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화
“먹고 일부러 토한 건 아닌 것 같고. 일부러 과식해서 토했나 싶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인어는 꽤 오랫동안 의식을 차리지 못했었다.
그래서 기름지거나 소화하기에 어려운 음식은 애초에 넣어주지도 않았는데 이러다니.
프로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혹시 병이 있나? 세르베인이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남겼던가? ……그럼 혹시 이거 내 잘못인가?’
프로셴의 얼굴이 서서히 사색이 되어갈 때 멜이 입을 열었다.
“음식을 줘.”
“독한 놈.”
프로셴이 인상을 찌푸리며 내뱉었다.
그는 눈을 감고 잠시 심호흡을 했지만, 결국 감정 조절에 실패하고 언성을 높였다.
“도대체 나한테 바라는 게 뭐야!”
“먹어야 해. 먹어야 세르베인의 곁에 있을 수 있어.”
일단 심신미약자에게 감정적으로 화를 내는 건 효과가 없다.
프로셴은 간신히 평정을 되찾고 최대한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세르베인은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널 잘 데리고 있으라고 했어. 네가 할 건 그냥 숨만 쉬고 건강하게 있으면 되는 거야. 음식은 왜 토했어? 의사를 불러줘?”
“세르베인을 데려와.”
“네가 이딴 식으로 굴어서 나한테 뭘 요구하려는 건데.”
“세르베인을 데려와.”
“그 애는 바쁘다고 했잖아!”
실패다.
프로셴은 다시 체통을 잃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제 눈앞의 인어는 안색 하나 바뀌지 않은 채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그럴 리 없어. 내가 쓰러졌잖아. 그런데 나를 떠났을 리 없어.”
“이…… 대화가 안 통하는데 나보고 어떻게 돌보라는 거야!”
바깥에서 듣는 귀를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프로셴은 도대체 이 이야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지 셀 수도 없었다.
몇 번이나 같은 대화로 돌아오는 것도 어찌 보면 재주였다.
“그럼 네가 언제 눈을 뜰지도 모르는데 세르베인이 계속 옆에 있어야 돼? 일이 밀려 있는데?”
“응. 계속 있어야 해.”
“넌…… 뭐가 그렇게 당당하지?”
“세르베인은 날 사랑하니까.”
“…….”
진짜 제정신이 아니구나.
프로셴은 이제 몇 번이나 꺼냈기에 욕하는 느낌도 들지 않는 단어를 속으로 삼켰다.
프로셴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세르베인이 인어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는 걸 알았다. 그게 성애적 감정에 가까운 것일 수 있다는 것 역시 고려하고 있었다.
여태껏 미나엘을 경계했던 게 우스워졌다.
정작 세르베인이 마음을 준 상대는 미나엘이나 저보다 오래 안 것도 아닌, 우연히 저택에서 마주한 인간이 아닌 생명체인데.
프로셴은 독기 서린 눈으로 멜을 바라봤다.
가만히 존재하기만 한 것으로, 사랑을 차지한 남자에게 싸늘하게 말했다.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면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는 거겠지.”
* * *
프로셴이 그 말을 한 뒤, 멜은 더욱 발작적으로 세르베인을 찾았다.
음식을 먹고 토하는 정도가 더욱 심해졌고, 때때로 방 안의 물건을 집어 던지기도 했다.
‘저걸 내가 다 치워야 하는데…….’
어질러진 방을 볼 때마다 프로셴은 혈압이 솟구치는 걸 느꼈다.
방안에 사용인을 들일 수 없으니 그걸 치워야 하는 건 자신의 몫이었다.
‘내가 왜 이러고 지내야 해?’
허드렛일을 안 해보고 산 것도 아니니 처음에는 참고 방을 치웠다.
하지만 점점 인어의 상태가 심각해지자 이제는 진저리가 났다.
왕이 이런 일이나 하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의사 좀 만나보자. 어?”
프로셴은 인어의 상태가 나아지면 방을 어지르는 정도가 덜해지리라 생각해 그에게 의사를 만나보라고 권유했다.
물론 정신과 의사였다.
아무리 봐도 프로셴이 보기에 인어의 문제는 정신적인 요소가 커 보였다.
“책 다 읽었어. 다 읽으면 세르베인이 온다고 했지?”
멜은 익숙하게 프로셴의 말을 무시하고 제 할 말만 했다.
제대로 식사도, 외출도 하지 못하는 이 상황에서 그는 철썩같이 프로셴의 말을 믿고 책을 읽어나가고 있었다.
벌써 그가 읽은 책은 열 권을 넘어섰다.
그 한 권, 한 권이 며칠 만에 읽는 게 불가능한 두께였지만 그걸 인어는 실제로 해냈다.
“와……아. 대단하네…….”
프로셴은 혼이 나갈 것 같지만 억지로 칭찬하는 척 감탄사를 냈다.
사실은 앞날이 걱정되어 식은땀이 흘렀다.
이제 인어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더 거짓말을 하기가 두려웠다.
실제로 책 내용을 물어보니 인어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 돼.’
‘이것만 읽으면 진짜로 세르베인이 와?’
‘그…… 세르베인이 좋아할 거야!’
여러 책으로 돌려막다 보면 포기하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인어는 포기하지를 않았다. 계획이 실패했다.
“……진짜, 내가 진짜로 미안한데 그거 사실 거짓말이었어.”
프로셴은 정말 목이 졸릴지도 모른다고 각오하고 말을 꺼냈다.
사실 거짓말 따위는 심각한 죄가 아니라고 생각해왔는데, 맹목적으로 그 말을 믿는 사람 앞에서는 거짓말을 계속하는 게 상당히 힘들었다.
“…….”
눈이 마주치면 죽으려나.
그리 생각하며 프로셴은 저절로 공손하게 시선을 내리깔고 바싹 허리를 펴고 앉았다.
이 왕국의 정점에 선 사람이 보일 태도가 아니라며 자존심 상해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진실을 들은 인어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늘은 기분이 그다지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알고 있었어.”
“……뭐?”
“그런데 책을 읽으면 조금이라도 내가 세르베인에게 쓸모가 있는 존재가 되겠지. 그러니까 네 거짓말 따위는 참아 주고 있었어.”
그 말을 담담히 내뱉은 멜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가득했다.
그는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앉아있는 프로셴에게 말했다.
“세르베인을 불러와.”
그동안 저지른 잘못이 있으니 프로셴은 이번에는 답답해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최대한 인어가 속상하지 않길 바라며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내가 진짜 미안하고 염치없긴 한데, 이건 진실이야. 세르베인은 바빠.”
“편지라도 줘. 나한테 편지라도 썼을 거야. 그 애는 바쁘면 편지를 써.”
“편지? 그런 건 없는데?”
“…….”
갑자기 긴 침묵이 찾아왔다. 프로셴은 눈치가 빨랐고, 직감이 뛰어났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이 상황을 뒤집어야 함을 알아챘다.
“하, 하하! 내가 착각했나 보다. 편지, 편지라! 찾아볼게. 분명 있을 거야. 오, 날씨도 좋은데 편지를 찾으러 가볼까? 기다려 볼래?”
“…….”
“……왜, 왜 그래.”
연기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윽고 인어가 실성한 것처럼 웃기 시작했다.
“하, 하하…… 아하하…….”
프로셴은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게 살면서 겪었던 모든 일들을 통틀어 가장 무서웠다.
한참을 웃다가 뚝, 인어의 웃음 소리가 끊겼다.
끔찍하리만치 조용한 침묵이 유지됐다.
프로셴은 숨을 최대한 참았다가 조용히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싸늘한 어조가 내리박혔다.
“네 말이 사실이야?”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울고 싶은 심정으로 프로셴이 물었다.
인어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국가적으로 공언이라도 내려줄 생각이 만만했다.
“세르베인은 정말 날 사랑하지 않는 거야?”
하지만 인어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올 줄은 몰라서, 그는 아주 잠깐 입만 달싹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그 말이 거짓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제 연적에게 그런 말을 할 미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해명 정도는 하려고 했다.
그건 제가 함부로 꺼낸 말이었다고, 홧김에 한 말이었다고. 그리 말을 꺼내려는 순간, 일이 벌어졌다.
“나가.”
쨍그랑!
순식간에 인어가 들고 있던 책을 내던졌다.
깨진 유리창 너머로 찬 바람이 들어왔다.
찬 바람에 머리칼이 흔들렸다. 프로셴은 굳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자 여태껏 다리가 부러지기라도 한 듯,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던 멜이 몸을 일으켰다.
단지 한동안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뿐인데 왜 섣불리 그가 영원히 걷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걸까.
마치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명화 속 인물이 움직인 것처럼, 그건 불길한 예감을 불러일으켰다.
저벅저벅.
“아, 잠깐, 내 발로 나갈게. 진정해!”
비틀거리듯 다가오는 걸음걸이가 심상치 않았다.
프로셴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혹시 뒤에서 쫓아올까 겁먹어 서둘러 문을 닫아버렸다.
터엉!
혹시나 문이 열릴까 봐 그 앞을 막고 섰다. 하지만 곧 인어의 힘이 세다는 것을 떠올리고 후다닥 떨어졌다.
다행히 문은 열리지 않았다.
“……내 성에서 쫓겨나다니. 이거 너무 말이 안 되는데.”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가 따질 용기는 나지 않았다.
인어의 얼굴은 처음 그 음산한 저택에서 마주했던 때와 같았다.
당시에는 인어가 위험한 수준으로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기에 겁에 질리지 않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미친 물고기는 피하는 게 답이지.’
터덜터덜, 프로셴은 지친 발걸음으로 집무실에 돌아갔다.
패배감이 느껴져 한동안 검술을 배울까 고민까지 했다.
그리고 현재, 인어가 그날부터 한 끼도 섭취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세르베인에게서 편지조차 없다는 것에 마음이 상해 그러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