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 화 (79/132)

79 화

똑똑.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이 제안은 절대 거절하지 못하겠지.’

프로셴은 인어에게 바다를 보여 줄 생각이었다.

이거라면 저 인어를 되돌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인……간아.”

무심코 인어라고 부를 뻔하다가 수습하느라 또 이상한 호칭이 되고 말았다.

프로셴은 ‘자기도 인간이면서 매번 왜 저러는 거야.’라는 사용인들과 시종의 눈빛을 느꼈다.

결국 그 황당하다는 시선을 견디지 못해 프로셴이 헛기침을 하다가 말했다.

“자네들은 다른 곳에 가 있도록.”

“예, 폐하.”

저벅저벅……

사람들의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진 후 프로셴은 다시 문을 두드렸다.

인어가 늘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듣고는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바다 보러 갈래?”

말하고 보니 상당히 데이트 신청 같아서 기분이 끔찍해졌다.

당장이라도 제 양팔을 쓸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이겨 내고 이어 말했다.

“왕실 소유의 해변이 있어. 거기는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해. 그러니 시선 신경 쓰지 않고 산책해도 될 거야.”

있는 가식, 없는 가식 전부 끌어내어 상냥히 회유했건만 대답이 없었다.

바다를 보러 가자는 말에는 얼씨구나 걸려들 줄 알았는데 예상한 반응이 아니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혹시 못 들었나? 못 들었나 보다.’

제 회심의 권유가 먹히지 않았다는 걸 부정하며 다시 목소리를 내려 할 때 문 너머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프로셴은 문에 귀를 대고 물었다.

“어? 뭐라고?”

“……헛수작 부리지 마!”

쾅!

문에 둔탁한 무언가가 부딪혀 떨어졌다.

프로셴은 제 귀를 부여잡고 부들부들 떨었다.

고막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프로셴의 자색 눈이 분노로 번뜩였다.

그는 입술을 으득 깨물며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겼다.

그런데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아 결국 소리를 질렀다. 한계였다.

“실컷 생각해줘서 제안해줬건만 헛수작이라고 했나?! 누군 네가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

“세르베인이 부탁했기에 참고 보살펴줬더니 분수를 모르고 나대는구나! 네가 하는 모습을 보니……!”

‘아사나 고독사라도 바라는 모양인데, 바라는 대로 하도록 해!’라고 소리를 지르려다가 멈췄다.

그 말은 조금 심한 것 같았다.

‘결국 저 남자가 저렇게 된 것도…… 본인이 원해서는 아닐 테니까.’

프로셴은 쓴웃음을 지었다.

제 3자가 보기에 저건 너무 과한 애정이었다.

인어의 모습은 흡사 주인이 기르는 화초와도 같았다.

혼자서는 스스로 물도, 햇빛도 쫼 수 없는 존재.

애정을 주지 않으면 금세 말라버리는 꽃.

“하.”

결국 바람 빠진 한숨만 쉬는데 이상하게도 건너편이 조용했다.

그 침묵이 불길하다고 생각할 때 인어가 입을 열었다.

얼핏 웃음기가 서린 목소리였다.

“……왜? 이런 모습을 보니 세르베인이 왜 나를 안 좋아하는지 이해가 가?”

실성한 것 같은 음성에 프로셴은 소름이 확 끼침을 느꼈다.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프로셴이 다급히 항변했지만 멜은 조금도 들은 기색이 없었다.

그는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말을 쏟아냈다.

“세르베인이 나를 바다로 보내라고 했어? 돌아오기 전에 눈앞에서 치워 버리래? 내가 이렇게 굴고 있다고 전해 들으니 내가 질렸대? 그래서 바다로 가자고 하는 거야? 세르베인이 너한테 나를 바다로 보낼 거라고 말했잖아. 그래서 너, 그 애를 도와주는 거야?”

“으, 미친……!”

금방이라도 문이 열리고 괴물이 자신을 방 안으로 끌고 가 세르베인을 내놓으라고 흔들어댈 것 같았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프로셴은 몸서리치며 문에서 몇 발자국 떨어졌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세르베인이 돌아오기 전에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퇴로를 막아버렸다.

프로셴은 꿋꿋이 외쳤다.

“세르베인은 나한테 너를 치우라던가, 그런 말 한 적 없어. 그리고 나 역시 세르베인한테 네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한 적 없어. 몇 번을 말해. 그 애는 바빠. 편지든 뭐든, 주고받을 형편이 안 되는 것뿐이라고. 제발 정신 좀 똑바로 부여잡아.”

처음에는 인어가 미친 짓을 반복하는 게 진저리나고 끔찍해서 면박을 줄 의도였지만, 나중에는 진심으로 충고가 나왔다.

“진짜로 세르베인의 곁에 있고 싶으면 그 비정상적인 사고방식부터 고쳐!”

프로셴은 씩씩 화를 내며 뒤돌았다.

사실 인어의 반응이 무서워서 자리를 피하려는 까닭도 있었다.

“폐하.”

그런데 뒤돌자 시종이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프로셴은 못 볼 꼴을 보였다고 생각해 속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이내 들려오는 말에 겉으로 정말 비명을 질렀다.

“녹시렐 공작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그만!!!”

‘인어가 들었을까? 들었겠지?’

찰나의 순간에 지하 아래로 처박혔다가 왕성의 천장에 머리를 부딪히는 것만 같은 끔찍한 공포를 느꼈다.

심장이 바로 귀 옆에서 뛰기라도 하는 듯 쿵쾅거렸다.

프로셴은 여기서 그 말을 하면 안 된다고, 시종을 데리고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인어의 방이었다.

끼익……

숨이 끊기기 직전의 사람이 부는 피리 소리처럼, 절박하지만 처량한 소리가 들렸다.

오랜 시간 열리지 않았던 문의 경첩이 내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세르베인?”

“…….”

그 어조다.

처음에는 뭐라 딱 잡아 표현할 것을 찾지 못했지만 프로셴은 이내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는 이것과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분위기, 똑같은 정적을 알았다.

처음 저 남자를 저택에서 마주했을 때가 선명했다.

고대 유령과 같이 창백한 안색을 하고서, 명화에서나 볼 법한 귀족적인 이목구비의 남자는 그때도 같은 것을 물었었다.

동공이 풀린 눈을 하고서.

“세르베인은 어디 있어?”

이유 없이 토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공작님……! 돌아오셔서 정말로 기쁩니다. 목욕물을 준비할까요?”

왕성에 도착하자마자 사용인들의 이유 모를 환대를 받았다.

분명 떠나기 직전에만 해도 의부증 환자 취급을 하며 나를 피하던 걸 기억하기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리 하도록 해.”

나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하며 외투를 벗어 건넸다.

왕성에 발을 딛자마자 이유 모를 피곤함이 덮쳐온 탓이었다.

“헤론시에 대한 일은 내가 처리하고 있겠다. 너는 쉬어라.”

“고마워.”

왕성에 도착하자마자 상태가 안 좋아진 나를 보며 미나엘은 꽤 복잡한 낯을 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틸리타 역시 정확한 상황은 모르지만 대충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더 묻는 것 없이 내게 인사하고 미나엘을 따라갔다.

나는 방에 도착한 후, 사용인들도 곧 자리를 비울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그들은 우물쭈물, 뭔가를 말하고 싶은 것처럼 내 곁을 맴돌았다.

“그…….”

“왜 그러지?”

“아닙니다. 목욕물이 다 준비되면 다시 오겠습니다.”

정작 이유를 물으니 그들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이유를 알 수 없어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넘겨버렸다.

나를 피하는 이유가 있다면 성을 맴돌던 ‘의부증 환자설’때문이겠지.

“…….”

방 안에 홀로 남자 나는 여태껏 평정을 가정했던 것이 신기할 정도로 뛰듯이 걸어 창문을 활짝 열었다.

물에 빠지기라도 한 듯 숨이 막혀와서였다.

“……허억!”

나는 숨 쉬는 것이 불편해져 목 끝까지 잠근 단추를 몇 개 열어버렸다.

일이 많아서 그런 것이라고 넘기려 했지만, 사실은 그게 원인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가 나를 일깨워주니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발작적으로 앞으로 할 일들을 작게 중얼거렸다.

일이라도 해야 살 것 같았다.

“일단 알테슈메그 가테와 같이 모임을 하던 이들을 조사해야지. 요주 인물들은 처형시키는 수밖에 없을 거야. 그가 명분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아, 신성기사단. 그들도 처리해야 하는데. 작위 수여식도 남아 있군. 작위 수여식이 끝나고 나면 나는 방계 친척이 없으니 일을 도울 사람도 뽑아야겠지. 그리고 녹시렐 영지에서 고통받았던 사람들도 보살펴야 하고…….”

그러다가 말이 뚝 끊겼다.

문득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해야 하는 일을 나열하라고 시킨다면 끝도 없이 나열할 수 있었다.

오늘 하루를 다 보내 버릴 자신도 있었다.

끔찍이도 바쁜 삶이었다.

라헨이 죽은 후, 그가 나를 위해 준비했던 모든 안락한 삶을 떠날 때부터 시작된 휴식 없는 일정들이었다.

나는 내가 말한 모든 일정, 모든 의무와 스스로에게 부여한 과중한 책임감의 목표를 알고 있었다.

“전부 너를 위한 것이었는데.”

기억하지 못하던 시절에는 ‘사람을 신분으로 나눠서 대하는 건 부당하니까.’라고 뭉뚱그려 당위성을 설명했었다.

정작 공감은 하지 못했던 주제에.

성별도, 육체적 힘도, 어느 것으로도 평균 이상의 우위를 접하지 못하는 내가 누군가를 제어하고, 내 몫의 이득을 챙길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신분 덕분이었다.

내게 ‘귀족’의 명분은 아주 편리하고, 포기할 이유가 없는 특혜였다.

“그런데도 남들이 보기에 미친 짓을 해왔어. 너랑 동등해지고 싶어서.”

그 말은 즉, 네가 없다면 내가 이 일들을 할 이유가 사라진다는 의미였다.

모든 게 무가치해질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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