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화
‘어쩔 수 없나.’
그나마 한 명이라 다행이었다.
한 사람을 기절시키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았다.
미나엘은 자기가 나서겠다는 의미로 헤론시를 바닥에 앉혔다.
내게는 이곳에 남으라는 듯 고갯짓했다. 하지만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나도 헤론시를 내버려 두고 미나엘의 뒤를 따랐다.
그 순간, 우리와 아직 마주치지 않은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뜻밖에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였다.
“요즘 애들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니까.”
저벅, 저벅
“이게 다 내 딸이 너무 무르게 자란 탓이지.”
느긋한 걸음걸이였다.
중년 여성의 목소리는 우리와 겨우 두 발자국 남은 곳에서 멈추었다.
미나엘과 내가 코너만 돈다면 곧장 마주할 위치였다.
‘딸……? 무슨 이야기지?’
단순한 혼잣말은 아니었다. 이곳에 사람이 있다고 확신하는 어투였다.
미나엘은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기절만으로 해결할 수 없으니 목숨을 끊어놓겠다는 의미였다.
여자와 우리는 서로 마주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우리의 계획을 눈치채고 있다는 듯 웃었다.
어린 것들이 가소롭게 군다는 의미가 담긴 웃음소리가 그 증거였다.
“뭔가 계획하는 모양인데, 여기서 내가 3분 안에 나가지 않으면 너희도 살아서 나갈 수는 없을 거란다.”
그 말은 이곳을 우연히 지나다가 누군가의 침입 사실을 알게 된 게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우리가 이곳에 숨어들었다는 걸 알면서도 홀로 오다니.
저벅저벅.
나는 코너를 지나 여자를 만나러 갔다.
놀란 미나엘이 억지로 나를 끌어오려 했지만, 그 손길을 벗어나 단숨에 걸어 나갔다.
나는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우리를 당장 처리하는 게 목적은 아닌 것 같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이제 뜻을 파악하다니 느리구나.”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나는 그 불빛에 의존해 발끝에서부터 여자를 순식간에 분석했다.
경계하는 나와 달리, 이 상황 속에서도 여자의 몸짓은 느긋하기만 했다.
‘보통 사람이 아니다. 사교계에 오래 몸담은 귀족인가?’
온갖 문양의 레이스와 보석들이 달린 화려한 드레스.
알이 큰 보석 반지를 여러 개 낀 손가락.
주름졌지만 고운 편에 속하는 손은 양초 하나만을 들고 있었다.
무기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런 기백을 냈다는 것에서 담이 크다는 걸 엿볼 수 있었다.
나이는 40, 혹은 50대인가?
마지막으로 시선을 들어 여자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나는 급히 숨을 들이켰다.
“……당신.”
“나를 아는 눈빛이네. 뒷조사라도 한 모양이지.”
여전히 턱선을 넘지 않는 길이의 짧은 흑발이었다.
늘 그 아이의 취향대로 내가 저 정도의 길이로 잘라줬으니 잊을 리 없었다.
주름이 졌지만 나는 그녀가 어렸을 때의 모습을 단숨에 떠올릴 수 있었다.
보라색 눈동자가 나를 싸늘히 살폈다.
휙!
여자가 내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내 얼굴을 자세히 살피기 위함이었다.
그 손을 쳐낼 수도 있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웬만한 정보상은 나를 모를 텐데. 누구 입으로 들었지?”
……정보상 따위와 접촉한 적 없다.
하지만 알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내가 당신을 어릴 때 거의 업어 키웠는데.
틸리타. 내가 하슈 레이타였을 때에 돌보았던 아이를 다시 만났다.
내 앞에 선 여성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 긴장이 풀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기색을 드러내는 게 더 의심스럽겠지.
나는 서둘러 그럴싸한 변명을 지어냈다.
“사교 클럽을 운영하는 평민의 정보는 이미 쥐고 있었으니 알고 있었다.”
“…….”
“협상을 하지. 무엇을 원하나? 그대도 귀족파가 좋아서 그 남자를 보관하고 있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내 턱을 잡은 틸리타의 손을 부드럽게 풀어냈다.
여전히 싸늘한 보랏빛 눈동자는 나를 향한 경계가 담겨 있었다.
나는 그녀의 경계를 풀기 위해 조금은 과한 수를 내보였다.
챠륵.
“나는 세르베인 라헨 녹시렐. 세간에서 말하는 녹시렐 공작이다.”
여태껏 목깃에 가려져 있던 목걸이를 내보였다.
녹시렐 영지에 살았다면 모를 리 없는 물건이었다.
역시나 목걸이의 의미를 눈치챈 틸리타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떻게 공작이 여기에!”
“아직 공식적으로 작위는 못 받아 실무를 뛰는 것에 제한이 없어서 말이지.”
교황파들은 사라진 목걸이의 행방을 찾기 위해 가장 먼저 녹시렐 영지의 사람들을 털어댔었다.
혹시 사용인들이 훔쳤을까 봐, 그들이 근처 상점에 팔지는 않았는지 목걸이의 모습까지 수배지를 만들어 추적하던 이들이다.
틸리타가 혼란스러움에 굳어 있을 때 내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미나엘이 홀로 헤론시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게 보였다.
미나엘은 나와 틸리타를 천천히 번갈아 봤다.
미나엘은 내 얼굴에 틸리타에 대한 경계가 없는 것을 분명 눈치챈 것 같았다.
이윽고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그쪽도 우리와 함께 가도록 하지.”
* * *
다폴샤가 틸리타의 딸이었다니.
건물을 나서면서도 놀라움에 그 생각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를 않았다.
‘그땐 정말 조그마한 아이였는데.’
내 기억 속 여덟 살 아이가 누군가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게 신기했다.
게다가 다폴샤라면 현재 ‘나’와 비슷한 또래였다.
사교클럽을 빠져나오며 다폴샤는 경호 인력으로 보이는 인원들을 철수시켰다.
얼핏 보기에도 평범한 용병의 수준을 상회하는 이들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볼 때 미나엘이 곁에서 제안했다.
“당장 왕성으로 가는 건 어떤가.”
“미나엘. 하지만 이 남자를 우리가 계속 들고 다니는 건 힘들지 않을까?”
사교 클럽과 왕성은 어차피 같은 수도 안에 있었기에 걸어서 이동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우리에게 헤론시라는 의식을 차리지 못한 환자가 있었다.
“괜찮으시다면 일단 저희 집에서 쉬시다가 해가 뜨면 마차를 타시는 게 어떠십니까?”
나와 미나엘의 대화를 들은 틸리타가 적절한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우리는 틸리타의 제안대로 그녀의 집에서 머물다가 해가 뜨자 함께 마차를 탔다.
다폴샤 역시 함께 데려가려고 했지만, 그녀는 살롱을 당분간 휴업시키기 위해 처리할 일이 많아 나중에 왕성에 오기로 했다.
“평민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사업 수완이 대단하군.”
미나엘은 내게 틸리타에 대한 적의가 조금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 그녀에 대한 경계를 풀었다.
물론 감정적으로 친밀해졌다는 건 아니고, 업무적으로 그녀의 능력을 칭찬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과찬입니다. 부정한 땅에서 나갈 수 있게 되자마자 곧장 공식적으로 지평을 넓힌 것뿐입니다.”
“귀족들을 대상으로 사교 클럽을 운영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그 사업은 귀족들을 대상으로 하니 큰돈을 벌 수 있으니깐요. 그래서 했을 뿐입니다.”
틸리타는 기품있게 웃으며 조목조목 대답했다.
그 내용은 배짱이 크게도 귀족에 대해 조금의 선망도 없이 오직 돈의 크기로만 재단하고 있다는 사상을 내포하고 있었다.
‘하긴. 어릴 때도 꽤 영민한 아이였지.’
미나엘과 나누는 저 대화를 들으니 역시 틸리타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교황파 귀족들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는 동네에서 자란 아이니 당연한 사상일지도.
“세르베인의 영지에서 자랐다고 했나. 혹시 영지민은 그곳의 귀족과 성격이 닮는다는 법칙이라도 있나.”
나는 대화를 듣고 있다가 그 말만큼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건 아니고 동네가 원래 그래. 부정한 땅으로 지정돼 온갖 고생을 다 했는데, 교황파라면 이가 갈리지 않겠어.”
나는 미나엘의 말을 반박해주고 틸리타를 바라봤다.
틸리타의 표정은 제법 오묘했다. 하지만 그 기색이 이내 지워지고, 노련한 사업가의 모습으로 돌아와 말을 꺼냈다.
“공작님. 그나저나 길어도 사흘이면 귀족들이 자신의 물건이 사라졌다는 걸 눈치챌 겁니다. 그렇다면 저의 사업에도 큰 차질이 생기고요.”
그 말에 미나엘이 먼저 대안을 제시했다.
“그 살롱을 처분하게 되어 생기는 손해는 우리가 배상하지.”
“아니요. 저는 다른 사업을 추가하면 추가하지, 이 일을 그만둘 생각은 아직 없습니다. 그리고 이쪽이 공작님들께도 좋을 거라 생각되는데요.”
틸리타가 어떤 말을 꺼낼지 예상이 됐다. 그 말대로였다.
나는 그녀의 의중을 눈치채고 먼저 조건을 건넸다.
“왕실과 공작가에서 그대의 신변과 사업을 보호하지. 대신 그대는 계속 살롱을 운영하며 얻게 되는 정보를 우리에게 주었으면 좋겠군.”
“천한 평민이 주제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구두 계약은 취급하지 않습니다.”
“……문서화하겠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약삭빠른 점은 변하지를 않았다.
나는 속으로만 웃으며 그리 약조했다. 일은 꽤 순조롭게 흘렀다.
이후, 대화가 끊기자 나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왕성의 모습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일상과도 같았던 풍경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나는 껍데기 속에서 몸부림치는 심장의 답답함을 느꼈다.
* * *
인어는 이제 문을 잠그고 얼굴도 보여 주지 않았다.
토하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집착하던 음식조차 이젠 들이지 않았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세르베인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꼭 원상태로 복구해놔야 한다.’
식은땀을 죽죽 흘리던 프로셴은 멜의 방문을 두드렸다.
초조한 가운데서도 내심 어떤 확신을 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