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 화 (74/132)

74 화

“자네는 교황파 귀족들을 다 죽였어야 한다는 내 말이 심하다고 했지. 하지만 그들은 신성왕국을 만들기 위해 왕실과 녹시렐 공작가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인 인물이라면 다 학살했다. 심지어 최근까지도 내게 암살자를 보냈지.”

“…….”

“굶주리는 백성들에게서 헌금을 걷어 폭동 직전까지 몰고 갔던 건 자네들의 행적이 아닌가? 죄 없는 이들을 잡아다가 분노를 돌리기 위해 마녀사냥을 일으킨 건 교황을 따르는 이들이 한 짓이 아닌가?”

알테슈메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권력을 얻기 위해 신앙을 이용하던 여타 귀족들과 달리 진심으로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만약 알테슈메그가 정말로 신을 믿어서, 진심으로 신앙심 때문에 귀족파에 들기로 결심했다면 그것 역시 비극적인 일이다.

그중에 정말로 신을 사랑해서, 신을 따르겠다고 다짐한 이들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나는 그에게 끊임없이 던지던 비수를 굳이 거두는 자비 따위는 베풀지 않았다.

“그 입으로 신의 존재를 운운하기에는 여태껏 신의 이름으로 해온 짓이 부끄럽지 않은가?”

“…….”

나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덧붙였다.

“부끄러워야 할 텐데.”

* * *

제 입으로 한 말이니 지켜야지.

사교 클럽에 온 귀족들의 명단을 넘기고, 원한다면 스파이 노릇까지 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알테슈메그를 살려 뒀다.

설령 그가 반역 행위를 했다는 것과 대놓고 교황파임을 드러냈지만 아직은 살려 뒀다.

“가테 공자. 뒤에는 뭘 달고 온 거지?”

“제가 달고 온 건 아니고…… 새로 들어온 사용인인 모양입니다.”

“저런. 원래 있던 하녀는 그만뒀나 보군.”

“…….”

알테슈메그는 말없이 가식적 미소만 지었다.

그는 익숙하게 화원에 마련된 의자 중 한 곳에 앉았고, 나는 화원의 구석에 서 있었다.

귀족들은 화원의 중앙에서 담소를 나눴다.

다만 어떤 귀족 남자는 이유 없이 내 근처를 서성이기 시작했다.

‘괜히 눈이 마주치면 시비에 걸리겠지.’

질이 나쁜 귀족들의 지긋지긋한 패턴이었다.

그래서 나는 약간 시선을 내려 아래를 바라봤다.

그럼에도 남자는 계속 내 주변을 맴돌더니 갑자기 내 귀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야!!”

“…….”

알테슈메그가 미리 언질을 줘서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이 화원에 모인 이들이 시각 장애나 청각 장애를 가진 사용인을 대상으로 장난을 많이 친다고 했다.

경멸스러운 작태였다.

‘장난은 무슨. 본인이 당하면 장난이 아니라고 펄쩍 뛸 텐데.’

“진짜 귀머거리네.”

남자는 킬킬 웃으며 내 머리를 툭툭 세게 쳤다.

이 화원에 모인 이들은 다 10대 후반에서 20대였다.

즉, 가주는 아니고 후계가 될 자제들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위험한 일을 작당하러 모인 걸 보니 분명 가주 대리로 온 것일 테다.

“얼굴 반반한데 넌 오래 붙어 있어라?”

그는 내 턱을 잡고 흔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쓰레기들이 여자를 대하는 꼴은 변하지를 않았다.

“독한 년이 들어왔네. 우는 기색도 없어.”

다른 남자가 낄낄대는 동안 귀족들이 몇 명 더 들어왔다.

총인원은 열세 명.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수였다.

“그만하고 이리 오게. 할 이야기가 많으니.”

“그러죠. 오랜만에 모인 것이니 회포를 풀도록 하죠.”

인원이 다 왔으니 술이든, 음식이든, 뭔가가 부족하면 내와야 할 터였다.

‘귀가 안 들리는 척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시중을 들지?’

잔이 비면 잔을 들거나, 뭔가 손짓으로 표현하려나?

그런 생각을 할 때 고귀한 척을 하는 다른 귀족들 대신 친절하게도 종이에 뭔가를 그려서 들어 올리는 건 알테슈메그 가테였다.

empty glass

그는 간단하게 빈 잔을 그려서 내게 보였다.

잔이 비었다는 뜻일 테다.

하지만 귀족이 직접 잔이 비었다고, 그림까지 그려주며 사용인에게 알려 주는 행동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종류였다.

‘잠입한 건데 눈에 띄게 친절하게 굴어서 골탕 먹이겠다는 건가? 감히 내 계획을 어그러뜨리려 해?’

속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며 잔을 채워 주러 갔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empty plate

이후로도 알테슈메그는 허접한 그림 실력으로 빈 접시 등을 그려서 보여 주곤 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다른 귀족 자제들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걸 보고 나는 상황을 파악했다.

‘늘 하던 일인가 보군. 여기서도 좋은 취급은 못 받고 있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밀고한 이들이 이 자리에 있는 귀족 가문들과 한배를 타고 있던 자들일 테니.

아무리 신앙심 때문이라지만, 실컷 친국왕파에 들어올 수 있는데 이곳에 속하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정도로 프로셴이나 친국왕파가 못 미더웠나? 그럴 리는 없는데?’

지금은 오히려 친국왕파가 너무 우세라서 걱정스러운 사태였다.

원래의 나는 계속 세력 균형을 원했기에 오히려 친국왕파의 힘을 약화하기 위해 굳이 성문법을 만들겠다, 귀족들을 탄압하지 않겠다, 그러고 있었으니까.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알테슈메그는 화장실에 가기 위함인지 자리를 비웠다.

귀족들은 온화한 낯으로 다녀오라고 말했지만, 알테슈메그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180도로 자세를 바꿨다.

“저 남자 때문에 우리 가문이 위험했던 걸 생각하면……!”

“녹시렐가의 악마가 누군지 알면 뭐 합니까. 그냥 작위 수여식까지 기다리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을 저 남자 때문에 먼저 알아서 당한 고난이 얼마였는지요!”

분명 내 신상을 알아내라고 요구한 건 그들일 텐데.

내 신상을 냅다 팔아넘긴 알테슈메그도 싫었지만, 귀족들이 그를 탓하는 걸 보니 황당함을 넘어 신기했다.

그들은 이후로도 알테슈메그를 향한 험담을 나눴다.

‘어쩐지 그동안 나눈 대화가 너무 온순하다고 생각했지.’

정말 사교 활동을 위해 모인 것처럼 ‘겨울이 왔다.’, ‘겨울에 마시기에 좋은 차를 추천해 줘요.’ 등등의 대화만 나누더라니.

아무래도 이들은 알테슈메그의 공 때문에 그를 이 사교 클럽에 초대하긴 했지만, 그의 가문이 해온 짓 때문인지 그를 믿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예상대로 다시 내게 붙었지. 뭐, 또 배신할 건수만 노리고 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올바른 선택이었다.

“적당히 세력이 약한 가문을 내밀어서 일을 무마하려 했는데 얼마나 지독하게 사람을 들쑤시던지!”

“켈리판 후작만 불쌍하게 됐지요. 겨우 목숨 부지하나 했더니 작위를 빼앗겼잖아요.”

“그 가문뿐인가요. 이번에 작위를 빼앗기지는 않아도 재산의 100분의 1만 남기고 다 몰수하던걸요! 평민처럼 살라는 건지!”

“녹시렐 가문이 왜 그동안 악마 취급을 받았는지 그 후계자를 보니 알겠군요!”

미나엘이 내 이름을 대서 모든 일을 처리했다더니.

역시나 프로셴의 말대로 나의 평판은 처참했다.

하지만 미나엘의 의도대로 그들의 얼굴에는 나에 대한 두려움이 엿보였다.

“당분간은 몸을 사려야겠어요.”

“……언제까지요?! 작위 수여식 때까지요? 그때까지 가면 일이 더 어려워질 겁니다!”

거봐. 왕위를 지키고 싶으면 빨리 작위 수여식을 해야 한다니까?

그걸 늦추는 게 귀족파들인데…….

나는 잠입이 끝나고 돌아가면 꼭 프로셴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존재도 모르던 혈육에게 왕위를 뺏길까 걱정되면, 본인의 측근인 우리를 더 믿어야 할 것 아닌가.

“괜히 알테슈메그 때문에 작위 수여식이 앞당겨지는 거 아닌가 몰라.”

“그가 왕의 기사 노릇 하며 녹시렐 공작의 위치가 어딘지 알려 주지만 않았어도!”

“그런데 알테슈메그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를 내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어느 귀족 공녀의 말에 화원 안이 조용해졌다.

그건 내심 나도 가지고 있던 의문이었다.

“굳이 그와 뜻을 함께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뭐. 이제는 ‘그’가 있으니 알테슈메그를 데리고 있을 필요가 없긴 하죠?”

알테슈메그를 내치자는 공녀의 의견이 힘이 실리기 직전에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명분이라는 게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신성왕국이란 이름을 버릴 수 없는 거고요.”

“그렇지만…….”

“지금의 왕이 천한 것들에게는 간이든 쓸개든 다 줄 것처럼 구는 상황에서, 다른 왕족이 있다고 곧장 그를 끌어내릴 순 없는 법입니다. 그놈의 민심이 뭔지, 참.”

‘그럼 알테슈메그가 이쪽에 붙어 있는 한, 새로운 왕족이 있으면 프로셴을 합법적으로 끌어내릴 수 있다는 말인가?’

한낱 가테 백작의 아들이 교황청 내부에서는 꽤 높았던 걸까.

조사했을 때 그런 내용은 없었는데.

하지만 그게 사실이어도 말이 안 된다.

애초에 가장 높은 직위의 교황이 백성들에게서 버림받은 참이다.

그런데 교황청에서 높은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신성 왕국을 다시 세우는 것에 민심이 찬성할 리가.

‘또 다른 패가 있는 거겠지. 어쨌든 알테슈메그의 신앙심을 봤을 때 그가 신성왕국 시절에 교황청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가능성은 있어.’

숨겨진 왕의 혈통보다 알테슈메그 가테가 더 위험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그리 판단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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