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 화 (77/132)

77 화

“안 그래도 바쁜데 내가 이런 짓까지 해야 돼?”

편지를 위조하는 것도 시도해봤지만 역시나 먹히지 않았다.

더럽게 까탈스러운 안목이었다.

“내가 뭘 어째야 해, 세르베인?”

프로셴은 탁자 위에 엎어져 한참을 징징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제 집무실에서 보이는 바다에 시선이 멈추었다.

즈레이카 왕국의 수도는 바로 바다 옆에 위치했다.

즉, 높고 전망이 좋은 건물에서는 바다가 잘 보였다.

하지만 인어의 방에서는 보이지 않을 풍경이었다.

“저거다.”

프로셴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좋은 수가 떠올랐다. 

* * *

다음날 찾아갔을 때 미나엘은 그 장소에 있었다.

한 번도 밧줄을 푼 적 없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묶인 채 바닥에 앉아 있었지만 묘하게 태평한 분위기였다.

“왔군. 빵은 잘 먹었다. 하지만 나는 빵보다 샐러드가 좋구나.”

평화롭기 그지없는 말투는 감금당한 사람의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바닥에 앉아있는 미나엘의 얼굴에는 만족감조차 엿보였다.

나는 그게 꽤 황당했지만 별말 않고 미나엘의 옆에 앉아 대답했다.

“어쩌지. 오늘도 빵인데.”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지금 시각에 자리를 비우면 들키지 않나.”

“괜찮아. 네 감금은 오늘로 끝이거든. 그 귀족이 이만 풀어 주라고 했대.”

내 말에 미나엘이 고개를 푹 숙였다.

곧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미미하게 우울함이 섞여 있었다.

“그런가.”

“어째 아쉬운 것 같네.”

“실제로도 그렇다.”

혹시 일을 하기 싫어서 일부러 귀족 옷에 찻물을 뿌린 건가.

그런 추측이 고개를 들려 했지만 애써 무시하고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어떻게 밧줄을 풀고 여기를 들락날락했어? 내가 풀어줄까 해서 어제 왔었는데.”

“과소평가가 심하군. 그 정도 능력은 있으니 일부러 차를 쏟았지.”

“일부러 했다고?”

“그럼 내가 고작 찻주전자 하나 옮기지를 못해 쏟을 줄 알았나?”

‘역시 일을 하기 싫어서 그런 사고를 친 게 맞았나.’

헬쓱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앞으로도 미나엘에게 허드렛일은 시키지 말자고 속으로 다짐할 때 미나엘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내가 알아낸 게 꽤 있다.”

“그래? 나돈데.”

미나엘이 알아냈다는 정보에 대해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다.

미나엘이 일하던 건물에 오는 귀족들은 정말로 사교 목적으로 오는 이들 뿐이니까.

그보다는 내가 저쪽 건물에서 일하면서 목격한 일들이 더 큰 건수일 것이다.

우리는 각자가 알아낸 것이 더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동시에 입을 열었다.

“어쩌면 알테슈메그 가테가 위험인물일 지도 몰라.”

“왕의 혈통을 찾았다.”

정정해야겠다.

미나엘의 수확이 컸다.

내가 미처 놀라기도 전에 미나엘이 덧붙였다.

“그를 찾았으니 일을 그만두는 게 어떤가.”

……아무래도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충동이 미나엘에게 강력한 동기가 된 것 같았다.

* * *

그날, 미나엘과 나는 퇴근하는 척 건물 내부에 숨었다.

불이 꺼지고, 사용인들이 모두 퇴근한 사교 클럽 내부는 아주 조용해졌다.

‘그 남자를 잡으면 알테슈메그와 관련된 음모를 확실히 캐낼 수 있겠지.’

오늘 일을 벌일 줄 몰랐기에 별달리 챙겨온 무기가 없다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

평소라면 나보다 먼저 무기를 챙기고 대비를 했을 미나엘이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오히려 나를 꽤 만류했다.

“세르베인.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그 왕의 혈통이 알테슈메그를 이용해서 우리를 끌어내릴 음모를 짜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긴장하지 말라고?”

“딱히 위협이 될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되어서 말이다.”

그렇게 말한 후 미나엘은 나를 데리고 망설임도 없이 쑥쑥 걸음을 옮겼다.

불이 꺼진 건물은 매우 어두웠기에 나는 등불에 의지해 발밑을 자주 살폈지만 미나엘은 불편한 기색조차 없었다.

‘이런 길이 있었나.’

나 역시 초반에는 이곳에서 일했기에 건물 구조를 꽤 익혔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걷는 길마다 내가 모르는 길이 이어졌다. 간혹 가다가는 숨겨진 비밀 통로 같은 곳도 있었다.

“여기보다 더 지하가 있었어?”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서 살펴보니 숨겨진 문이 있더군.”

도저히 범인의 감각으로는 찾을 수 없는 문들이었다.

미나엘이 무슨 수로 이 길들을 찾아냈는지 의아했다.

나는 숨겨진 통로들을 앞두고도 정말 아무런 위화감도 느낄 수 없었다.

저벅저벅

그런데 미나엘을 따라 지하 3층까지 들어왔을 때,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

술과 이상한 약초를 함께 태운 듯이 지독하고 매캐한 향이 복도 전체에 퍼져 있었다.

“이게 무슨 냄새지?”

“정신을 빼놓는 향인 것 같더군. 위험하니 소매로 코를 막아라.”

미나엘의 조언을 따라 코를 막고 걸음을 옮겼다.

거의 도착한 것인지, 미나엘에게는 더이상 서두르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지하 3층이 목적지인 모양이었다.

구불구불한 복도는 마치 미로 같았다.

청소를 하지 않아 먼지가 굴러다니는 바닥은 도무지 왕의 혈통이 지낼만한 공간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저 문이다.”

미나엘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

그 층에 방치된 수많은 방들과 달리 사람의 발길이 제법 닿은 것 같은 방이 있었다.

내가 든 등불을 살짝 반사시킬 만큼 손때가 타 반질거리는 나무 문고리가 보였다.

그런데 그 나무문은 지상에 있는 살롱의 가장 허름한 창고보다도 못한 꼴이었다.

“여기에 사람이 있다고? 그것도 왕의 후손이라는 자가?”

미나엘은 고개만 끄덕일 뿐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았다.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에 허탈한 숨만 내쉬었다.

그건 허무함인지, 혹은 동정인지는 나조차 특정할 수 없었다.

‘귀족들이 이 자를 데리고 반란을 준비 중이라면, 나름 괜찮은 대접을 받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 나무 문에 가까워질수록 약품의 냄새가 진해졌다.

방 내부는 얼마나 더 심각한 건지 문틈 사이로 연기가 빠져나오는 게 보일 정도였다.

달칵

끼이익…….

낡은 나무 문이 삐걱이며 열렸다.

연기로 가득 찬 방 안에는 어느 남자가 인형처럼 나무 침대에 누워있었다.

도저히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환경이었기에 나는 소매에 더욱 코를 파묻었다.

“저 남자다. 지금은 정신이 없지만 나와 처음 만났을 때는 어느 정도 의식이 있었지.”

미나엘이 차분히 설명을 이어갔다.

나는 이런 환경에 버려진 존재가 왕의 혈통일 확률이 어느 정도 되냐고 말하려 했지만 입을 다물었다. 남자의 외모 때문이었다.

‘프로셴과 형제라고 해도 믿겠어.’

분명 프로셴과는 그저 먼 친척이겠지만 외양은 꽤 비슷한 점이 있었다.

프로셴의 선명한 금발과 미묘하게 차이 나는 남자의 머리칼은 창백한 백금발이었다.

어쨌거나 같은 금발 계열임을 제외하고도, 두 사람은 곱상한 이목구비 역시 꽤 닮아 있었다.

하지만 프로셴의 얼굴이 상당히 자신만만한 미남의 것이라면, 남자의 얼굴은 꽤 흐릿하고 금욕적으로 보였다.

안색이 창백하고 야윈 탓에 그리 보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때도 제정신인 것 같지는 않았지만, 본인의 이름이 헤론시고 왕의 후손이라는 것쯤은 분명히 말하더군. 귀족파들에게 납치당해 여기에 감금당해 있다고 말했었다.”

쥐고 있던 단검을 차츰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미나엘의 말대로 남자의 상태가 전혀 위협이 될 것 같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왔다.

“저 남자가 기력을 회복하면 왕위를 노릴지도 몰라.”

“그럼 이 자리에서 처리하는 게 깔끔하겠지.”

미나엘의 말이 맞았다.

애초에 그게 우리가 이곳에 잠입한 목적이기도 했다.

왕의 후손을 찾아내고, 더 위협이 되기 전에 그를 제거하는 것.

하지만 그렇게 말을 꺼낸 미나엘도 좀처럼 헤론시라는 남자를 해치지 못했다.

애초에 이곳으로 향할 때 무기가 필요 없다는 말을 꺼낸 것도 그녀였다.

‘결백한 약자의 목을 노리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있을까.’

머리는 계속 저 자가 살아있어봤자 우리의 계획에 좋을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손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결국 나는 한숨을 쉬며 결정을 미뤘다.

“이 남자의 처우는 프로셴한테 맡기자.”

“동의한다.”

프로셴에게 모든 심적 부담을 넘긴 우리는 홀가분하게 양옆에서 남자를 부축해 그곳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아무리 야위었다고 해도 그는 성인 남성이었기에 오롯이 우리 둘이 그를 옮기는 건 쉽지 않았다.

‘나만 힘에 부치는 건가.’

환자에게 못 할 짓이라 차마 실행하지는 못하겠지만…… 마음 같아서는 남자에게 찬물이라도 부어서 정신을 차리게 한 뒤 제 발로 걷게 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미나엘이 잠잠하니 나도 묵묵히 남자를 부축해 옮길 수밖에.

그런데 갑자기 미나엘이 걸음을 멈췄다.

멈칫.

“일이 곤란하게 됐군.”

처음에는 이유를 몰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그 이유를 깨달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다가오는 발소리가 있었다.

우리는 지금 변변찮은 무기도 없고, 의식이 없는 짐도 한 명 있었다.

하지만 발소리를 조금 더 분명하게 들은 후 나는 희망을 가졌다.

“한 명 같은데? 어쩌면 지나가는 길일 수도 있어.”

미나엘도 그 가능성을 생각했는지 주변을 살폈다.

우리는 등불을 끄고 복도의 구석에 몸을 숨겼다.

하지만 발소리는 더욱 가까워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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