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 화 (82/132)

82 화

덥썩!

멜은 갑자기 내 손목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내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바로 뒤돌아 걸었다.

그는 나를 일으키기 위해 힘을 줬지만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는 저항할 의도가 없었으니까.

순순히 그의 손길보다도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

순간적으로 멜이 놀라 뒤를 돌아봤다.

내가 너무 쉽게 일어서자, 스스로가 힘 조절을 잘못해 나를 너무 세게 당긴 것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

뚜벅뚜벅

하지만 내가 휘청이거나, 다친 기색이 없자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이 상황에서 익숙함을 느꼈다.

벌컥!

멜은 문을 거세게 열어젖혔다.

나를 압박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저 힘을 조절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초조하게 걸음을 옮겼고, 나는 뒤따라가면서도 복도에 사람이 없는 것에 안심했다.

하지만 이 근방을 벗어난다면 어찌 될지 몰랐다.

타다닥.

멜은 나를 데리고 계속 계단을 내려갔다.

한 층을 내려올 때까지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한 층을 더 내려갔다. 이번에도 다행히 마주치지 않았다.

‘어디서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을지 몰라.’

하지만 이런 행운이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프로셴은 내 부탁이 있으니 당장 내 방 앞에 사람은 두지 못했지만, 어딘가에는 인력을 배치해뒀을 것 같았다.

우리는 이제 복도에 들어섰다.

나는 무작정 걸음을 옮기는 듯한 멜을 진정시키기 위해 걸음을 멈췄다.

“멜.”

“……세르베인. 갑자기 멈추면 다칠 수도 있어. 그냥 따라와.”

그는 나를 바라보지 않고 앞만 본 채 싸늘히 답했다.

하지만 내가 혹시라도 넘어질까, 먼저 걸음을 옮기지도 못했다.

나는 그의 익숙한 뒷모습을 보다가 잠잠히 말했다.

“너를 따라가지 않으려는 의도는 아니었어. 그런데 여기는 장소가 좋지 않아.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 아마 발견되는 것도 빠르겠지.”

“……뭐?”

“네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여기서 내 시체가 발견된다면 바다까지 가는 게 힘들어질 거야.”

“!”

기함하는 표정을 지은 채 멜이 다급히 나를 돌아봤다.

그는 내 손목을 잡고 있던 것도 놓쳐버렸다.

내가 봐온 모습들을 통틀어 그는 가장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 방금…… 뭐…… 뭐라고…… 말했어……?”

멜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사실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전신이 간헐적으로 떨렸고, 순식간에 식은땀이 그의 옷을 적셨다.

“무슨 말을 했냐고 묻잖아!”

멜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 상황이 상당히 곤란했다. 그가 이럴수록 우리를 발견하는 사람들은 더욱 많아질 것 아닌가.

아무리 나라고 해도 내 죽음을 내 입으로 올리기에는 쉽지 않은데.

나는 쓰게 웃다가 멜을 진정시키기 위해 다시 한번 말했다.

“우리 같이 바다로 가자. 나랑 같이 왕성을 벗어나면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을 거야.”

“세르베인!!”

“이 근처에 왕실 소유의 해변이 있어. 거기에는 보는 눈이 없으니 괜찮을 거야.”

“조용히 해! 그만 말하란 말이야!!”

하지만 내가 말을 계속할수록 그는 더욱 괴로워했다.

나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기에 어떻게 말을 해야 그를 진정시킬 수 있을지 고민했다.

멜은 잠깐 틈이 생긴 순간, 내 입을 막기 위함인지 손을 뻗었다. 나는 무심코 흠칫 떨고 말았다.

“……아.”

멜이 손을 뻗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멜의 푸른 눈에는 충격과 슬픔이 깎여 내려간 절벽처럼 홍채마다 자리했다.

그는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나는 그 침묵과 그 눈동자가 두려웠다.

정말로 멜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의 눈을 보고 그에게 휘둘려버릴 나의 아둔함이 두려웠다.

나는 시선을 피하고 말을 이었다.

“거기서 네가 바라는 대로 해, 멜.”

“…….”

멜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 정도는 예상한 반응이었다.

그의 손에 내 목숨을 쥐여주면 아무래도 처음에는 조금 당황스러울 것이다.

‘널 위해 내린 선택이긴 하지만 내 이기심으로 내린 결정이기도 해.’

멜이 증오를 애정으로 착각하지 않기를.

그가 나를 증오해 인간이 되었다면, 내 죽음으로 다시 인어가 될 수 있기를.

또한, 그가 없으면 생을 유지하지 못할 나를 위해 그가 나를 직접 거두어 가기를.

완전히 바닥으로 내리깐 시야라도, 위쪽에서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형체가 있었다.

내 앞에 선 멜의 손이었다.

‘이제 나는 물속에 들어가도 죽지 않을 테니 그의 손을 빌려야겠지.’

나는 눈을 감았다.

보이지 않아도 내 앞에 다가오던 손이 잠시 멈추었다는 걸 공기의 흐름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나는 그의 손이 내 목에 닿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멜은 내 뺨을 조심스레…… 이전에 그가 나를 대했던 어떤 손길보다도 연약하게 쓰다듬었다.

사락.

“……세르베인. 울지마.”

나는 울지 않았다.

정작 눈물을 흘렸던 건 당신 아니던가.

그래서 그 다정한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눈을 뜰 수도 없었다.

눈을 뜨면 그의 말처럼 울어 버릴 것 같았다.

“내가…… 너를 가장 괴롭게 하는 것 같네…… 여태껏 너를 힘들게 했던 무엇보다도.”

울음을 참는 목소리가 고통스럽게 심장을 찔러왔다.

나는 눈을 떠서 그를 보려고 했지만, 이제는 멜이 내 눈 위를 덮으며 저를 보지 못하게 했다.

“보지 마, 세르베인. 너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멜?”

“너는 나를 보면 괴로워하잖아.”

자조하는 낮은 웃음과 함께 멜은 나를 끌어안았다.

가벼운 포옹이었다. 너무 짧아서 아쉬움이 더 큰 접촉이었다.

“눈 감고 있어.”

멜이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나는 눈을 뜰 수 없었다.

그 순간에도 계속해서 멜이 걸어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나, 가볼게.”

그 말에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줄곧 그에게 종용하던 것인데도.

‘너는 내 목숨을 취하지도 않고 바다로 돌아가려는 것일까?’

나는 다급히 눈을 떴다.

그런데 앞서 들려온 발소리는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 아니었다.

고작 몇 발자국 만에, 그는 자신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달칵

아주 짧은 순간 스친 멜의 뒷모습과 닫히는 방문이 보였다.

나는 잠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결국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털썩!

“……으.”

터업!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혹여나 내가 절규하는 소리를 멜이 들을까 봐 소리를 내어서는 안 됐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멜은 나를 죽이려는 의도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방으로 나를 데리고 갈 생각이 다였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내가 떠올린 것이 무엇인지 멜이 알게 되었다.

절대로 바라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이제 멜이 아니라, 내가 되어버렸다.

* * *

나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일들은 흘러갔다.

몰래 열어 보려 했지만 잠겨 있던 문고리처럼, 멜은 내게 열어뒀던 모든 소통을 걸어 잠갔다.

그런데 바다로는 가지 않았다.

내심 그것에 기뻐하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프로셴, 그 남자의 처우에 관한 결정은 네게 맡기지.”

다음 날, 미나엘과 프로셴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다.

듣는 귀와 보는 눈이 많은 이 성에서 그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를 리 없었다.

단지 나를 위해 모르는 척하는 것이지.

“사실 그 말이 좀 이상해. 애초에 나는 너희가 그 남자를 생포해 온 이유를 모르겠어.”

그런 배려심과는 별개로, 어긋난 의견으로 인한 긴장감은 있었다.

프로셴의 자안에는 짜증이 어려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귀족들이랑 작당하고 왕위를 노리는 자를 살려 둘 것 같아? 혹시 내게 혈육으로서의 정이 있을까 걱정한 거야?”

프로셴이 이토록 강경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

평소라면 제 뜻과 맞지 않아도 이렇게나 날카롭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그 역시 나처럼 정신적으로 무언가에 매달린 듯했다.

침음성을 흘릴 때, 시종이 노크했다.

“폐하. 감시를 명령하셨던 대상이 깨어났습니다.”

헤론시가 깨어났다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그 소식을 들은 프로셴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나는 관심 없어. 어차피 이슬처럼 사라질 목숨을 보러 갈 필요가 있나?”

“그리 해.”

나는 무심히 답했다.

왜냐하면 프로셴을 설득하거나, 헤론시라는 남자를 그렇게나 지켜야 할 의무는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이 모든 일들이 어제부터 조금 무감각해졌다.

하지만 마지막 책임감을 발휘해 덧붙였다.

“그래도 우리는 확인할 것들이 있으니 헤론시를 보러 가야겠어.”

계속 헤론시를 ‘왕의 혈족’, ‘그 인간’, ‘그 남자’라고만 부를 수는 없기에 그리 말했을 뿐이었다.

나는 두꺼운 책을 하나 들고서 미나엘과 함께 집무실을 나왔다.

그러자 프로셴이 다급히 우리를 쫓아 집무실 밖으로 나와 물었다.

“헤론시? 언제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밀해졌어? 친분 때문에 생포해서 데리고 온 거야?”

프로셴의 반응을 보던 미나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상당히 지체된 업무와 어긋난 의견 때문인지 우리 셋은 전부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어차피 죽일 거 그게 상관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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