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화
“……그냥 내가 죽은 후에 그를 데려가면 안 돼?”
바다에게 물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 바다에게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사실 바다와 대화한다는 것 자체가 남들이 보기에는 미친 짓이리라.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한참 동안 바다를 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다리가 아픈 줄도 몰랐다.
창틀을 너무 꽉 쥐고 있느라 손끝이 새파랗게 변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을 때가 되어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창틀을 쥐고 있던 손이 저려 왔다.
‘사용인인가?’
목욕물을 준비하겠다던 하녀들의 말을 떠올렸다.
나는 피곤함에 얼굴을 쓸어내리면서도 목소리만큼은 평소대로 내었다.
“들어와라.”
“……세르베인.”
우물쭈물 눈치를 보는 목소리만 들어도 프로셴이었다.
나는 얼굴을 매만지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 정리를 끝낸 후에 뒤돌아 그를 맞이했다.
“프로셴, 오랜만이야. 우리가 없는 동안 꽤 고생했지? 안 그래도 곧 찾으러 가려고 했어. 일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어지간히 궁금했나 봐. 네가 제 발로 찾아온 걸 보면 말이야.”
“어, 어…….”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 왕의 혈통을 찾았어. 그런데-.”
“있잖아, 세르베인. 할 말이 있어.”
프로셴이 내 말을 끊었다.
나는 그가 무엇 때문에 저렇게나 곤란한 얼굴을 하고서 내 방을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피곤할 건 알겠는데 인어를 만나러 가지 않을래? 그가 정신을 차렸어. 사실은 꽤 예전에 의식을 차렸는데 줄곧 너를 찾고 있었어.”
나는 아무 말도, 아무 표정도 없이 프로셴을 바라봤다.
프로셴은 당황하더니 이내 말을 줄줄 이어왔다.
“아, 물론 네가 알아서 올 거라는 거 알고는 있어! 그런데 웬만하면…… 괜찮다면 지금 잠깐이라도 만나러 가는 게 어떨까 싶어서.”
“안 가.”
“왜?”
나는 충동적으로 그 질문에 대답을 내놓았다.
“정을 떼야 하거든.”
“……왜?”
“……계속 ‘왜’라고만 묻는 이유가 뭐야.”
“시비 걸려는 건 아니었어. 그런데…… 그냥…… 어…… 도대체 왜?”
프로셴이 이해할 수 없다는 것과 동시에 충격적이라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내놓은 말은 이전과 똑같이 ‘왜’였다.
나는 슬슬 신경이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이유를 묻고 싶은 건데.”
“아니…… 넌 그 인어를 좋아하잖아. 그도 너를 좋아해. 그런데 왜 정을 떼려는 거야? 보내지 않는 게 낫지 않아?”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너는 내가 저번에 그를 바다로 보내겠다고 말했을 때 내심 좋아하지 않았어?”
나는 프로셴이 이제 와서 인어를 보내는 것에 우려를 표하는 모습이 이상했다.
가식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진심 같았기에 의아했다.
“…….”
프로셴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 스스로도 모순을 깨달았는지 아차, 하고 놀란 표정이었다.
나는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프로셴이 방금 꺼낸 말은 진심인 것 같았기에 순순히 답했다.
“……아무튼 멜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그가 그러는 건, 내게 죄책감을 느껴서라는 걸 잊으면 안 돼. 그러니까 정말로 멜을 위한다면 그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고, 바다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해.”
멜이 또다시 잘못된 선택을 하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하는 잘못된 선택이 설령 내게는 유혹적일지라도 흔들려서는 안 되었다.
이미 전적이 있지 않은가.
그때, 그 옛날에, 멜이 곧바로 바다로 돌아갔다면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가 나를 선택하면 분명 비극적인 일이 일어날 거야.”
나는 근거도 없이 확신했다.
아니지. 과거에 있었던 일들은 근거로 충분했다.
나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가 두려웠다.
“그러고 나서 멜은 또 후회하겠지. 그때야말로 나를 정말로 미워하겠지. 그때는 죄책감도 애정도 없이 나를 순수하게 미워만 할지도 몰라.”
그건 싫었다.
나를 미워하게 된 멜을 상상하는 것도 싫었지만, 여기서 더 망가지게 된 멜을 상상하는 건 더욱 끔찍했다.
그를 예전처럼 행복하게 만들 방법은 바다로 돌려보내는 것뿐이라고 확신했다.
“……너희 얼마 전에 만나지 않았어?”
프로셴의 말에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는 논리적으로 큰 오류가 있어 이해되지 않는 말을 들은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저택에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어? 무슨 비극적인 일이 있었기에 그래? 그 짧은 시간 동안 그 남자가 네게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죄책감을 느낀다는 거야?”
프로셴은 몰랐다. 사실 미나엘도 사건의 정확한 전말은 몰랐다.
나는 혼자서 이 일을 삼켜 버릴까 고민하다가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반쯤은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나를 죽였었거든.”
프로셴의 얼굴이 이전에 본 적 없이 굳었다.
* * *
전전생의 녹시렐 공작가 후계자로서 살았던 삶.
전생에 어느 평민 고아로 부정한 땅에서 살았던 삶.
미치광이 취급을 받을 걸 각오하고서 그 모든 삶에 대한 걸 입 밖에 꺼냈다.
말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 그랬다.
“……그래. 그랬구나.”
하지만 프로센은 내 말을 미친 사람의 헛소리로 취급하지 않았다.
긴 이야기인데도 끝까지 주의 깊게 경청했다.
마치 모든 말들을 기억하려는 것처럼.
그는 미나엘과 나의 오랜 인연에 대해 말했을 때는 오히려 납득한다는 기색까지 보였다.
“그래서 네가 미나엘을 구하자고 그랬구나. 그때 네가 왜 그랬는지 의아하긴 했어.”
사실 누군가에게 말하기 이전까지는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저 멜을 바다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또 더 이상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거짓말하기 위해, 그 모든 목적에 적합한 변명으로 그 사유를 들었었다.
‘왜냐하면 네가 나를 죽였잖아.’
멜에게 그 말을 하기 이전까지는 내게 그 기억이 상처로 남았다는 자각도 없었다.
그래서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네가 그걸로 원망을 풀 수 있었다면 오히려 내게는 잘된 일이 아니냐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걸 입 밖으로 말하고 나서야, 그건 절대 괜찮아질 수 없는 과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멜 역시 그러하겠지.
나는 그 모든 이야기를 끝낸 후 잠시 숨을 골랐다.
그동안에도 프로셴은 여전히 내게 어깨를 내어준 채 나를 지탱해주고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조용히 있다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내 말을 믿어?”
“하하, 내가 언제 네 말을 의심한 적 있었어?”
나를 위해 밝은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함인지 프로셴이 일부러 가볍게 대꾸했다.
하지만 속내까지는 꾸며낼 수 없었기에 잠시 후 그가 진지하게 물었다.
“네가 어떻게 하면 괜찮아질까?”
“…….”
“사실 내 생각에는 네가 그 인어를 바다로 보낸다고 괜찮아질 것 같지가 않아. 너도 그렇고, 인어도 그렇고.”
늘 프로셴은 철이 없고 어디가 나사 빠진 것처럼 굴어도 때때로 통찰력을 발휘할 때가 있었다.
그는 내 어깨를 끌어안으며 본인에게 기대어 있는 나와 눈을 맞췄다.
“그 인어, 네가 없을 때는 방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거든. 내 딴에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왕실 소유의 해변으로 가자고도 말해봤는데 안 나오더라.”
그런 일이 있는 줄은 몰랐다.
나는 숨이 막힐 듯한 죄책감을 느꼈다.
내가 그를 저택에서 처음 데리고 온 날, 시비가 붙어 내가 곤란해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때 검은 베일로 멜의 얼굴을 가리려고 했기 때문이었나?
그래서 강박적으로 사람들을 피한 건가?
내가 바다로 돌아가지 않겠냐고 물었기 때문에 혼자서는 바다로 가려고도 하지 않았던 걸까?
멜을 치료하기 위해 저택에서 데리고 나왔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그를 원래대로, 아름답고 천진했던 내 기억 속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을까.
몸이 떨려올 것 같아서 애써 힘을 줬다.
프로셴은 바로 내 곁에 붙어 있었기에 나의 미세한 떨림을 눈치챘다.
그는 쓰게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세르베인. 네 말이 맞아. 나는 처음에 네가 인어를 보낸다고 했을 때 내심 좋아했어.”
“…….”
“그런데 내가 이제 염려하는 이유는 너 때문이야. 네가 괜찮지 않을까 봐 걱정돼. 나는 그게 아주 중요하거든.”
이렇게나 가까이서 그의 자색 눈동자를 마주 본 적이 있던가?
프로셴은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숨을 고르듯, 단어를 고르며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그러는 까닭은 너를-”
끼이익……
프로셴이 말을 끝맺기 직전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용인이 들어온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노크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미나엘이 내게 또다시 들린 건가?
하지만 그녀는 노크를 철저히 하는 편이었기에 의아했다.
나는 프로셴에게서 시선을 떼고 문 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이를 발견했다.
“아.”
“세……르베인……?”
멜이 그곳에 서 있었다.
이전보다 창백해진, 하지만 더욱 아름다운 모습을 한 그가 서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초췌했고, 애써 생기가 돌았던 뺨은 서서히 식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