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화
“직접 보고 들었으니 아시겠죠. 정말로 별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사교 클럽입니다. 매우 비밀스럽게 운영하고는 있지만…….”
본인이 없을 때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도 모르는 알테슈메그가 그리 말했다.
아마 자기가 없는 동안에도 차나, 계절 놀이 따위를 운운하고 있을 줄 알았나 보지.
알테슈메그는 귀족들이 대화를 나누는 내내 긴장하고 있었다.
혹여나 내가 듣는 동안 위험한 말이라도 나올까 노심초사하는 꼴이었다.
그건 모든 음모에 대해서 알테슈메그도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오늘 하루 잠잠했던 것 가지고 사람 눈을 속이려 드는군.”
부러 모르는 척, 오늘‘은’ 이상한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처럼 반응했다.
알테슈메그가 조금 안심하는 게 보였다.
“정말입니다.”
그런데 알테슈메그가 왕의 혈통인 ‘그’의 행방을 알 것 같지는 않았다.
모임에서 그 남자가 있으니 이제 알테슈메그가 필요 없지 않겠냐, 라는 말이 나왔던 걸 봐서 알테슈메그에게는 숨겼을 것 같았다.
나는 알테슈메그와 헤어지며 그에게 경고했다.
“경이 그곳에 오는 귀족들이 무슨 일을 계획 중인지 털어놓으면 가테 가문은 용서하고 받아주도록 하지.”
“……예.”
“또 기만하려 들면 이번에야말로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려 주겠다.”
나는 나의 원수였던 교황파들의 후손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미나엘에게 오늘 들은 이야기를 전해 줘야겠어.’
밤늦게 일이 끝나자마자 나는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살롱에서 다른 사용인들은 미나엘과 내가 친구인 줄 알지, 같이 사는 줄은 몰랐기에 각자 돌아가기로 했던 탓이었다.
“얘가 왜 이렇게 늦지……?”
하지만 그날 밤, 미나엘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 * *
밤 동안 계속 걱정했다.
나는 미나엘의 행방을 찾기 위해 수도의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어느 여자가 납치됐다는 흉흉한 이야기는 돌지 않았다.
‘그럼 그 클럽에서 생긴 문제인가.’
나는 해가 밝자마자 곧장 출근해서 다폴샤를 찾아갔다.
“제 친구가 어제……!”
“네가 찾아올 줄 알았지.”
역시 미나엘이 집으로 오지 못했던 건 사교 클럽의 일 때문인 모양이다.
나를 발견하자마자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한숨을 쉬던 다폴샤가 사정을 설명했다.
“어제 네 친구가 귀족 아가씨의 드레스에 차를 쏟았어.”
“……!”
“그 죄로 어제부터 감금당하고 있어. 식사를 주지 말고 사흘 동안 밀실에 넣으면 용서해 주겠다고 하더군. ……알잖아. 평민이 이런 장사 하려면 귀족들 요구는 다 받아 줘야 해.”
미나엘은 이런 허드렛일에 익숙하지 않을 것 같긴 했다. 그래서 이런 실수가 있었나 보다.
걱정으로 일그러진 내 얼굴을 보자 다폴샤는 서둘러 위로를 건넸다.
“그래도 그 정도면 정말 별거 아닌 벌이야. 손찌검도 안 했으니까.”
“그래요?”
“……뺨은 한 대 때리던 것 같기도.”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몸이 먼저 뛰쳐나가려 했다.
다폴샤는 내가 그 귀족을 들이받는 황소라도 된다는 듯 뒤에서 끌어안고 다급히 외쳤다.
“얘! 안 그래도 사나운 팔자 더 엉키게 할 생각이니?”
“……그냥, 얼굴이라도 봐 놔야 할 것 같아요.”
나는 곧바로 몸에 힘을 풀고 차분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더 의심스러웠는지 다폴샤는 더욱 창백해진 얼굴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가문명이라도 말해 주세요.”
“절대 안 돼!”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말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기색이었다.
속으로 못마땅해져서 혀를 찼다.
다폴샤는 여전히 내가 의심스러운지 나를 포박한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방향을 바꿔 꽤 처량한 척을 하고서 물었다.
“정말 누군지 안 알려 줄 거예요?”
“……대신 네 친구가 어디에 있는지는 이따 알려 줄게.”
다폴샤가 마지못해 나를 회유했다.
그럼에도 내가 만족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자 한 가지 제안을 덧붙였다.
“빵 정도는 몰래 넣어줘도 될 거야.”
상당히 자신 없는 말투였지만 꽤 마음에 드는 제안이었다.
미나엘을 굶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점심시간 때 몰래 빵을 챙겼다.
사실 꽤 당당하게 여러 개를 챙겼다. 덤으로 마실 것까지도.
“아이고…… 쟤가 저럴 줄은 몰랐지.”
내 행동을 목격한 다폴샤가 뒷목을 부여잡았다. 하지만 별달리 내게 그러지 말라고 나무라지는 않았다.
점심시간이 끝난 후. 사람들은 배가 부르자 신경이 느긋해지고 경계가 사라졌다.
그 틈을 타서 자리를 비웠다.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혹시 지키는 사람이 있을까 봐 미나엘이 갇힌 창고 문에 귀를 대봤다.
하지만 아무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달칵
“미나엘?”
하지만 방 안에는 감시로 붙은 사람도, 미나엘도 존재하지 않았다.
장소를 잘못 찾아온 건 아니었다.
미나엘을 묶는 데 쓰였던 밧줄은 칼로 잘린 흔적도 없이 매끄럽게 풀린 채, 바닥에 놓여 있었으니까.
‘미나엘이라면 스스로 밧줄을 풀어도 이상할 건 없지.’
미나엘이 누군가에게 납치당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일단 먹을 것들을 숨겨 두고 창고에서 빠져나왔다.
나중에 다시 확인하러 와야 할 것 같았다.
* * *
“이제 내 역할은 끝이지.”
세르베인이 떠난 후, 프로셴은 나름 자신했다.
본인은 인어에게 식사도 제때 넣어 주라고 했고, 읽을 책도 줬으니까.
게다가 사용인들에게 그곳에 지내는 남자를 바라보지 말라고 주의까지 줬다.
“당분간 그 남자를 또 만나러 갈 필요는 없겠어.”
제 딴에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며, 언제 소리소문없이 세르베인이 돌아와도 떳떳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적어도 식사 시간에 갑자기 뛰쳐나온 주방장이 무릎을 꿇기 전까지는.
“폐하.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지?”
식사를 하다가 웬 날벼락인가.
프로셴은 굉장히 당혹스러웠지만 제 입가를 최대한 교양있게 닦아 낸 후 영문을 물었다.
그러자 주방장이 식은땀을 죽죽 흘리며 말했다.
“귀하신 분의 입맛에 맞지 않는 요리를 올렸습니다. 제 미천한 실력 탓입니다. 온 왕국을 뒤져 그분의 입맛에 맞는 요리를 만들어 내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진정하게. 나는 그대의 요리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러는 건가.”
“그게…….”
조금 진정한 후 주방장은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보고했다.
그 말을 듣자 프로셴은 더 식사를 이어갈 수 없었다.
곧장 입맛이 사라져서 인어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식사를 남기고, 먹은 건 토했다고? 도대체 왜?’
의사를 불러야 하나.
그런데 인어도 의사에게 보이면 낫나?
여러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혹시 신체 기관이 인간과 다르면 의사 입을 막아야 하는데 그 호기심 많은 의사들이 순순히 입을 다물고 있을까.’
결국 나온 결론은 ‘제발 꾀병이길 바라자.’였다.
실로 도움이 안 되는 결론이란 걸 스스로도 알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마침내 멜의 방 앞에 도착했을 때 프로셴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했다.
아무래도 인어가 꾀병을 부리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폐, 폐하!”
사용인들이 인어가 머무는 방으로 들어가지도, 떠나지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문밖에까지 들려오는 헛구역질 소리를 듣다가 프로셴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방에 들어갔다.
터억!
“인……간아.”
프로셴은 혹시나 밖에서 듣고 있을 귀를 조심하며 말을 수습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헛구역질을 멈춘 멜은 물끄러미 프로셴을 보다가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방금 토했으면서 왜 음식을 먹으려는 거야?”
그 광경을 본 프로셴이 기겁을 하며 트레이를 밀쳤다.
무작정 음식을 치워야 한다는 생각에 생각보다 손이 거칠게 나갔다.
와장창!
침대에서 거칠게 떨어진 접시들이 산산조각이 났다.
멜은 텅 빈 눈으로 그 잔해들을 보다가 다시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프로셴은 재빨리 메뉴를 눈으로 훑었다.
종종 사람들에게 호불호가 갈리는 향이 강하거나 매운 음식들이 있는지 보기 위함이었다.
‘평범한데?’
하지만 음식에는 문제가 없었다.
스프와 샐러드, 식전 빵, 그리고 해산물로 된 메인 디쉬.
소스도 흰 편인 걸 보니 매울 것 같지는 않았다.
“우욱…….”
“내가 진짜! 하……!”
어쩔 수 없이 침대 밖으로 고개를 내민 멜의 등을 두드렸다.
프로셴은 험한 말을 할 것 같은 기분을 최대한 억눌렀다.
하지만 등을 두드리는 손에는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퍽!
“토할 것 같았으면 먹질 말았어야지.”
퍽!
“아프면 말을 해. 이런 식으로 시위라도 하면 세르베인이 달려올 줄 알아?”
한마디, 한마디를 꺼낼 때마다 박자를 맞춰 등을 두드렸다.
하지만 무슨 쇳덩어리를 두드리는 느낌이었다.
멜은 토하던 중인 게 믿기지 않게도 차분히 목소리를 내었다.
“책 다 읽었어. 세르베인을 불러줘.”
“그 책을 준 지 하루밖에 안 지났을 텐데. 거짓말 좀 작작 하지 그래.”
감정을 담아 등을 퍽퍽 때렸지만 인어는 아픈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결국 하찮은 체력을 가진 프로셴이 먼저 지쳐 나가떨어졌다.
드르륵!
프로셴은 근처에 있던 의자를 질질 끌고 와 앉았다.
그나저나 토사물을 보니 고작 묽은 스프를 먹은 게 다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