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 화 (81/132)

81 화

멜은 품속에 여러 송이의 꽃들을 안고 있었다.

녹시렐 영지와는 달리 수도는 사시사철 온화한 편이었기에 겨울이 있는 듯 없는 듯 스쳐 갔다.

덕분에 멜은 어디에선가 꽃을 꺾어올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비록 내 눈길이 닿자마자 맥없이 떨궜지만.

투욱.

“……왜 그러고 있어?”

멜이 울 것 같은 얼굴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물을 머금은 꽃처럼 처연한 빛이었다.

오해하게 만들어버렸다.

나는 서둘러 프로셴에게 기댄 몸을 똑바로 했지만, 그 모습에 멜은 오히려 확신한 것처럼 보였다.

그가 숨 가쁘게 물었다.

“바빠서 나를 보러 오지 않았던 것뿐이잖아. 그런데 왜 저 남자랑 그렇게 다정하게 있어? 혹시 그동안 바쁘다는 것도 거짓이었어? 내겐 편지도 쓰지 않았으면서 저 남자와는 계속 연락하고 지냈어?”

아니었다고 해명을 해야 한다.

다급히 입을 열어 해명하려던 순간, 갑자기 이게 좋은 기회라고 머리가 속삭였다.

나는 그대로 멈춰 있던 입을 움직여 모진 말을 뱉었다.

“……내가 언제 너를 보러 가겠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나?”

그래. 좋은 기회다.

어차피 나는 멜이 내게 정을 떼게 할 계획이지 않았던가.

나는 프로셴이 했던 충고를 잊어버리기로 했다.

나는 도리어 내 마음이 부서지는 것을 느끼며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분명 말했어. 너를 보고 싶지 않다고.”

“그러지 마.”

멜이 다급히 내 말을 막았다.

그는 바닥에 흩어진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을 다 짓밟으며 다가왔다.

“내게 그러지 마. 나…… 아프단 말이야.”

멜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꽃무덤을 바라봤다.

그의 품에 안겨 생기가 넘치던 꽃들은 이제 죽은 꽃이 되어버렸다.

사실 꺾일 때 이미 끝이 정해진 것이리라.

결심이 섰다.

나는 프로셴에게 말했다.

“프로셴. 나가줘.”

“……나? 저 인어 말고 나 말이야?”

내 갑작스러운 말에 프로셴이 당황했다. 저가 잘못 들었거나, 내가 잘못 말했다고 확신하는 어투였다.

멜 역시 갑작스러운 나의 말에 걸음을 멈췄다.

나는 프로셴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시선을 맞췄다가는 속내를 들킬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무덤덤하게 목소리를 꾸며냈다.

“응. 너. 멜과 단둘이 있게 해줘. 그리고 너는 바쁘잖아. 이만 가 봐.”

“아니, 안 바빠. 세르베인, 네가 뭘 모르나 본데 인어가 저런 상태일 때면-.”

“괜찮으니까 나가봐.”

프로센은 계속 불안해하며 자리를 떠나질 못했다.

이전에 그는 멜이 위험하다는 자각도 없었는데, 내가 없는 동안 뭔가를 알게 된 모양이었다.

프로셴은 연신 입술을 깨물며 나와 멜을 번갈아 보더니 말했다.

“……그래. 둘이서 이야기 나눠. 차가 필요하면 말해.”

그는 사용인을 두겠다는 의미처럼 말했지만, 그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프로셴은 문밖에 무장한 기사들을 배치할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부 다 치워 줘.”

“세르베인!”

“……나가줄래? 세르베인이 나랑 단둘이 있고 싶다고 말하잖아.”

그때, 멜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웃고 있었다.

창백했던 뺨에는 다시 생기가 돌았고, 호수를 닮은 아름다운 눈동자는 기쁨이 충만해 보였다.

하지만 프로셴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조금의 빛도 들어 있지 않았다.

프로셴은 마지못해 자리를 비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방에서 나가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계속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해버렸다.

“세르베인. 역시 피곤해서 그랬던 거지?”

프로센이 비키자마자 멜은 단숨에 내 옆에 다가와 앉았다.

그는 언제 절망했냐는 듯,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한테 기대. 그동안 일하느라 많이 힘들었겠다. 혹시 아픈 곳이 있으면 이야기해 줘…….”

나를 위해서 하는 행동 같았지만 진짜 의도는 다른 것에 가까웠다.

그것은 명백히 프로셴과 내가 취했던 자세를 의식하는 행동이었다.

멜은 내 곁을 차지하자 이제야 조금 안정이 됐는지 목소리가 다시 부드러워졌다.

그는 검은색으로 염색한 내 머리칼이 신기한지 만지작거렸다.

“세르베인, 머리카락 색이 변했어. 신기해.”

“…….”

“……세르베인?”

문득 그의 증세가 심각해졌다는 걸 눈치챘다.

이번 생에서 멜을 저택에서 만났을 때, 그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내 이름을 부르곤 했다.

또 그는 내가 잠깐이라도 대답해주지 않거나,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표정이 사라졌다.

그건 마치 앞으로 살 나날들을 박탈당한 희생자들의 절망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 나…… 그동안 책도 많이 읽고 네가 바라는 대로 사람들도 만나지 않았어. 잘했지?”

나는 무심코 놀라 멜에게 ‘내가 언제 그런 걸 바랐어?’라고 물을 뻔했다.

하지만 멜은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고, 내가 다시 자신을 바라봐줬다는 것에 그저 말갛게 웃었다.

나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멜이 흠칫 몸을 움직였지만 내 행동을 강제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또 이야기를 이어가는 건 어려울 거야. 또 꿈이었다고 말하거나, 잊기 위해 쓰러지겠지.’

멜은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확실히 하는 것을 회피했다.

그건 스스로에게도 너무 괴롭기 때문이겠지.

‘나는 네가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를 육지에 묶어두길 바라지 않아.’

나는 쓰게 웃다가, 또 헛된 시도가 될지도 모르는 일을 했다.

“멜. 우리 이야기 좀 하자.”

“응……? 지금도 하고 있잖아.”

“……나는 네가 죄책감 때문에 내 곁에 있다는 걸 알아.”

또다시 멜이 회피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곧장 본론을 꺼냈다.

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이 상황을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느릿하게 물었다.

“……왜 그런…… 말을 해……?”

“저번에 말했지. 난 이제 전부 기억났어. 그리고 내가 죽은 후, 네가 무엇을 바라며 나를 호수에 빠뜨렸는지도 알아.”

“그냥 잊어버리면 안 돼?!”

멜이 뜻밖에 큰 소리를 냈다.

나는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한 번도 이랬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 귀를 틀어막고 싶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는 듯, 제 귓가에 손을 어정쩡하게 가져다 댄 채 괴로워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든가, 혹은 다른 이유를 대며 회피하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이번이 내가 그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임을 아는 눈치였다.

멜은 눈물을 흘리면서 억지로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보며 애원했다.

“세르베인. 나는 다, 전부 다 잊기로 했어.”

“…….”

“그 저택에서 나온 이후, 이제 새로운 출발인 거잖아. 그냥 이제 행복해지면 되는 거 아니야? 동화에서는 늘 그랬어.”

“…….”

“나도, 나도…….”

그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입만 벙긋거렸다.

하지만 목소리를 잃어버린 것처럼, 괴로운 신음 같은 소리만 흘렀다.

멜은 끝내 하려던 말을 삼켜버렸다.

“너를 탓하려는 게 아니야.”

나는 마음이 약해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래서 최대한 단호하게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건 내 귀로 듣기에도 너무 지친 나머지 모든 애정이 소멸한 듯한 음성이었다.

“오히려 네가 스스로 죄책감을 가질 이유가,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거야.”

“……무슨 의미야?”

멜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귓가에 가까이 가져갔던 손도 서서히 내렸다.

나는 프로셴에게 과거를 말해 주며, 그날의 일이 내게 괴로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멜에게 사과를 요구할 생각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사정이 있다는 걸 알았고 또……

“내겐 그 일들이 앞으로도 상처로 남아 있겠지. 하지만 네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 네가 늘 말했듯, 너는 꿈인 줄 알고 행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거든.”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네게 상처로 남아 있는데 왜 내가 사과를 할 필요가 없다는 거야?”

멜이 다급하게 내 말을 받아쳤다.

그의 얼굴은 서서히 울음기가 가시고 절박함과 초조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동시에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미약한 히스테리가 엉겨있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나는 차분하게 응수했다.

“그건 별개의 일이야. 내 감정이 왜 네게 중요하겠어.”

“나는, 네게, 무슨 의미냐고, 물었어. 어째서 네 감정이 내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

냉기가 뚝뚝 흘러내리는 음성이었다.

여태껏 내 곁에서 애처롭고 여린 모습만 보여 주던 것과는 달랐다.

그는 내가 이번 생에서 그를 처음 저택에서 만났을 때처럼 음울한 낯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멜의 그런 모습도 두렵지 않았다. 나는 덤덤히 말을 이었다.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잖아. 네가 나를 호수에 빠뜨린 이유는 복수였고, 내 시신을 호수에 빠뜨린 이유는 내가 약속을 지키길 원해서였잖아. 나는 이제 네 행동의 이유를 알아.”

“……아, 아니야. 세르베인. 믿어줘. 사실 난 그때의 기억이 흐릿해. 내가…… 나는……!”

나는 정말로 괜찮다는 듯, 멜을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변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나는 부디 그가 처음 바다에서 잡혀 와 내게 왔던 순간부터 줄곧 원해왔던 본래의 목표를 기억해 내길 바랐다.

“걱정하지 마, 멜. 널 원망하지 않아.”

“…….”

“나는 이제 널 바다로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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