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화
그 반응에 프로셴은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을 보던 미나엘은 본인이 꽤 날카롭게 반응했단 걸 자각했는지 작게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
“제 의지대로 귀족파에 선 건 아닌 것 같아서 그랬다. 귀족파가 약물을 사용해 남자를 가둬 놓고 사육하듯 데리고 있었지.”
“…….”
“그렇다면 귀족파를 싫어할 텐데 데리고 있는 편이 조금 더 이득이지 않겠나? 뭔가 아는 게 있을 수도 있고.”
꽤 합리적인 발언이었기에 프로셴은 조용했다.
우리의 발소리만 들리는 복도에서, 나는 그동안 정신이 없어 미처 보고하지 않았던 일을 기억해 냈다.
“나도 할 말이 있는데, 그곳에서 가테 백작의 아들을 발견했어.”
“어?”
“내 신상이 퍼진 것도 그 남자가 한 짓이었지. 아마 네 곁에서 기사로 일하며 정보를 얻은 것 같아.”
“……가테 백작가가 장남의 장례를 치르고 있다는 말은 들리지 않던데?”
그걸 살려뒀냐는 의미였다.
나는 딱히 수확을 얻었다던가, 혹은 알테슈메그 가테의 배신에 대해 분노하는 기색도 없이 사무적으로 말했다.
“대신 그곳에서 작당하던 귀족파의 명단을 받기로 했어. 아니면 가테 백작가를 치겠다고 했거든. 순순히 다시 이쪽에 와서 붙겠다고 하더군. 또 뒤통수를 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미 내가 그 살롱에서 봤던 귀족가의 자제들의 얼굴은 기억하고 있었다.
알테슈메그가 준 명단에 빠진 이가 있다면 곧장 처형당하는 건 가테 백작가가 될 것이다.
“……나도 같이 가.”
프로셴은 그동안 헤론시에게 가지 않겠다고 주장을 하던 게 그저 튕기는 것이었다는 마냥, 우리와 함께 헤론시를 보러 갔다.
그의 거처는 왕성의 가장 구석진 곳에 있었다.
벌컥!
여전히 헤론시를 마땅치 않게 여기는 걸 드러내며 프로셴이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상당히 초라한 방 안이 보였다.
청소는 해왔지만, 오래도록 신경을 쓰지 않아 아주 낡고 오래된 가구들이 보였다.
“아…….”
그리고 낡은 가구처럼 존재감 없이 침대 위에 있는 남자가 보였다.
그는 몸을 일으켜 앉은 채 한참을 가만히 있었는지, 우리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도 미동 없이 앉아 있었다.
곧 흩어질 존재감처럼 희미한 백금발.
조용한 어두운 자색 눈동자.
그의 생김새처럼 조용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왕국의 가장 귀한 분을 뵙습니다.”
헤론시가 곧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같은 왕족끼리 나누는 것이라고 볼 수 없을 비참한 인사였지만, 자기 객관화가 된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바닥을 짚고 있는 남자의 팔은 미세하게 떨렸다.
프로셴은 그 인사에 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냉담히 헤론시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다행히 제 분수는 아는 것 같군.”
헤론시는 그런 대접을 예상했다는 듯, 더욱 고개를 숙였다.
왕족끼리 혈육의 정을 바랄 수 없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었다.
나는 프로셴이 몇 번 더 독설을 내뱉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는 애초에 헤론시의 존재를 못마땅해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꽤 상식적인 질문을 했다.
“귀족들이 약을 써서 무력화시켰다고 들었는데, 맞나?”
“……예.”
“이상하네. 네가 왕족이면 약물에 당할 확률이 희박한데.”
“태어났을 때부터 몸이 약했습니다. 그 탓에 그런 것 같습니다.”
프로셴은 그 말에 ‘저런’ 이라던가 ‘딱하네’ 같은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사실 이전부터 하나였다.
“왕위에 관심 있어?”
너무 뻔한 질문이었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면 누구라도 저 말에 부정할 것이다.
나는 별 의미 없는 질문이라 생각하면서도 헤론시의 답을 기다렸다.
그는 연약한 목소리였지만 꽤 강하게 의지를 표현했다.
“저는…… 매일 살아가는 것만이 목적이었습니다. 명예를 되찾은 폐하께서 보시기에는 제가 긍지도, 의지도, 자존심도 없는 비루한 존재로 느껴지시겠지만요.”
그 문장만으로 헤론시가 꽤 험한 삶을 살았음을 예측할 수 있었다.
나 역시 똑같이 멸망한 가문의 후예로 살아가며 그 삶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알고 있지 않은가.
“딱히 그렇진 않아. 나도 거창한 능력으로 이 자리에 앉은 건 아니라.”
“…….”
“아무튼 앞으로도 없는 사람처럼 살아 주기를 기대하지.”
프로셴은 이내 관심이 사라졌다는 듯 뒤돌아 자리를 비웠다.
곧 사라질 목숨이라며 조롱하던 사람이 남기기에는 꽤 유약한 말이었다.
달칵
문이 닫히고 정적이 맴돌았다.
프로셴이 자리를 비웠음에도 헤론시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라.”
안타깝지만 나는 프로셴처럼 유약하게 나갈 생각이 없었다.
살만해지면 생각이 변하는 게 인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귀족들에게 붙잡혀 억지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유폐되었을 때는 그곳에서 나가는 것만이 목적이었겠지.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헤론시가 이제 제법 건강을 회복한 이상, 나는 더 베풀 호의가 없었다.
뚜벅.
나는 헤론시의 앞으로 걸어갔다.
헤론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얼핏 내 뒤에 서 있던 미나엘을 발견했을 때는 그 어두운 자색 눈동자에 약간의 안도와 아는 이를 만났을 때 특유의 반가움이 어렸다.
“저…….”
그는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함인지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나는 그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시간을 낸 게 아니었다.
“몸도 약한 듯한데 고문을 견디긴 힘들겠지.”
나의 단조로운 목소리에 헤론시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는 착각해서는 안 됐다.
프로셴이 뜻밖에 자비를 베푼 것이지, 그가 목숨을 유지하고 안락한 처우까지 받을 수 있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억울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패자의 입장이다.
나는 무감각하게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러니 묻기 전에 알아서 고백하길 기대하지.”
터억!
두꺼운 책이 바닥에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내었다.
“그 책을 다 채워야 할 거야. 잉크와 펜은 사용인을 통해 받도록.”
“그런 목적으로 가져온 것이었나.”
미나엘이 이제야 이해한다는 듯 짧게 혀를 찼다.
미나엘은 내가 그 두껍기만 하고 아무런 글자도 적혀있지 않은 책을 들고 왔을 때부터 줄곧 의문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미나엘에게 능청을 떨 듯 어깨를 으쓱인 후 다시 헤론시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 떠오를 모멸감을 예상하고서 한 행동이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모멸감도, 오기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마땅히 보리라 예측했던 결과가 빗나가는 건 꽤 기묘한 느낌이었다.
헤론시는 나의 신분을 몰랐다.
그렇기에 왕과 혈연으로 이어진 본인에게 이런 식으로 구는 낯선 여자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책을 제 품에 안았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건 프로셴과 다른 환경에서 자란 탓에, 프로셴과 다른 방식으로 터득한 처신의 방법이리라.
나는 짧은 시각 그의 얼굴을 관찰했다.
그 잔잔한 얼굴에는 감정의 동요가 보이지 않았다.
미나엘의 평소 모습이 차가운 이성으로 감정을 억누른 모습이라면, 헤론시의 것은 같은 무표정이지만 결이 달랐다.
그의 얼굴에는 이 상황에서 말이 될 수 없는, 안정감이 존재했다.
‘잘 협조하는 한 죽을 일은 없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건가.’
그게 사실이라면 심각하게 안일한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그것도 꽤 대단한 능력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알테슈메그 가테. 그자에 대해 특히 자세하게 써라.”
* * *
멜이 칩거한 뒤, 나의 일상은 단순해졌다.
나는 그다지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았다.
기계적으로 업무를 처리하긴 했지만, 떠맡겨진 숙제를 억지로 해내는 학생처럼 그 일들을 열정 없이 해냈다.
내가 나름대로 생각이란 걸 할 때는 매일 아침, 멜의 방문 앞에 서서 그의 방 문고리를 돌려볼 때뿐이었다.
뚜벅뚜벅.
오늘도 그렇게 일과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다 나는 멜의 방이 존재하는 층의 복도가 꽤 지저분하다는 걸 발견했다.
잘그락.
‘되도록 오지 말라고 했더니 이쪽은 청소하러 오지도 않은 건가.’
나는 못마땅함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일 처리가 지나치게 엉망이었다.
깨끗해야 할 복도 위에 모래 알갱이보다 작은 이물질들이 꽤 있었다.
걸을 때마다 구두에 미세하게 무언가가 밟히는 느낌이 불쾌했다.
‘청소는 꾸준히 하라고 주의를 줘야겠어.’
복도는 며칠만 방치해도 눈에 띄게 더러워졌다.
그렇다면 방은 더 심하겠지.
멜의 방도 청소가 필요할 터였다.
물론 그는 저택에 홀로 있을 때도 깔끔하게 지냈으니 괜찮을 것 같기도 하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너는 언제쯤 내게 다시 얼굴을 보여줄까.’
마침내 그의 방문 앞에 도착했다.
나는 숨 쉬는 것조차 멈추고 문고리 위에 손을 올렸다.
끼익…… 턱.
문고리는 늘 그러했듯 처음에는 잘 돌아가는 것 같다가 얼마 가지 않아 잠금장치에 턱, 걸려버렸다.
그 작은 소음이 내 신경을 곤두세우게 했다.
“…….”
몇 번 입을 벙긋거려봤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미안하다고, 널 두려워한 적 없다고, 네가 나를 죽일 것이라고 생각한 건 실수였다고 말하면 되는데 그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목소리로 표현하면, 분명 거짓인 걸 들킬 테니까.’
미세한 떨림을 멜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그의 앞에서 거짓을 숨을 쉬듯 내뱉었던 과거가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무심코 내뱉은 거짓말들의 결과가 얼마나 파멸적이었던가.
그것을 목격한 이후, 나는 적어도 멜에게는 태연하게 거짓을 꾸며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