.

나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 역시 내가 갈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지금 그를 붙잡고 물어봤자, 그때 그가 말하려고 했던 진짜 내용은 듣지 못하리라는 직감이 들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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