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화
프로셴은 피식 웃었다.
세르베인이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식인귀 소문은 헛소문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끊임없이 녹시렐 공작 저택을 감시하던 걸 보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게다가 먼저 기사를 데리고 가라고 한 것도 본인이었지.”
……물론 안전 제일주의인 자신이 한 기사단을 전부 데려갈 줄은 몰랐겠지만.
철커덩!
잠기지도 않은 저택 문은 기사의 손에 의해 거칠게 열렸다.
그 안에 존재하는 것이 무엇일까.
저택을 샅샅이 뒤질 생각을 했건만, 그 존재는 문을 열자마자 그 앞에 서 있었다.
“누구야?”
시체처럼 하얗고 표정 없는 얼굴.
아름답지만 아름답다고 말하기에는 기괴한 남자.
고대의 귀신이 저택에 뿌리내린 건 아닐까, 고민할 정도로 남자의 눈빛은 멍했고 목소리는 음산했다.
“떨어져라!”
기사들이 프로셴을 보호하며 남자를 밀어냈다.
그 순간 남자의 눈에 번쩍, 빛이 들었다.
프로셴은 저 무기 하나 들지 않은 손이 기사의 목을 뜯을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애써 심리적 동요를 억제하고 담담히 말했다.
“그만둬.”
“하지만…….”
“대화를 나누러 왔다. 우리가 방문객이니 너무 소란 피우진 말도록.”
“……예.”
기사들은 마지 못해 검에 올렸던 손을 거뒀다.
프로셴은 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남자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저택 안에 존재하는 것이 무엇이든 제압할 수 있는 병력이라고 큰소리쳤지만, 그는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싶진 않았다.
피는 흘리지 않을수록 좋다.
세르베인에게는 죽었다 깨어나도 하지 못할 말이지만…… 프로셴은 신을 믿었다.
프로셴과 기사들이 긴장한 것과 달리 남자는 태평하기까지 했다.
애초에 같은 장소에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듯 붕 뜬 느낌이 있었다. 남자는 똑같은 질문을 했다.
“누구야?”
“나는 이 나라의 왕이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세르베인을 알아?”
제 말을 끊은 남자의 말에 프로셴은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저 남자가 절대로 알 수 없는 이름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지?”
그 순간 남자의 얼굴이 환희로 가득 찼다. 그 표정 변화가 정말로 천천히 일어났다.
설원 같은 얼굴에 천천히 꽃봉오리가 올라오고 잎이 피어나는 듯했다.
“세르베인! 세르베인을 만나게 해줘.”
“나는 네가 그녀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나는 계속 여기서 그 애를 기다렸단 말이야.”
남자는 애처로운 얼굴로 부탁했다.
그 얼굴이 도저히 세르베인의 수많은 적들 중 한 명으로 보이진 않았다.
“산호빛 머리칼에 노란 수선화처럼 예쁜 눈을 한 아이야. 제발 그 애를 만나게 해줘.”
그 외모 묘사는 동명이인이라고 부정할 수도 없이 제가 아는 세르베인 녹시렐의 외모였다.
그런데…… ‘아이’라.
문득 프로셴은 이 남자가 세르베인의 친척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생판 남이라고 하기에는, 그가 녹시렐 공작가에서 살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여기서 저 남자가 세르베인을 만났을 리 없다. 세르베인은 살면서 한 번도 이 저택에 와본 적이 없으니까.’
즉 이 남자는 세르베인 조차 모르는 녹시렐 가문의 흩어진 혈족 중 한 명일 것이다.
어찌 된 연유인지 남자는 세르베인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암암리에 세르베인은 워낙 유명한 존재니 알 수도 있었다.
“알겠으니, 일단 진정해.”
프로셴은 남자를 동정했다.
그가 세르베인의 가족이라면, 남자는 프로셴의 사람이기도 했다.
“일단 자리에 앉아서 차라도 마시도록 하지.”
프로셴은 자신이 데려온 사람들 중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에게 눈짓했다. 그리고 기사들의 절반은 저택을 수색하도록 했다.
일단 이 남자는 미끼고 저택을 차지한 다른 세력이 있을지도 모르니 내린 결정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 남자도 연기를 하는 것일 수 있지 않나? 나는 왜 이 남자는 결백할 것이라고 너무도 쉽게 단정 지은 거지?’
뒤늦게 경계심을 세우려 했지만, 저택에 아무도 없다는 기사들의 말에 더는 그를 의심할 수 없었다.
결론을 내렸다.
세르베인의 친척인 것 같고, 워낙 애타게 그녀를 찾는 얼굴에 악의는 보이지 않으니 세르베인과 만나게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수도로 가지. 짐을 챙기도록 해.”
그 순간 계속 들뜬 것처럼 보이던 남자는 창백해졌다.
그는 작게 말했다.
그 말이 앓는 신음과 같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안 돼.”
“뭐라고 말했지?”
“나는 저택을 못 나가. 영원히, 영원히 여기에 있어야 해.”
‘정신병자가 확실하군. 이 저택에서 아무와도 교류 없이 지냈으니 당연한 결과인가.’
프로셴은 그의 처우에 대해 골치가 아파졌다.
그 순간, 떠오르는 게 있었다.
수도에는 오지도 못하는, 그저 상징적으로만 존재하는 녹시렐 공작이 있다면 어떨까.
제 사람에게는 마음이 약한 세르베인이 저택을 떠날 수 없는 그를 본다면 어떤 결정을 내릴까.
“……네게 선물을 주지.”
프로셴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에게 걸맞은 역할을 부여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네게 녹시렐 공작위를 주마.”
* * *
“일어났군.”
멜은 눈을 뜨자마자 인상을 찡그렸다. 흐린 시야로 금발의 남자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아는 사람 중 금발을 한 사람은 본인이 왕이라던 남자뿐이었다.
“……너는 저리 가. 세르베인을 불러 줘.”
“누군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줄 아나.”
프로셴은 턱을 괸 채 언짢게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멜은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잠자코 꺼지면 되잖아.”
“네가 누구 덕분에 세르베인을 만나게 됐는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
야심 차게 준비했던 계획은 멜이 저택을 나오게 되며 산산이 부서졌다.
게다가 그의 정체가 세르베인의 친척이 아니라는 점도 한몫했다.
“네가 세르베인의 친척이 아니란 걸 알았으면 못 본 척 버렸을 텐데.”
프로셴은 당사자를 앞에 두고 서슴없이 험한 말을 했다.
하지만 멜은 개의치 않았다.
조금 더 성질을 긁어 볼까,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가 잠잠한 시한폭탄이란 걸 이미 눈으로 봐서 알기 때문이었다.
‘괜히 저 인어 성질 긁었다가 미치기라도 하면 내가 곤란하지.’
짧게 혀를 찼다.
멜은 주인을 기다리는 개처럼 여전히 방문만 바라보며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불편한 심정으로 바라보던 프로셴이 입을 열었다.
“세르베인은 바빠.”
“그렇겠지.”
“변명이 아니라 진짜 바쁘다. 지금 왕궁에 없어. 나는 너에게 홀리지 않았으니, 다른 사용인들이 아닌 나에게 너를 보살피라고 했어.”
“그럼 어디로 갔어?”
순간 인어의 푸른 눈이 칼날처럼 빛났다.
멜은 숨도 쉬지 않는 듯 빠르게 내뱉었다.
“내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는데 나를 두고 갔어? 거짓말이야. 그 애가 그럴 리 없어. 네가 세르베인을 빼돌린 거지? 처음부터 이상했잖아. 나한테 녹시렐 공작위를 준다고 했었지. 너는 세르베인을 해치려는 게 목적인 거야. 지금도 세르베인을 어디에 감금해 놓은 걸 거야. 세르베인을 내놔!”
……저런 미친놈을 나한테 보살피라고 했다고?
프로셴은 욕이 나올 것 같은 걸 억지로 참아 냈다.
“아니야. 내가 찾으러 가야겠어.”
계속 중얼거리던 멜은 침대 밖으로 나오려는 건지 이불 밖으로 다리를 빼냈다.
그 모습에 프로셴이 기겁했다.
“야, 나한테 오지 마.”
드르륵!
급하게 프로셴은 의자를 뒤로 밀어내며 침대에서 멀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저 제정신이 아닌 인어가 제 목을 조르러 올 것 같기 때문이었다.
“…….”
“……뭐 하냐?”
그런데 뜻밖에도 멜은 이불 밖으로 나온 제 두 다리를 보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이내 이불 속으로 다리를 집어넣었다. 마치 감추기 위한 것 같았다.
‘이상 행동이 한두 가지가 아니군. 세르베인이 오면 전해 줘야겠어.’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는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침대 밖으로 나올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안심한 프로셴은 다시 의자를 가까이 밀고 가서 말했다.
“무섭게 굴지 마. 너, 세르베인한테도 그랬냐?”
“…….”
말이 없으니 그랬나 보다. 그래도 이보다 위험한 짓은 안 했겠지.
불행인지, 다행인지 프로셴은 세르베인이 멜과 저택에서 지내는 동안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 들은 바가 없었다.
프로셴은 이 남자와 더는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삐쭉대다가 책을 던지듯이 침대로 보냈다.
퍼억!
하지만 거기에 맞은 멜은 아픈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멜은 언짢은 기색으로 물었다.
“뭐야?”
“세르베인이 너한테 공부하라고 시킨 책.”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하며 제가 공부해야 하는 책을 멜에게 넘겨 버렸다.
프로셴은 히죽 웃고는 말했다.
“그거 다 읽으면 세르베인이 올 거야.”
‘열 밤 자고 나면 돌아올게.’ 같은, 어린아이에게나 할 거짓말이었지만 프로셴은 개의치 않았다.
인어의 지적 능력이 어린아이와 별반 다를 것 없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족히 한 달은 걸릴 거다.’
프로센은 인어를 골려 주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지려 했다. 멜이 어떤 표정으로 책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방에서 벗어나려다가 무심코 물었다.
“그나저나 식사는? 일주일 만에 깨어났으니 배고플 텐데.”
“…….”
멜은 오래도록 답이 없었다.
프로셴은 최대한으로 끌어 올렸던 인내심이 서서히 바닥남을 느꼈다.
‘제가 배고프다는 것도 바로 말 못 하나? 하여간 심신미약자는 대하기 어렵다니까.’
어디서 심리상담사나 정신과 의사를 데려와야 하는 건 아닌가 고민했다.
그때 멜이 작게 기어가듯 말했다.
“……준비해 줘.”